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 총경 전쟁의 포화 속에 화엄사를 지켜내다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유명한 차일혁(車一赫,1920~58) 총경은 지난 2008년 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항일독립운동을 펼쳤으며, 한국전쟁 때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에 큰 공을 세운 경찰관이 무공훈장이 아닌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의외일 것이다.
훌륭한 경찰관이자 문화재를 지키는데 앞장섰던 그의 공로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화엄사를 지킨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전쟁은 인명뿐 아니라 그 지역의 유적을 모조리 불태우고 만다.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은 많은 사찰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도 전쟁은 피해갈 수 없었고, 아니 오히려 깊은 산중이었기에 그 피해가 더 컸다.
때로는 적군에 의해, 때로는 아군에 의해 오랜 세월 전해져 온 소중한 불교 문화유산들이 훼손되거나 소실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보다 문화재를 더 소중히 여기며 천년 고찰을 지켜 낸 사람이 있으니, 바로 차일혁 총경이다.
지리산 남쪽 기슭, 그윽한 노송 숲에 둘러싸인 화엄사. 지리산 산세에 견주어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의 천년 고찰이다.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인 544년 인도의 승려 연기가 처음 지었으며, 그 후 신라 문무왕 때인 670년 의상대사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에 소실되고 이후 숙종 때인 1702년 중건되었다.
화엄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총본산이자 화엄사상의 상징적인 사찰로 문화재적, 불교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화엄사 일원은 문화재로 지정돼(명승 및 사적 제7호) 있는데, 특히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은 우리나라 불교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각황전에서 떨어진 돌조각인 구례화엄사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은 부서진 것일망정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그 문화재적·사료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화엄사의 대문격인 일주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지나면 고려 때 국사國師를 지낸 의천스님이 화엄사 효대孝臺를 예찬한 노래를 적은 시비詩碑가 있다. 효대는 화엄사를 창건한 승려 연기가 어머니에게 정성스레 차를 올리는 모습이 화엄사 조각된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과 공양 석등이 있는 장소를 말한다.
그리고 화엄사 부도전 맞은편의 ‘시의 동산’에 눈에 띄는 또 하나의 비석이 있으니, 시인 고은이 글을 쓴 ‘차일혁 총경 공적비’이다.
[u]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돌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u]
사찰 안에 고승도 아닌 경찰관의 공적비가 이곳에 세워지게 된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명령을 불사하더라도 천년 사찰은 지킨다
[u]“화엄사를 소각하라”[/u]
한국 전쟁 중 남한 빨치산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해 지리산에 도착한 전투 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빨치산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는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러나 차 총경은 이 명령을 차마 따를 수가 없었다.
[u]“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문화를 잃으면 우리 마음을 잃고 우리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는다.” [/u]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화엄사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또 개인적으로 화엄사 각황전은 차일혁 어머니의 기도처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심을 키워왔던 그에게 화엄사 소각 명령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내장사가 불탈 때 눈물을 흘리며 며칠 동안 밤잠을 못 이뤘던 차 총경은 1백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화엄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 놓게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부하들에게 쌓아 놓은 문짝에 불을 지르라며 이렇게 말했다.
[u]“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그러나 문짝을 태운 것이니 명령은 이행한 것이다.”[/u]
화엄사를 지키기 위해 작전명령을 불이행했던 차일혁은 감봉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각황전을 비롯해 화엄사 전각들은 소각을 피할 수 있었다.
전라도는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였고 산악에 자리 잡은 많은 사찰과 그 속의 문화재가 빨치산과의 전투 중에 소실될 가능성이 높았다. 화엄사 외에도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사찰은 토벌 작전에 방해가 되기 일쑤였지만, 차일혁은 부하와 동료들을 설득해 가며 사찰들을 지켜냈다.
화엄사뿐 아니라 지리산의 천은사, 쌍계사와 모악산의 금산사, 장성 백암산의 백양사, 고창의 선운사 그리고 덕유산의 크고 작은 사찰 등 전라도의 많은 고찰들을 전쟁의 피해로부터 구해 냈다.
나라의 부름 앞에 나선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차일혁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항일 유격전에 참가했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이 파죽지세로 남하해 오자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당시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차일혁 총경은 매우 괴로워했다.
[u]“저들이 과연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얼마나 이해하고 있겠는가.”[/u]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는 현실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과 아픔 속에서도 차일혁은 맡은 바 임무를 수행, 지리산에서 6년 동안 벌어진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불과 70명의 결사대원으로 2천여 명의 적을 격파하였고, 적장인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사살하였다. 이현상은 ‘빨치산 하면 이현상이요, 이현상 하면 곧 빨치산’이 연상될 만큼 빨치산의 대명사로 남한 내 빨치산 최고 지도자였다.
차일혁은 이현상을 사살한 뒤 적장에 대한 예를 최대한 갖추었다. 그의 시체를 스님들의 독경 속에 정중히 화장해 하동 송림(천연기념물 제455호)에 뿌리며 장례를 치렀다.
동족 간에 총부리를 맞대야 하는 비극적인 혈투 속에서도 민족애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전투’는 한국전쟁 후 유일하게 태극무공훈장을 3개나 받은 전투였지만, 정작 차일혁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빨치산 대장을 정중히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상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지리산에서 총성이 잦아들 무렵 전투경찰에서 물러난 차일혁은 1954년 충주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충주경찰서에 근무하던 당시 차일혁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 후학의 길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문화재를 잃는 것은 곧 우리나라를 잃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은 그의 공적을 인정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 스님은 1958년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고, 1998년 6월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비를 건립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문화와 역사를 저버리지 않은 높은 뜻과 공적을 기리도록 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화엄사를 소실 위기에서 구하는 등 문화유산 보호에 노력한 공로로 문화재청에서 감사장을 전달했고, 지난 2008년 10월 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문화재를 잃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잃고 나라를 잃는 것임을 일찍이 알고, 문화재 보호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토벌대장 차일혁, 그의 노력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나라를 지켜낸 경찰관이자 우리의 문화재를 지킨 인물로 기억될 그의 이야기는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 ‘누가 해야 할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글ㅣ이은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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