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오해 (최만리)

道雨 2009. 2. 10. 17:24

 

 

 

오해, 오해라고요


한글 창제를 반대?, 최만리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고요?

세상은 저를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崔萬理, ?~1445)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이것은 순전히 한글이 어렵게 창제되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를 제물로 삼은 것 뿐입니다. 억울, 억울합니다.

사실 입으론 우리말을 하면서 그것을 한문으로 표기하자니 고통이 많고 배우기도 어려워, 한문은 소수 상류계층의 독점물이었지요. 그래서 우리 말의 소리나는 대로 그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절실히 필요했지요.

그런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긴 세종 임금은 우리 말이 소리를 낼 때의 발음 기관들의 모양을 면밀히 관찰한 다음 그들을 본 떠 글자를 만드신 겁이다.

인류 문자의 역사로 볼 때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든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로 파격적인 발상입니다. 그만큼 한글은 우수하면서 독특한 음소체계로 만들어진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저는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崔沖)의 12대 손으로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벼슬아치였고, 부제학 시절에는 14번이나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는 불교 배척이 6회, 첨사원 설치 반대가 3회 그리고 한글의 반대 상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글에 대하여 반대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저는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는데, 훈민정음을 완성한 임금이 비밀리에 의사청에서 최항(崔恒) 등 집현전 소장학자만 참가시킨 뒤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라 는 원나라 웅충(熊忠)이 엮은 책에 한자의 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자음 개혁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는 우리 나라 한자음이 체계없이 사용되어 어느 정도 중국 체계에 맞는 새 운서를 편찬할 의도로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 한 것이지요.

그러자 집현전의 중진 학자와 저는 한자음 개혁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 상소는 여러 군데 한글 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이 있어 사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세종이 친히 국문한 내용을 보면, 한글 창제를 반대한 점이 아니라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격이 강직하고 곧아 타협을 몰랐던 저는 한 번은 환관이 사모(紗帽)를 쓰자, 상소를 올려 갓을 쓰도록 건의했습니다.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갓을 바꾸지 못한 것은 환관의 무리를 일반 관리와 구별하기 위해서 였읍니다.”

여러 환관이 눈을 흘겨 의논이 정지된 일도 있습니다.

1444년 한글과 관련해 세종의 신문을 받은 다음 날, 저는 다시 복직되었으나, 집현전 부제학을 끝으로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마쳤습니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저의 무덤에는 ‘집현전부제학 최공만리지묘(集賢殿副提學 崔公萬理之墓).‘라 쓰여 있습니다.

안성에 속한 면(面) 이름 중에는 일죽면․이죽면․삼죽면이 있는데, 본래 이름은 죽일․죽이․죽삼이었습니다. 아마도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땅 이름을 부르다 보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죽일면의 면장이었다.

사람마다 죽일면의 면장을 ‘죽일 면장’으로 부르니 듣기에 따라서는 욕이 되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죽일 면장은 이름을 고쳐 달라고 상소를 했고, 이에 1915년 세 면의 이름을 거꾸로 일죽․이죽․삼죽으로 고쳤다하고 합니다.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