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데이비드총(塚) 신라고분 이름이 맞습니까?

道雨 2008. 6. 25. 10:50

 

신라고분(新羅古墳)에 외국이름(外國名)이 붙어 있다

 

데이비드총(David塚)

  

 가운데 봉황로를 기준으로 윗쪽이 노서동고분군이며 아랫쪽이 노동동고분군이다

 

 

고분을 발굴하고 나면 '00호 고분'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발굴된 고분에서 왕의 묘지석이 나오거나 누구의 왕릉인지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면 00왕릉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고분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알 수 없는 경우나 애매할 때에는 대개 특징있는 출토 유물의 이름을 붙이거나 능의 특징을 이름으로 붙인다.

 

금관이 맨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금관총,

천마 그림이 나와서 천마총, 

침상이 두 개 쌍으로 나와서 쌍상총,

금으로 만든 신발이 나와서 식리총,  

가장 큰 능이므로 황남대총 등으로 이름을 붙인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있는 노동, 노서 고분군은 대능원에 비해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지만

발굴을 통하여 수많은 유물과 값진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도로를 내면서 고의적으로 이 고분군을 가로질러 고분군을 두 개로 분리시켰다.

신라의 맥을 끊으려는 숨은 의도였다.

 

시내에서 봉황로를 따라 천마총쪽으로 가다보면 양쪽에 수많은 고분들을 보게 된다,

길 왼쪽에 있는 고분군이 노동리고분군이고 오른쪽이 노서동 고분군이다

 

이 노서동고분군에 외국인의 이름이 붙여진 고분이 하나 있다.

'데이비드총(塚)' 이다

 

노서동고분군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언덕처럼 생긴 금관총이 있고 금관총 바로 뒤가 서봉총이다.

고분을 발굴한 뒤에 봉토를 하여 둥글게 원래대로  하지 않고 약 50cm정도로만 흙을 돋운 뒤 그냥 평토분으로 남겨둔 곳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보면 표주박형태로 되어 있어 쌍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표주박형태 고분의 뒷쪽(북쪽)분이 봉황 앉은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이고 같이 붙은 분(墳)의 남쪽분의 이름이 '데이비트총'이다

 

 

 130호고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데이비드총

(이 사진은 cafe.daum.net/kohyuntmothree에서 가져왔습니다)

 

 

1926년 9월 일제에 의하여 서봉총이 발굴된다.

서봉총에서는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을 비롯하여 '연수(延壽)'란 명문 적힌 은합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된다.

그리고 2년 뒤, 영국인 데이비드는 발굴 비용을 모두 자기가 부담하기로 하고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서봉총과 붙은 남쪽의 고분을 발굴한다.

금관등 화려한 유물이 나온 서봉총과 붙어 있는 고분이니 많은 기대를 했으리라....

표주형으로 붙은 고분은 대개가 부부의 묘이다

서봉총이 출토 유물로 봐서 부인의 묘(墓) 라는 의견이 일치된 가운데 남쪽분은 남성의 무덤일 것이 틀림없으니 출토유물에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고분을 발굴한 결과  무덤의 유물은 북분과 비교해서 형편 없을 정도로 적었으며 특이한 유물 한 점도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특기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이 고분의 이름은 발굴한 이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데이비드총'이라고 이름붙였다.

많은 돈을 투자하여 고분을 발굴했으나 얻은 것은 '데이비드총.이라는 이름뿐이었다

 

뒷쪽의 서봉총은 당시 스웨던의 황태자 구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하였다하여 스웨덴의 서(瑞)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대리석으로 된 안내판도 잘 세워져 있으나

이 '데이비드총'은 안내판 하나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표주형분 전체가 서봉총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참고)

상명대 박서희교수는 이 고분이 진평왕릉일 가능성이 크다고 조심스럽게 주장을 한다

 

서봉총(瑞鳳塚) 출토 '연수'(延壽)라는 연호가 적힌 은합(銀盒. 은그릇)은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역인 신장(新疆)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고창국(高昌國) 국왕이 신라왕에게 보낸 선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이 은합에 새겨진 '연수'라는 연호는 고창국 국왕 국문태(麴文泰)가 재위 5년째인 서기 624년(신라 진평왕 42년)에 새로 선포한 바로 그 연호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봉총은 진평왕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 연구자인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서봉총은 출토 유물로 보아 축조시기가 5세기말-6세기초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박 교수 논리를 따른다면 1세기 가량이나 차이가 나게 되는 모순에 봉착한다"고 말했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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