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 합헌 결정을 바라보며
<공지영, 소설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도둑질한 자, 술 마신 성직자 등을 사형에 처하고 있다.
남의 뼈를 부러뜨린 자의 뼈를 부러뜨릴 수 있고, 수술하다 실수한 외과의사의 손을 자른다고 명시되어 있다.
야만적으로 보이는 법률이 그러나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즉 남의 뼈를 부러뜨린 자를 죽여 버리지 말고 감정대로 보복하지 말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왜?
착하게 살아야 천당을 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당대의 생존과 번영에 전혀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죽이지는 말고 뼈만 부러뜨리고 손만 잘라라”라고 말해야 했던 그 당시 지식인들과 위정자들의 고민도 깊었을 것이다. 벌써 3700년 전의 일이다.
19세기 영국에는 귀족의 장원에 몰래 침입해 토끼를 잡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런던에서 소매치기가 들끓자 정부는 소매치기를 공개처형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들이 공개처형되는 날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는 사상 유례없는 인파가 운집했고 이때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소매치기가 들끓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극형이 범죄 방지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들의 경우 흉악범죄 증가율이 사형제 폐지 전과 후가 같았다. 흉악범죄는 도시화, 산업화의 영향을 받을 뿐 극형의 존재 여부와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단두대에 관한 성찰>이라는 책에서 사형제의 비인간적인 면을 질타한 바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사형제를 전격 폐지한 1981년 프랑스의 여론은 6 대 4로 사형제를 찬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 후 다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다시 4 대 6으로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았다.
여론이 우세해서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사람들은 사형제를 폐지해야 하는지 존치해야 하는지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딸아이가 늦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12년째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토록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그 흉악범들을 나는 6년째 만나고 있다. 솔직히 그들이 처형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이명박 정부는 출범했을 것이고 강호순은 또다른 살인을 했을 것이다.
다만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달라진 점이 있다면 57명의 사형수들 중 한두 명을 제외한 사람들이 그 감옥 안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것뿐일 것이다.
세계 197개 국가 중 3분의 2가 넘는 139개 국가가 국민의 생명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하여 사형제를 폐지했다.
1995년 사형제 위헌 판결을 내린 남아공 법원의 판단은 이렇다.
“생명권과 존엄성에 대한 모든 권리는 모든 인권 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도 적용된다.”
1990년 헝가리 법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사형)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본질적 의미에서 회복 불가능하게 박탈한다.”
이제 2010년 세계 교역량 11위, 동계올림픽 6위를 달리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이렇다.
“이(사형)는 형벌의 한 종류로 생명권 제한에 있어 헌법상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볼 수 없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 139개국 국민들이 보장받고 있는 생명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는 필요에 따라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존속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므로 헌재의 이번 판결의 본질은 바로 국가가 인간의 생명보다 우위에 있다는 오만함과 후진성의 발로이다.
시대착오적인 사형제 못 없앤 헌재의 눈치보기
<한겨레, 2010. 2. 26 사설>
헌법재판소가 1996년에 이어 어제 또다시 사형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사형제도 언젠가는 폐지해야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논리를 폈다. 그 14년 동안 38개 나라가 사형폐지 대열에 합류하는 등 모두 139개 나라가 법률적·실질적으로 사형을 폐지했다. 유럽연합은 이를 가입요건으로 하고 있다.
이제 사형제 폐지는 문명국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지표다. 한국이 뒤처질 이유도 없다. 한국은 1997년 이후 사형집행을 하지 않아 이미 실질적 사형폐지국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과 의식의 고양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도 크다. 시대상황이 그렇게 바뀌었는데도 헌재는 과거에 머물렀다. 무슨 눈치를 보느라 그랬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헌재가 합헌 결정의 이유로 내놓은 논리부터 시대착오적이다.
헌재의 다수의견은 사형제가 ‘극악한 범죄에 대한 정당한 응보’이며, 이를 통해 그런 범죄의 재범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복 심리에 터잡은 형벌은 근대 이전의 낡은 주장이다. 무서운 형벌로 범죄 예방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이미 입증됐다.
권력이 ‘정당한 응보’를 내세워 멋대로 힘을 휘두를 위험도 있다. 실제로 현행법에서 사형 대상 범죄는 20여개 법률에 걸쳐 110여개 조항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 고의 살인 등 ‘극악한 범죄’는 고작 12개 조항이다. 나머지는 정치범·사상범, 경제사범, 행정사범, 심지어는 미수범 따위이니, 사형제의 오·남용 가능성은 아직도 엄연하다.
헌재가 사형제를 두둔하면서 헌법상의 생명권, 곧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헌법 제10조)도 제한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 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헌법에 절대적 기본권을 인정하는 구절이 없다는 게 그런 주장의 근거다.
하지만 생명권에 대한 제한은 곧 생명의 전부 박탈이다. 그리되면 다른 권리가 가능할 수도 없고, 잘못 판단했더라도 되돌릴 수 없으며, 죄를 뉘우치게 할 수도 없다. 생명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사형제가 위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합헌을 주장한 헌재 재판관들도 입법을 통한 사형제도의 개선을 권고했다. 지금의 사형제도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데는 공감한 셈이다.
국회는 이를 받아들여 사형제 폐지를 위한 법률 정비에 나서야 한다. 정부도 과거 회귀의 잘못을 범할 게 아니라 사형집행을 유예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
헌재여, 자백하시라
“한 나라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여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되는 등 시대 상황이 바뀌어 생명을 빼앗는 사형이 가진 위하(위협)에 의한 범죄 예방의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된다거나 국민의 법감정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형은 곧바로 폐지되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벌로서 사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당연히 헌법에도 위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14년 전 헌재 결정문의 일부다.
합헌을 선고하면서도, 문화 발전과 사회 안정화에 대한 법철학적 통찰을 담아 사형 폐지에 대한 시대론적 접근을 공식화한 문장이다. 사형 폐지가 헌법에 절대적으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며, 우리 사회가 더 문명화한다면 얼마든 가능한 일이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헌재 결정에서는 이런 접근법이 사라졌다는 게 이 변호사의 허탈한 평석이었다. 지난 14년간 세상은 전진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1996년 이후 각 사회의 문명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자.
1996년 벨기에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1997년 그루지야, 네팔, 폴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볼리비아는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일반적 범죄라 함은 전시나 계엄 등 비상 상황에서 저질러진 범죄를 제외한 평시의 범죄를 말한다.
헌재는 이번 결정에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는 우리 헌법 110조를 근거로 ‘헌법이 사형을 전제하고 있다’는 논리를 폈는데, 외국의 경우엔 일반 재판과 군사재판을 구분해 후자에서만 사형을 인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도 이런 취지로 해석할 여지가 분명히 있어 보인다.)
1998년 아제르바이잔, 불가리아, 캐나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영국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1999년 동티모르,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라트비아가 전시를 제외한 평화시의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0년 코트디부아르와 몰타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알바니아는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이후 2007년 모든 범죄로 확대했다.)
2001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칠레는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2년 키프로스와 유고슬라비아(현재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3년 아르메니아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4년 부탄, 그리스, 사모아, 세네갈, 터키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5년 라이베리아와 멕시코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6년 필리핀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7년 알바니아, 쿡 아일랜드, 키르기스스탄, 르완다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카자흐스탄은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8년 우즈베키스탄과 아르헨티나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9년 부룬디와 토고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일부 늦둥이 유럽 국가를 빼고는 대부분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이다. 이 모든 나라들의 그간 역사를 개괄하기도 이 지면으로는 벅차다.
분명한 건 상당수가 평탄치 않은 내전과 독립과 혁명의 현대사를 통과한 나라들이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헌재의 1996년 결정에 따르면, 21세기로의 전환기를 맞아 그런 나라들에서도 모종의 문명화가 진행된 게 틀림없다.
그럼, 우리나라에선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헌재 관계자는 이번 결정에 대해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도 입법 개선을 촉구하는 별개 의견들이 많다. 사실상 사형제 폐지를 공론화했다고 보면 된다”고 자평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대가 바뀌면 사형제를 폐지하게 되리라던 헌재 재판관들이 사형제 폐지는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니니 공론화에 맡기자는 태도로 변화한, 딱 그만큼의 시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일까.
1996년 헌재 결정 이후 <한겨레21>은 매주 한 차례씩 666번 잡지를 낸 끝에 800호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사이 무수한 사형제 관련 기사를 썼고, 지난해 봄에도 표지이야기로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800호를 자축하기에 앞서 자괴감이 드는 이유다.
첨예한 사회적 쟁점에 대해 공론화를 시도하고 그 좌절에 자괴감을 느끼는 건 나 같은 신문쟁이·잡지쟁이의 몫이다. 이와 달리 헌재는 종국적 결정을 내리는 최고 국가기관이다. 이제 와서 공론화나 운운하려면 차라리 법복을 벗는 게 낫다.
그냥 솔직히 고백하시라.
헌재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앞에 나열된 저 모든 나라들보다 덜떨어진 국가라고 본다고. 적어도 당신들의 머릿속에 표상된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에 불과하다고.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살인자를 살인해 무엇을 얻나 |
- 또다시 사형제 합헌을 선언한 헌법재판소, - 미국에선 살인 피해자 유족까지 나서 반대하는데… |
미국에는 ‘인권을 옹호하는 살인 피해자 유족들’(Murder Victims for Human Rights)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살인 피해자 유족들로 이루어졌고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심지어 사형은 살인 가해자 유족들의 삶도 망가뜨린다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에게 담론 참여를 북돋는 운동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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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죽음, 가해자 죽인다고 치유 안 돼”
총기 소유가 자유로워 그만큼 이유 없는 억울한 살인이 횡행하는 미국에서 이들은 왜 이런 활동을 하고 있을까.
지난주 우리 헌법재판소도 합헌을 선고하며 “사형은 정당한 응보를 통하여 정의를 실현한다”면서 “자유형의 선고만으로는 형벌이 해당 범죄 및 범죄자의 책임에 미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피해자들의 가족 및 일반 국민의 정의 관념에도 부합하지 못하게 된다”고 판시하지 않았는가.
2001년,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던 19살의 외동딸이 살해당한 미국 윌콕스 부부(아마도 피해자의 사진을 본다면 여러분의 안타까움은 더욱 강렬할 것이다)의 말이다.
“많은 이들이 사형제도를 피해자 유족의 이름으로 찬성한다. (중략) 심정적인 정리를 말하지만 그 정리가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치유는 우리 내부에서 올 것이지 살인자의 운명에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지 잘 모르겠다면 영화 <밀양>을 상기해보라. 이 영화는 살인 피해자 유족의 치유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신앙으로 치유하고 살인자를 용서함으로써 그 치유를 완성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차려고 하다가 먼저 차일 때’ 느끼는 약오름에 휘둘려 결국 실패하게 되지만, 그 치유는 내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지 살인자와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17살 때인 2006년 부모가 살해당한 미국의 에릭 로저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오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살인자에게 어울릴지는 몰라도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재판소장을 지내다 2000년 사망한 이스마일 마호메드는 다음 말을 남겼다.
“방화에 대한 처벌로 방화범의 집을 불태울 수 없고, 성폭행에 대한 처벌로 성폭행범을 성폭행할 수 없다면, 왜 살인에 대한 처벌로 살인자를 처단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남아공에는 성폭행과 살인이 많이 일어나지만 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윌콕스 부부의 마지막 말이다.
“사형이 범죄를 예방하고 생명을 구한다면 정당화될 것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많은 찬반론들은 범죄억지력(또는 ‘일반적 예방효과’ 또는 ‘위하력’)에 대해 큰 견해차를 보여왔다. 이번 헌재 결정에서도 “인간의 생존 본능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까지 고려하면, 무기징역형 등 자유형보다 더 큰 위하력을 발휘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범죄억지력을 가지고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사형제도의 위하력에 대해서는 ‘없다’는 내용의 연구보고서도 많아 사실 외국의 사형 찬성론자들도 대부분 일반적 예방 효과를 논거로서는 포기하고 있다.
헌재가 내세운 예방 효과는 근거 불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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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측면에서 사형제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찬성론을 남긴 사람은 아마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아닌가 싶다.
“누구도 자신의 살인 행위가 아무리 끔찍하고 극악하더라도 자신들은 죽음을 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서는 아니된다.”
위하력이 실제로 있든 없든 ‘죽을 정도로 나쁜 일을 하면 죽을 수 있다’는 개인 책임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칙의 문제라면 반대편도 할 말이 있다. 영화평론 프로그램 <시스켈 앤드 이버트>의 진행자인 로저 이버트의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타인을 사형에 처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지를 보면 어떻게 수많은 유럽인들이 유대인 대학살의 역사를 짊어지고도 편안히 살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있다고 믿게 되면 벌써 ‘홀로코스트’에 반 정도는 다가간 것 아닌가?”
물론 유럽인들이 편안히 살고 있지는 않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사형제를 폐지했다.
살인자의 손에 부모를 잃은 로저스는 이런 말도 남겼다.
“사람들에게 살인의 부당성을 살인을 함으로써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빅토르 위고는 “사형제도는 야만의 특수하고 영원한 상징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곳은 야만이 지배한다. 사형이 없는 곳에서 문명이 지배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사형이 원활히 집행되는 곳은 미국과 중국뿐이며 그 외에 제도가 존치되는 곳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들뿐이다.
미국의 ‘야만’을 살펴보자.
미국 사회에서 가끔 발생하는 총기 난사의 주원인은 총기 규제의 부재이지, 교수 승진 시스템(2009년 2월12일 앨라배마주립대 비숍 교수 총기 난사 사건)도 가정교육(1999년 4월20일 컬럼바인고교 총기 난사 사건)도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사회 모든 분야에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고 그러한 분노를 생산해내는 심리적 억압의 구조 역시 그러하다.
문제는 분노의 표출이 살인이라는 형태로 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총기 규제의 부재인 것이다.
이런 현실을 고착화하려는 극우 보수층의 의식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 수 있다’를 넘어서서 ‘위험 세력을 처단할 수 있다’는 원리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 원리는 다시 사형제의 존재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결국 사형의 범죄억지력을 생각할 때는 폭력을 조장하는 효과도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형제의 존재가 일상생활에서 폭력을 부추긴다면 전쟁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형 반대론자들은 반전평화주의자인 것 같다. 물론 이들에게도 외세의 침략이나 타인의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가 폭력을 동반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위적인 생명의 종식이 정당한 경우도 분명 있다. 생명의 소중함을 유일한 반대 논거로 내세우는 보수적인 사형 반대론자들은 사형·낙태·안락사 모두를 반대할 수밖에 없지만, <생명의 지배 영역>을 쓴 로널드 드워킨의 견해를 빌리면 생명의 주체성- 삶이라는 소설을 쓰는 창조자로서의 주체성- 에 근거한 사형 반대론자들은 낙태와 안락사는 찬성할 수 있다.
사형 찬성하며 체제의 폭력 용인은 ‘위선’
사형에는 일반적 예방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영원히 격리해 추가 범죄를 예방한다는 이른바 ‘특수 예방효과’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가석방의 가능성이 없는 무기징역’으로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이번 헌재의 변론 과정에서 변호인단은 이런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위헌이라는 고육지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사형제도가 응보와 범죄억지력에 의해 충분히 정당화된다고 보는 헌재에 대체 격리 수단의 존재에 근거한 사형 무용론은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헌재는 오판의 문제에 대해서도 “오판은 사법제도의 숙명적 한계”라며 사형 자체를 폐지할 이유는 없다고 하는데, 사형의 불가역적 특성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이번 결정의 최대 취약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놀랍게도 사형 찬성론자이지만 <폭력에 대하여>(On Violence)에서 제도의 본질을 꿰뚫으며, 용산 참사 1주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사형 반대론자들에게 중요한 논거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살인과 같은) 개별적 폭력에 대한 증오’를 사형제 찬성으로 표출하면서, 정작 그런 주관적 폭력을 조장하는 ‘체제의 폭력성’을 용인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유럽의회 "한국 '사형 합헌' 매우 실망"
유럽의회는 1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3월 정례 본회의 마지막 날 회의를 열어 한국의 사형제도 합헌 결정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유럽의회는 결의에서 "지난 1996년에 7(합헌) 대 2(위헌)로 합헌 결정이 이뤄졌을 때보다는 차이가 줄었음에도 한국 헌법재판소가 사형제도를 재차 인정한 데 대해 매우(deeply) 실망스럽다"라고 비판했다.
유럽의회는 "우리는 현대 형법체계에 부합하지 않으며 범죄율을 줄이지도 못하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거듭 밝힌다"라며 "한국(정부)은 국회가 사형제 폐지 법률을 승인할 때까지 모든 사형 집행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결의는 또 "한국 정부는 사형제 폐지에 관한 유엔 결의를 지지하는 한편, 유엔 총회에 상정될 (사형제 폐지 관련) 결의를 공동 발의하거나 이러한 결의에 찬성표를 던질 것을 요구한다"라고 명시했다.
유럽의회는 그러면서도 한국에서 1998년 이래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아 실질적으로 한국은 사형제 폐지국이라고 인정,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인권 보호 및 신장을 높이 평가했다.
econ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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