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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천하(김옥균)

道雨 2008. 9. 30. 14:35

 

 

 

3일 천하(김옥균)

개화파 김옥균의 암살자, 홍종우



흐흐흑!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선생님, 저는 선생을 암살한 홍종우입니다. 역사에 죄를 짓은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선생님의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이곳은 비록 참혹하게 찢겨진 선생의 시신에서 거둔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과 부인을 모신 곳이지만 뉘우치는 마음을 둘 데가 없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100년의 원혼을 거두시고 저의 눈물을 받아 주십시오.

선생님, 그 동안 마음은 아팠지만 그래도 세월이 가면 괜찮을 것이라 위안하며 살았어요. 하지만 근간에 발생한 사건을 보고는 두려움에 크게 놀라 황급히 찾아 왔습니다. 죄를 지어도 법정 시효가 있어 얼마 간만 피해 다니면 사면을 받아 떳떳이 살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죄인에겐 시효가 없다며 ‘정의봉’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세상이라 더 이상 숨어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1996년 10월, 민족 혼의 보루요 독립 운동의 대명사인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安斗熙)를 버스 운전사인 박기서(朴琦緖)가 ‘정의봉’으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경찰의 심문에 오히려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암살해 놓고도 이 땅에서 뻔뻔스럽게 살아왔다. 이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안씨가 진실을 밝히지 않아 분개를 느껴 범행하였다.’라고 말하며 추호도 잘못을 뉘우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저 역시 영혼에 불과하지만 이곳 저승도 저의 전과를 아는 귀신들이 많아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배를 오면서도 버스를 타려고 하였으나 운전수가 겁이 나 그냥 걸어서 왔습니다.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암살한 것은 1949년 6월 26일의 햇살이 눈부신 일요일이라 합니다. 당시 백범 선생은 경교장(京橋莊, 현 삼성강북병원)에 계셨는데, 육군 소위 안두희가 은밀히 잔입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는 겁니다. 그는 범행 후 종신형을 선고받아 역사의 심판을 받는 가 싶더니, 곧 소위로 복귀되고 나중에는 대령으로 예편하고, 특히 법의 보호를 철저하게 받으며 군수물자를 납품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안두희의 죽음으로 그 사건은 영원히 역사의 장막 속에 감추어졌고, 영원히 사라져 버린 증거 앞에서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암살 지령 자들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저 역시 부끄럽게도 이일직(李逸稙)에게 포섭되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 드립니다.

선생님, 공주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재주가 뛰어나고 또 예술적 재능도 탁월한 재원으로 일찍이 강릉에서 사실 때 율곡의 학문과 사상에 큰 영향을 받고, 특히 1870년을 전후해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모인 여러 선비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배우고 1872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이 앞다투어 상권을 잡고 나아가 국정까지 관여해 사직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던 시절입니다. 선생은 꺼저가는 국운을 구하고자 개화의 횃불을 치켜든 선각자로 일본의 실상을 알기 위해 신사유람단을 주선하고, 1881년에는 직접 일본을 건너 가 일본의 서구화와 발전상을 지켜보셨습니다.

그 동안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열강의 틈새에서 조선이 명실상부하게 자주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걸친 대개혁이 단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양반 신분 제도를 폐지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선진 과학 기술을 도입해 근대 공업을 발전시켜 부강한 나라를 세워야만 완전한 자주국이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선생의 주장은 마치 조선이 청국에게서 독립을 하자는 것처럼 보여 청의 탄압을 받았고, 일본에서 국채(國債)를 모금하려 한 일도 실패로 끝나자, 선생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군의 기습으로 개화당의 집권은 3일만에 끝나고 선생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일본은 선생을 섬으로 귀양 보내는 등 박해하였습니다.

어려운 망명 생활을 하던 선생은 일본에 머물던 저를 설득해 함께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李鴻章)을 만나러 상해로 갔으나 제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선생이 죽자, 청나라와 조정은 역적으로 몰아 시신을 서울로 가져와 능지처참하고, 이어 시신을 전국을 돌며 효시하는 등 잔인한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소 선생의 인품을 존경하던 일본인이 시신 일부와 유품을 거두어 동경 혼간사(本願寺)에서 장례를 치러 주고 그 후 이곳에 묘소를 마련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암살 후 중국 경찰에 붙잡혔으나, 청의 군함 위정호(威靖號)로 조선에 귀국해 그 해 교리의 벼슬에 올랐고, 독립협회에 대항하여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한 뒤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해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는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생무상이라고 저 역시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민족의 죄인으로 전락되어 숨을 거두었습니다.

선생님, 아산의 이곳은 낙엽이 뒹구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네요. 묘 뒤쪽에는 굴참나무가 들어차 노란 낙엽이 묘 주위에 쌓였고, 문인석과 동자상이 한 쌍씩 서고, 그 앞엔 장명등과 망주석을 놓여 있습니다. 부끄럽고 한편 부럽습니다. 비록 선생은 국운은 덧없이 기울어 가고 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온 몸을 불태웠으나 복잡한 국제 관계의 희생물이 되어 40여 세의 아까운 나이로 꿈을 접었으나 그래도 대제학에 추증되시고 참배하는 후손이 나날이 더해 가는데 저의 더러운 이름은 세상에 잊혀져 버렸고 외로운 혼을 찾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 아, 살아 생전의 영화가 어떻든 죽은 사람은 모두 가엾은 것이 인생은 아닌 지요. 하지만 평가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음을 이제서야 깨닫고 후회합니다. 선생님, 이 영혼을 불쌍히 생각해 용서해 주시고 삼가 극락왕생 하소서.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