문화, 문화재

백제의 예술혼, 금동반가사유상

道雨 2008. 1. 5. 16:56

 

 

 

백제의 예술혼, 금동반가사유상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높이 19cm)



    머리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보살이 오른 손을 구부려 빰에 댄 금동반가사유상이다. 금빛과 형태도 온전하고 조각의 훼손도 거의 없으니 그 예가 드문 명품이다.

  일본에 전래되는 백제의 금동반가사유상과 비교할 때도, 조성 재료나 각부의 양식이 매우 유사해, 양국의 문화 교류를 알아 볼 사료적 가치도 크다.

  둥글고 높은 좌대 위에 걸터앉은 보살은 원만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두툼한 입술에는 아직도 빨간 색깔이 그대로 있어 립스팁을 엷게 바른 것처럼 보인다.

  반가좌한 오른쪽 무릎이 다른 반가상에 비해 몹시 올라갔으나, 연화좌대 위에 놓인 왼발은 지극히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단부에는 발견자가 성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돌에 쳐 깨진 타원형의 흔적이 비어 있다.

  이 불상은 국내외 불상 전문가에 의해 백제 유일의 금동반가사유상으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의 고집스런 판단으로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한 채 가짜로 대접받고 있다. 


    

 

부소산에서 출토된 불상 

   이 불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충남 부여에서 버스 운전을 하는 유대웅(劉大雄)이다.  

  1993년 10월의 일이다. 하루는 유대웅이 꿈을 꾸었는데,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르기를, 부소산에 올라가 보거라’하고 말했다.

  너무나 생생한 기억에 난이나 캐자는 심사로 부여의 뒷산인 부소산을 천천히 올라갔다. 마침 전날에 비가 많이 와서인지 이곳 저곳에는 흙이 파여 나간 곳이 여러 군데 보였다.

  두리번거리며 난을 찾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흙더미에서 금빛을 띠는 쇠붙이가 보였다. 깜짝 놀란 그는 달려 가 물체를 집어 올렸다. 한 뼘이 조금 안되는 물체가 묵직하면서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 쉰 그는 흙을 떼어 내며 안쪽에 있는 형태를 살폈다. 금빛이 찬란한 불상이 의자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급한 김에 불상을 땅에 내려놓고는 무릎을 덥석 꿇어앉으며 합장했다.‘아, 이 불상을 발견하려고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났구나.’ 불상을 다시 천천히 살피니, 조각이며 형태가 너무 온전했다.

  ‘왜 불상이 이곳에 있지?. 혹시 가짜는 아닐까. 그런데 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니 전체가 금일지도 몰라.’ 순금 일거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은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콩당콩당 뛰었다.

  불상을 거꾸로 들고 아랫부분을 바라보았다. 속은 휑하니 비고, 안에는 흙이 가득 차 있었다. 녹도 많이 슬어 있었다.

   ‘한번 돌에 쳐볼까.’ 그는 불상을 집고서 곁에 있던 돌에 불상을 툭 쳐보았다. 그러자 뚝하는 소리와 함께 불상의 아랫부분이 타원형으로 떨어지며 간당거렸다.

  ‘이크, 안되겠다 빨리 내려가자.’ 정신이 빠져 버린 그가 급히 산을 내려오는데, 발이 헛놀려지고 몸은 허공으로 두둥실 떠다니는 듯 하였다.

  그의 머리 속에는 지난 가을에 있었던 일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하루는 운전을 마친 그가 버스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빈 좌석 아래로 보따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무슨 보따리인가 싶어서 끌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는 뜻밖에도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어떡하지, 그냥 가질까. 안돼!’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는 그 길로 경찰서로 찾아가 신고했다. 보따리에는 자그마치 600여 만원이나 되는 큰돈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은 어느 농부가 잎담배를 납품하고서 받은 돈이었다.

     유대웅이 금동반가사유상을 발견한 곳은 부소산 사비루 아래쪽이다. 부소산은 백제 궁궐 내에 있던 산으로 그곳에는 백제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가 여러 개 있다.

  특히 그곳은 사비루와 가까워 백제 유물이 항상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장소이다. 왜냐하면 1919년에 사비루 터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 보물 제196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불상은 크기가 8.5센티미터이며 주형 광배(舟形光背)에 부처와 두 협시보살이 함께 주조된 특이한 형식의 불상이다. 현재 부여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6세기경에 많이 유행한 불상 형식이다. 광배 뒷면에는 ‘정지원(鄭智遠)이 죽은 부인 조사(趙思)를 위해 불상을 만들고, 삼도(三途:지옥도․아귀도․축생도)를 일찍이 떠나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발굴 문화재에 대한 신고와 보상 절차에 알지 못했던 유대웅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불상을 방안에 모셔 두었다. 그러자 그 집을 다녀가는 사람들에 의해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어떤 사람은 빨리 신고하라고 부추겼다.

  ”이봐, 신고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 그러니 빨리 신고를 해.“ ”어디에다 신고를 하는데?“ ”부여 박물관을 찾아 가 봐.“ 1994년 5월이다. 그는 불상을 직접 들고서 국립부여박물관을 찾아가 신고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깜짝 놀랐다. 그 때까지 백제의 금동반가상은 한 개도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국립중앙박물관의 강우방 학예실장과 기자들이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출토 경위를 들으며 불상을 감정하던 강우방은 연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불상 형식이야….”그가 의심스런 눈빛을 보내자 기자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그는 불상이 과연 백제의 진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백제의 불상으로 금동반가상은 아직 출토되지 않았고, 또 전면을 덮은 금빛이 너무 휘황찬란하고, 조각의 세세한 부분까지 온전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온 불상은 여러 학자의 감정을 거친 뒤에 결국은 모조품으로 판결 났다. 근래에 만든 공예품으로 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불상은 유대웅에게 그 즉시 반환되었다. “뭐야, 이것을 내가 만든 것이라고. 미친놈들!‘ 유대웅은 너무나 화가 나 길길이 날뛰었다. 시멘트 바닥을 내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불상을 던져서 박살내고 싶었다. 불상을 집어든 손이 덜덜 떨리었다.


    감으로 감정하는 세상


    가짜로 낙인 찍힌 이 금동반가사유상을 진짜로 인정받고자 지독하게 고생한 사람이 있다. 바로 장안동에서 고미술상을 경영하는 백부영(白富榮)으로 현재 금속 유물에 관한 전문가로 통한다. TV ‘진품 명품’ 프로에서 감정단으로 출현해 유물을 감정하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금동반가사유상이 가짜로 판결 받아 유대웅에게 되돌려 주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백부영은 그 날로 부여로 내려갔다.

  “가짜로 판결났으니 저에게 양도하시지요.” “버렸어요. 가짜라고 해 화가 나 백마강에 버렸어요.” 백부영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호락호락 풀릴 문제가 아니였다. 그래서 대포 집으로 유대웅을 데리고 갔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를 잘 해 봅시다. 어짜피 죽은 물건이 아니요?” “무슨 소리요. 개뿔도 모르는 작자들이 가짜라고 하지요.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 알아보았더니 틀림없다고 했어요.”

    백부영은 그 후 몇 차례 더 부여를 오르내렸다. 그러자 유대웅은 슬며시 불상을 내 놓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백제의 불상이고, 더구나 희귀한 반가사유상이었다.

  그가 육안으로 진품이라 판정 내린 것은 불상 아랫부분이 타원형으로 떨어져 나간 부분 때문이다. 만약 근래에 만든 모조품이었다면 돌에 쳤을 때에 떨어지지 않고 찌그러졌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금속 내부에 결집력이 약해져(전이 현상) 쉽게 떨어진 것이다.

  백씨는 감사한 마음에 1억 5천 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불상을 매입했고, 거래를 거들던 사람에까지 인사를 하였다.

  백부영은 먼저 백제의 반가사유상에 대하여 공부를 시작했는데, 불행히도 한국에는 금동으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진짜로만 인정받으면 곧 국보야. 국보.' 백부영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학자들을 찾아가 조언을 들었다. 그가 사전에 공부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현재 한국에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반가사유상은 없습니다. 돌에 새긴 것이나, 금판에 새겨진 것이나, 아니면 석비에 새겨진 것밖에는 없지요.”

  전문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현재 백제 시대의 반가사유상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먼저 서산 가야산 절벽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 국보 제84호)이 있다. 반가사유상이 석가여래입상의 왼쪽에서 풍만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다.

  또 전북 김제의 폐사지에서 출토된 백제 판불상(板佛像, 6.5×6.4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은 반가사유상을 중심에 두고 두 나한이 시립한 조각이 새겨 있고, 충남 연기의 비암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미륵보살반가석상(彌勒菩薩半跏石像, 40cm, 보물 제368호)은 반가사유상이 중앙에 위치하고 좌대 아래로는 보살이 좌선한 형식이다.

  “그럼 일본에는 혹시 없나요. 당시 만해도 백제와 일본의 문화 교류가 많았잖아요?”“2구가 있어요. 하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어도 이것들은 금동으로 만들어진 거여요.”

     일본에 전해지는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은 간쇼잉(觀松院)에 소장된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高29.9cm)과 마쓰다 미쯔(松田 光)가 소장한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高 17.5cm)이 있다. 그런데 관송원의 불상은 큼직한 보관을 쓰고 인자한 모습이나 불에 그을려 전면이 검다. 또 마쓰다의 불상은 불로 인해 세부적인 조각이 마멸되었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자, 백부영은 이 불상을 추호도 의심이 없는 명품이라 생각했다. 그 후 이 불상을 감정한 교원대 정영호(鄭永鎬) 교수가 『문화 사학-1995. 3월호, pp11-49』에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의 신례〉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문화재 위원인 정영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제작 기법 상 전형적인 백제 시대 양식의 진품이다. 일본에 소장된 백제의 금동반가상과 비교할 때, 손목에 팔찌 장식이 있고 허리에 나비형 매듭이 장식된 점에서 기법이 똑같다. 백제 말기인 600년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기를 얻은 백부영은 불상을 들고 대전에 있는 한국자원연구소를 찾아가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학자들의 ‘감’보다는 과학적인 성분 분석이 더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분을 조사한 한국자원연구소는 〈성분분석성적서〉를 보내 왔다.

《주석(Sn)의 함량이 녹슨 부위에 높고, 구리(Cu)의 함량은 표면보다 내부가 높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원소가 전이된 것이다. 특히 근래의 불상에는 없는 비스무트(Bi)가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몇 가지 중요한 소견이 첨부하며, 녹슨 부위의 주석 함량이 다른 부분보다 높은 것은 오랜 세월동안 구리가 유실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백부영은 성분분석서를 첨부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불상 감정을 재요청했다. 그러나 강우방의 대답은 변함없이 단호하기만 했다.

   “감(感)이 아닙니다.”

  절벽에 부딪힌 백부영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바닥부터 뜯어고치겠다고 마음먹었다. 소위 몇몇 전문가의 감에 의한 문화재 감정을 보완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감정 과정을 확립할 것을 재삼 다짐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높은 학문의 문턱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아, 우리 나라 문화행정이 어떻게 실권있는 한 사람의 의견에 좌우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의 말 한마디면 진짜가 가짜가 될 수 있는가.”

  백부영은 쓰라린 분루를 삼키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불교미술을 전공한 분이라 혹시 잘못 볼 수도 있어. 그렇다면 다른 원로 전문가의 의견을 첨부하면 이해 할거야.”

  백부영은 최고의 불상 감식가이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황모(黃某) 교수, 문화재 위원인 홍모(洪某) 관장, 문화재 위원인 맹모(孟某) 씨를 1995년 6월에 찾아가 감정을 의뢰했다. 불상을 감정한 그들은 한결같이 진품이라는 소견서를 써 주었다.

    《부여 고도에서 출토된 최우수한 백제 작품으로 판정하며 국내에 영구히 보전되어야 한다.》


    칠전팔기의 각오로 백부영은 이번에는 한국고미술협회를 찾아갔다. 그러자 사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고미술협회는 ‘진품’이란 감정서를 발급해 주었다. 1995년 8월의 일이다.

    《본 불상은 삼국 시대의 진품으로 감정하고 증명한다》

    유물을 거금으로 구입했을 경우, 진짜가 가짜로 판정되면 소장가는 패가망신하기가 여반장이다. 세월이 지나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급기야는 골동 가게와 집이 법원의 경매 물건으로 자리잡았다. 백부영은 하루빨리 불상을 문화재로 지정시킨 뒤 마땅한 수집가에게 양도해 그 동안 받은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일은 점차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1995년 9월, 불상을 감정한 정양모(鄭良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원로 학자들의 견해보다는 후배인 강우방의 손을 들어주었다.

  “학예 실장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백부영은 땅을 치며 억울해 했다. ‘그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본 때를 보여주어 각성하도록 만들겠다. 나 한 사람과 이 불상만이 당할 일은 아니다. 저들의 어리석은 감식안과 애매한 학문적 태도는 결국 이 나라의 문화 행정을 뿌리째 썩게 만들 것이다.’

    백부영은 사건 전말을 기록한 탄원서를 국회에 제출했고, 그 결과 국회의 문공분과위위회는 1995년 10월 문체부 장관과 박물관 관계자를 출석시킨 뒤 불상에 대한 국정감사를 하였다.

  질문자는 국종남(鞠鍾男) 의원이었다.“전문가들끼리도 이 불상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니 재 감정을 해 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부영은 또다시 이 불상에 대하여 문화재지정검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재심의는 열리지 않고 이상한 전화가 계속 집으로 왔다.

  “이봐, 당신 자꾸 까불고 다니면 혼 날 줄 알아. 그리고 말이야, 재심하여 진품으로 확정되면 국가에 환수되어. 알겠어.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여보세요, 당신 누구요?” “….” 협박 전화는 계속되었고, 재심의는 열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백부영은 백방으로 문화재지정행정의 모순 점을 떠벌리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수갑을 채워서 성북 경찰서로 끌고 갔다. 1995년 11월 중순이다. “여보시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잡아가는 거요?” “당신 말이야. 악질이야. 고미술협회와 짜고 불상의 감정을 조작했고, 또 비싼 값에 팔려고 다녔잖아. 당신은 사문서 위조에 사기 범이야. 알겠어.“

    형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백부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가짜로 판정 받은 금동반가사유상을 고미술협회와 짜고 진품으로 확인 받은 뒤 50억 원에 팔려고 했다는 협의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소.” 일간신문과 TV는 백부영이 문화재 모조범이라며 경찰에 붙잡혀 구속된 사실을 대서특필하고 얼굴까지 대문짝 만하게 내 보냈다.

  죄목은 ‘매장물 취득과 사기 횡령죄’였다. 그는 너무도 억울했으나 이 나라 경찰 행정과 인권은 어찌된 일인지 그의 편에 있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풀려나올 욕심으로 거금의 돈을 빌려서 변호사를 샀다.

  감옥을 나온 그는 한국보다는 일본을 생각했다. 물론 민족적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상이 만든 예술품을 일본인에게 감정을 의뢰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적 수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었다. “안돼요. ‘비문화재확인원’을 발급할 수 없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이 물건이 문화재가 아니라는 확인서를 받아 오십시오.”

    지정된 문화재든 비지정문화재든 문화재를 해외로 가져 나가기 위해 김포공항을 통과하려면 김포공항문화재관리관의 ‘비문화재확인원’을 발급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감정관은, ’본 건은 문화재 가치 여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문화재관리국의 명확한 판단을 요함.‘이란 판정을 내렸다.

   백부영은 난감했다. 이미 국정감사 후에 문화재 지정을 의뢰한 상태라서 문화재가 아니라는 문서를 발급해 줄 까닭이 없던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재지정심의회는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빨리 일본에서 감정을 받고 싶었던 그는 급기야 극약 처방을 내렸다.

    《의견이 분분하여 결론을 얻기 어렵고, 많은 시간이 경과되어 정신적 피로에 겹쳤다.》

     백부영이 불상은 가짜이니 ‘비문화재확인서’를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문화재 관리국에 제출한 소견서의 내용이다. 1996년 1월의 일이다. 그러나 묵묵부답. 아무런 조처가 내려지지가 않고 세월만 덧없이 흘러갔다. 그 동안 법원은 몇 번이고 백부영의 가게와 집을 경매에 부쳤다. 그러나 유찰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6년 5월에 불상의 문화재적 가치 여부에 대한 문화재평가심의위원회가 열렸다. 예상했던 대로 ‘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평가함.’이란 공문서가 백부영의 집으로 날라들었다.

  그런데 당시 심의회에 참석한 문화재 위원에 대하여 세상의 의혹이 많았다. 5명의 위원이 참석했는데, 그 중에서 불상에 대한 전문가는 오직 동국대의 문명대 교수 한 명이었고, 나머지는 불교 미술이나 도자사를 전공한 분들이다. 이 심의회는 전적으로 문명대의 주장에 따라 다른 위원들이 들러리를 선 격이다.


     7~8세기의 불상으로 확증합니다


    살아갈 의욕까지도 잃어버릴 만큼 백부영은 절망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할 때 ‘이 나라의 문화 행정을 각성시키고야 말겠다.’라는 오기가 들어 머리카락이 삐죽하니 곤두섰다.

  그는 서울시에 여러 번 진정을 냈다. 그러자 서울시는 ‘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평가한다.’는 공문서를 근거로 공항문화재관리실에 통보를 해 주었다. 그래서 백부영은 이 불상을 1996년 8월에 일본으로 가져갈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보다 분석 방법이 우수한 일본의 감정을 받아 일거에 우리 학계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 보겠다는 오기의 발로였다.

  백부영은 무작정 일본의 대화 문화관(大和文化館)을 찾아갔다. 안면이 없던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는 일언지하에 불상의 감정을 거부하였다. “미안하지만 밖에 약속이 있어 나가 보아야 합니다.” 요시다가 급히 자리를 피하려 하자, 백부영은 골동상의 신분까지 속이고는 급히 무릎을 끓으며 소리를 질렀다.

  “저는 당신을 만나러 한국에서 온 사람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약속인지는 모르나 나를 위해 시간 좀 내주십시오. ” 요시다가 흠칫 놀라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이 불상은 꼭 한국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유산입니다.” 백부영의 자초 지정을 들은 요시다는 생각에 골몰하다가 드디어 협조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이 불상은 곧 일본문화재연구소로 보내져 성분분석에 들어갔다. 몇 일간의 분석이 끝났을 때, 불상에 대한 평가회가 열렸다.

    《CT촬영과 X-선 검사에서 불상 금속 내에 기공 현상이 발견되고, 금속의 원소간에 전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또 아연이 검토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상이 7~8세기의 불상으로 확증합니다.》

    공식적인 입장에 이어 일본의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이 불상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대화 문화관 학예부 계장, 무라다 세이고(村田靖子)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라 했고, 나라국립박물관 주임연구원인 이노우애 가즈도시(井上一稔)는, “전반적으로 대단히 좋은 작품으로 생각하며 7세기경의 작품이다.” 라 했다. 나라국립박물관 연구실장, 마쯔우라 마사아키(松浦正昭)는, “국보 급으로 사료되는 훌륭한 문화재라 생각한다.” 라 말했다.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온 백부영은 그러나 국내에서는 또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관계자는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국의 불상은 한국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그리고 분석치만을 가지고 진품, 가품을 판단한다는 것은 세계적인 문화재보전과학수준에서도 불가능합니다.“

     백부영은 화가 났다. ‘벽창호도 유분수’지, 한국자원연구소의 성적서, 원로학자들의 소견서. 일본내의 분석자료와 학자들의 의견서, 그리고 한국고미술협회의 감정서가 그 한마디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황당무계하고 비상식적인 말들이 이어졌다. “그 불상은 내가 배우고 본 양식이 아니여서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문화재는 문화현상이 결집된 것이어서 과학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이 본 양식이나 선이 아니면 모두가 가짜라고 하는 주장에 백부영은 소름이 끼쳐 오며 혀가 내둘러졌다. 그래서 심의 위원들의 감식안을 따지고 들었다.

  “현재 문화재위원회의 위원 규정은 사계의 권위 있는 전문가로 구성되고, 또 심의를 전문 분야별로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성이 결여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그럴듯한 말이지만, 구차한 변명에 대하여 책임을 떠넘기는 공무원다운 일갈이다.

    그 이후에 백부영이 격은 좌절과 고통을 여기에 더 쓴 다는 것은 오히려 사족이 될 뿐이다. 필자 역시 이 불상과 인연이 닿아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해 다각도로 애를 썼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결이 되지 않아 매우 안타깝다.

  이 불상은 현재 백부영이 빌려 쓴 빚의 물모로 잡혀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다. 끝으로 불상도 살고 소장가도 사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바램에서 황자총통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 신문에 난 기사 한 토막을 게재해 본다. 


    『반면 지난 93년 부여 부소산성 부근에서 우연히 발견된 금동반가사유상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의 감정 결과 가짜로 판정 받았으나, 지난 해 정영호(鄭永鎬) 한국교원대 교수가 논문을 통해 「제작기법상 전형적인 백제 시대 양식의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등 시비가 잇따르고 있다. 이에 대해 국립박물관의 관계자들도 당시 감정이 졸속으로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있다. ’96. 6. 24, 문화일보, 최영창기자』

 

 

***  이 글은 고제희의 '우리 문화재 속 숨은 이야기'(문예마당)에서 뽑아온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