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스크랩] 우당 이회영

道雨 2009. 3. 2. 11:21

 

자유 평등의 사회원리와 민족자결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한 민족의 내부 구조도

반드시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1925년 11월  중국 천진에서       우당  이회영

 

 

 

  

                      우당 이회영 (1867 ~ 1932)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연속극 '이산'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조선 조정의 권력을 잡은 '노론 벽파' 세력들이 왕조는 물론이고 국가를 쥐고 흔들면서 정조의 개혁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노론벽파는 우파 보수세력에 해당할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붕당 세력들의 자리 보전과 부의 축적이 중요할 뿐 백성들의 힘든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잡은 권력을 세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남인 등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고 있다.

 

정조 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정의 권력을 다시 잡은 노론 벽파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대로 집권세력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한 뒤 대부분의 노론 세력들은 일본에 협조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다. 그들은 나라가 일본에 합방된 것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일본에 협조한 대가로 전국의 토지를 받아 땅부자가 되었다. 그 땅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후손들이 지금도 그 땅들을 찾기 위해 대한민국과 법정 소송을 하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친일파에 대한 재산 몰수를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그들의 할아버지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땅들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노론 벽파들과 달리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노불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우당 이회영 집안이다. 우당 이회영 !  그는 조선 제일이란 뜻의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의 명문가 자손이었다. 그의 부친은 이조판서를 이낸 이유승이었고, 어머니 역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었다. 그의 집안에는 영의정이 흔했다. 선조 대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을 비롯해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 등이 그들이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회영은 이상설, 이동녕과 종로 네거리에 나와 머리를 땅에 대고 길게 통곡했다. 그는 이상재와 함께 학생과 군중을 종로거리에 모아 온 국민이 모두 일어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런 열변에 시민들은 뜨겁게 환호했지만 그것으로 왕조의 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회영은 나인영, 기산도 등에게 자금을 주어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을사오적이 철저하게 방비했으므로 암살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회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모든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다.

 

한일합방이 되는 해, 1910년 12월 대륙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대가족이 있었다. 만주 대륙으로 떠나는 이회영 일가였다. 이회영 뿐만 아니라 그의 형 건영, 석영, 철영과 두 여 동생 시영, 호영 가족까지 포함된 6형제 일가족 40여 명의 집단 망명이었다. 그때 이회영의 나이 44세에 달하는 장년이었다.

 

이회영 일가는 만주로 떠나기 전 모든 가산을 정리하였다.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등을 팔아 약 40만원의 거금을 마련하였다. 오늘 날 돈으로 환산해 따져보면 수 백억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만주로 간 이회영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배출된 학생들이 독립군의 중추 간부가 되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전투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여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서간도 지역의 무장독립군인 서로군정서, 만주지역의 대한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무장독립단체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빠지지 않았다. 또 의열단과 광복군처럼 국내와 중국 본토에서 벌어지는 무장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있었다.

 

1920년 8월 일제와 만주 군벌의 압력으로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되었다. 이후 이회영은 북경으로 가서 한 가옥을 빌려 살았는데,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되었다. 북경에 온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이회영 거처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북경의 이회영 거처는 모든 독립운동가가 한 번씩은 거쳐가는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북영에서 이회영과 자주 만났던 인물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으로 이회영의 가산은 모두 바닥이 나고 그때부터 궁핍한 생활이 시작되었다.강냉이 죽을 쑤어 연명하기도 하였고, 나중에는 시장에서 상인이 버린 배추와 시레기를 주어와 잘게 썰어서 옥수수 가루 한 줌을 풀어서 먹기도 하였다. 1927년 이회영의 나이 환갑을 넘긴 때, 끼니도 못 잇고 굶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이불을 저당잡히고 딸의 교복을 팔아 배고픔을 며칠 면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 이회영은 만주군벌 장학량으로부터 무기지원을 받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젊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내 늙은 사람으로서 텁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내가 먼저 가서 준비 공작을 해 놓을테니 그대들은 내가 연락을 하거든 2진, 3진으로 뒤따라오라"고 말하고 떠났다. 이회영은 상해에서 아들 규창과 함께 대련으로가는 영국 선적 기선에 올라 배의 제일 밑바닥인 4등실에 자리를 잡았는데 밀정의 고발로 일본 경찰에 잡혔다.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중 11월 17일 오전 5시 20분 감방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의 유해는 개풍군 선영에 안장되었는데, 하기락은 이회영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민족주의 태내(胎內)에서의 무정부주의의 성장, 그 사상적 성숙, 그 투쟁 단계, 그리고 전시(戰時)의 전투체제로 전환 등의 과정을 우리는 우당이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우당의 최후는 이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서의 장렬한 산화였다."

 

우당 이회영은 1923년부터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뜻을 같이 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정부주의자' 라고 불리우는데, 일제시대에 가장 순수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도 조선 5백년간 서북사람이 핍박을 받았으니 조선이 독립을 하면 서북사람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으며, 공산주의자들도 독립운동에는 뜻을 같이 하였지만 나라기 독립된 후 기대하는 바는 각기 달랐다.

 

그러나 이회영은 아나키스트로서 아무 것에도 욕심이 없었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그리고 독립된 나라의 백성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미 80여 년 전에 이회영은 독립된 나라는 자유 평등의 사회 원리와 민족 자결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과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지방자치제도를 주장하고 있다.

 

얼마나 앞을 내다 본 민족의 지도자 이었던가. 그리고 재산의 사회성에 입각하여 경제적으로 자유 평등한 원리가 적용되고 특히 교육은 전액 사회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주장하고 있다. 지금 이 나라가 이회영 선생의 뜻대로 독립이 되어 운영되었더라면 얼마나 품격있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을까?

 

이러한 이회영 선생의 주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내가 바라는 우리나라'에서 주장한 문화를 숭상하는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1920년 ~ 30년 대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망명을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암울하던 시기에, 이들 독립운동가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이 민족 선열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그토록 바라던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출처 : 自淨其意
글쓴이 : 금강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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