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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효녀와 페로

道雨 2009. 7. 10. 15:46

 

 

 

       영국 효녀와 페로

신화와 전설의 묘한 반복, 칙칙해 보이는 옛 그림을 봐두는 것이 쓸모있는 이유
   
» 루벤스가 여러 번 즐겨 그렸던 〈시몬과 페로〉. 딸이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살리려고 젖을 먹였다는 전설을 그렸다.
시대적으로 중요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뉴스는 정작 건성으로 지나치기 일쑤인데, 조금이라도 요상한 뉴스에는 신기하게도 눈길이 척척 가서 꽂힌다. 최근 그렇게 눈에 들어온 뉴스는 영국판 심청이 기사였다.

 

스물일곱 살 조지아 브라운이란 이 영국 효녀는 그 효도법이 독특했다. 암에 걸린 아버지 팀 브라운에게 모유를 짜서 먹였다는 거다.

조지아가 아기를 낳은 직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암에 걸린 어떤 남자가 매일 모유를 먹고 병이 나았다는 뉴스를 봤다고 한다.

조지아는 곧바로 암 투병 중인 아버지가 떠올랐고, 가족들과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모유를 짜서 아버지에게 보냈다. 아버지 팀은 한 달 동안 아침마다 딸이 보내준 모유를 우유에 타서 먹었는데, 정말로 병세가 호전됐다고 한다.

 

참 아름다우면서도 희한한 뉴스였다. 기사를 읽으며 서양 화가 루벤스의 그림 <시몬과 페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벤스가 여러 번 즐겨 그렸던 <시몬과 페로>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림이다. 또한 처음 보면 춘화로 오해를 하게 되는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망측하게도 한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성의 가슴을 빨고 있는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남자가 바로 시몬이고 가슴을 드러낸 여자가 페로인데, 이 두 사람은 뜻밖에도 부녀지간이다.

아버지 시몬이 감옥에 갇혀 굶겨 죽는 벌을 받게 되자 면회를 간 딸 페로가 아버지를 살리려고 몰래 모유를 먹인 것이다. 알고 보니 효성 지극한 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책 <기념할 만한 행위와 격언들>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서양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다. 루벤스 말고도 16~18세기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저 옛날 막시무스가 전해주는 <시몬과 페로> 이야기가 실화인지 전설인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는 전설과 신화란 것이 실화보다는 허구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설정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와 전설은 그렇게 잘 일어나지 않을 법한 희한한 상황이 주기적으로 사람 사는 세상에선 벌어지기 마련이란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살이 붙어 허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고갱이인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 해결 행위는 늘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그 빈도가 수천 년에 한 번 나오느냐, 일상에서 늘 벌어지느냐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행위는 언젠가 어디선가 되풀이되는 법이다.

시몬과 페로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리바이벌한 조지아 브라운과 팀 브라운 부녀의 이야기는 신화가 증언하는 특수한 인간 행위의 싱크로 현상을 잘 보여준다. 시몬에게 떨어진 굶겨 죽이는 형벌이 조지아의 아버지 팀 브라운에겐 죽음을 부르는 암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중들에게 신화를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도시의 건널목에서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영국 효녀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캠벨의 말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화제로 삼는 해외 토픽이 이미 옛날 전설 속에, 그림 속에 들어 있다는 것도. 이런 묘한 반복을 보며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칙칙해 보이는 서양 옛날 그림들을 가끔 봐두는 것은 그래서 제법 쓸모가 있다.

 

구본준 한겨레 기획취재팀장 blog.hani.co.kr/bonb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