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포석정과 포석사

道雨 2008. 1. 10. 16:28

 

 

* 이 글은 '토함산 솔이파리'님의 블로그에서 스크랩해온 것입니다.

 

 

 

                        포석사의 진실

 

 

 

                                         

 

 

 

 

  <화랑세기>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 수 없었거나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려 주고 있다. 신궁과 포석사도 그 중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에는 신궁이 21대 소지왕 9년(487) 2월, 또는 22대 지증왕 때 세워졌다고 나온다. 신궁을 세웠던 장소인 나을은 시조가 탄생한 곳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포석정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신궁과 포석사에 대한 약간의 기록이 있다. 그러면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궁과 포석사는 어떤 곳이었을까?

 

  먼저 <삼국사기>에 나오는 포석정과 관련된 기록이다.

 

  (경애왕 4년)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대를 쳤으므로 왕은 태조(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날랜 병사 1만을 내어가서 구원하게 했다. 견훤은 구원병이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별안간 왕경으로 들어왔다.

  왕은 비빈 . 종척 . 외척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하며 놀다가 적병이 닥치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에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첩 몇 사람이 후궁에 있었는데 군영에 잡아다 왕을 강제로 자살케 했고 왕비를 강간했다. 그리고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비첩들을 욕보였다. 그리고 왕의 족제를 세워 나라일을 맡기니, 이가 경순왕이다.

 

  경애왕이 잔치를 벌이고 놀다가 견훤의 침입을 받았다고 하는 포석정은 놀이터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보면 경애왕 4년(927) 11월은 왕이 잔치나 하고 놀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9월에 견훤이 고울부에 침입하였고,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왕건이 1만 군대를 보내었으나 이르기 전에 견훤이 별안간 왕경으로 쳐들어왔다.

  현재의 영천인 고울부에 견훤이 쳐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것은 다른 까닭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더욱이 겨울인 음력 11월에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왕이 놀기 위해 포석정에 갔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어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화랑세기>에 있다. 포석정이 아니라 사당 사(祠)자를 써서 포석사 또는 줄여서 포사라 하고 있다.

  포석사에서는 길례를 행하였다고 한다. 문노와 윤궁이 결혼을 할 때 진평대왕과 세종이 친히 포석사에 갔던 적이 있다. 만호 태후는 친히 신궁에 가서 만룡의 공주례를 행하고, 포(석)사에 나아가 길례를 행하였다. 또 춘추와 문희도 포(석)사에서 길례를 하여 결혼을 알렸었다. 그러니까 신라의 지배 세력들은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던 것이다.

  그러면 포석사는 길례를 행하는 장소로만 쓰였을까? 무엇인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포석사에는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문노는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의 종주로 받들어진 인물이었다. 그의 화상이 포석사에 모셔진 까닭은, 포석사가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경애왕은 927년 11월, 이웃한 고울부(영천)지역에 견훤이 쳐들어온 상왕에서 포석사에 가서 연회를 한 것은, 말 그대로 잔치를 베풀어 놀았던 것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 달라고 빌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는 일찍부터 시조묘가 세워졌다. <삼국사기>에는 남해왕 3년(6)에 시조묘를 세웠다고 나온다. 과연 기원후 6년에 시조묘를 세웠을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혁거세가 죽은 후인 신라 초기에 신라 건국 세력을 모신 사당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크다. 당시 시조묘는 경주의 남산 서북쪽에 세워졌으리라 생각된다.

  혁거세가 사로 6촌에 나타난 장소가 현재 나정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의 무덤이 오릉에 있는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는 혁거세 세력이 자리잡았던 곳이 남산 서북쪽이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시조묘 또한 혁거세 세력이 정착하엿던 나정이나 금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포석사는 시조묘와 어떤 관련이 있는 장소였으리라 짐작된다.

  1999년 4~5월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포석정 동남쪽 70M지점 일대에 대한 발굴을 하였고, 그 과정에 포석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 몇 점과 기와무지를 확인했다. 이는 포석정이 단순히 유상곡주를 하는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와 같은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루어진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루어진 사당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안에 문노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인물들의 화상이 있었고 길례를 행하거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