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미국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

道雨 2010. 5. 15. 12:54

 

 

 

            미국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

 

한국과 일본 지식인 200여명이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이 불의·부당했다며 원천 무효라고 선언한 지난 10일, 신설된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에 내정된 사람이 “2012년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연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에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한 유력신문의 대기자라는 사람은 다음날 칼럼에서 “우리로서는 주한 미군이 방파제 노릇을 하고 있다. 이들이 떠난다면 한반도의 세력균형은 바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했다.

역시 같은 날 그 신문은 “한국과 미국이 주한미군을 더이상 감축하지 않고 현 수준인 2만8500명을 유지하는 것을 문서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미국에 매달리자는 얘기가 이처럼 한날 한 신문에 합창이라도 하듯 터져나오다니, 대단하다.

 

‘반쪽이라도 지켜야’라는 제목의, 그날 그 신문 대기자 칼럼의 요지는 결국, 중국이 미는 북한과의 통일은 포기하고라도 미국에 기대서 남쪽만이라도 잘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면서 그는 “나라에 위기가 발생하면 불평·분열집단들은 외국 세력을 등에 업으려 한다. 다시 구한말이 될 수 있다”며 경계하는 기묘한 논리를 폈다.

미국은 외국 세력이 아닌가? 내국인가?

 

일제가 러-일전쟁이 나던 1904년에 조선을 삼키는 구실로 조선 내에 일본을 구세주로 여기는 자발적 친일 민의가 있다는 위장극을 펼치기 위해 꾸며낸 것이 송병준·이용구의 일진회였다.

1905년 11월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송병준·이용구에게 일제는 내국이었을 게다.

바로 그달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그 다음달 조선통감부가 설치돼 조선은 사실상 일제 식민지가 됐다. 그에 앞서 그해 7월29일 미국이 필리핀 지배를 대가로 일제의 조선 식민화를 승인해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됐다.

 

일제 식민지배가 끝난 지 60년이 더 지난 지금 조선 병탄의 원천 무효 선언이 나온 것은, 무효가 아니라고 우기는 자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일본 돈이 절실했던 한국 군사정권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를 한·일 양쪽이 각자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애매하게 절충하고 넘어갔다.

결과 한국은 일제의 조선 병탄 자체가 불법이며 원천무효라고 주장하고, 일본은 그 자체는 합법조처였으나 1965년 정상화 협정 체결 이후 무효로 간주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 합법론의 주요 근거가 조선의 민의로 둔갑한 일진회 등 조선 내 친일매판세력의 ‘합방’ 공작이었고, 제국주의 침략자들끼리의 상호 묵인이었다.

 

이번 공동성명에서 ‘불법’이어서가 아니라 ‘불의·부당한 것’이어서 무효라는 표현을 쓴 이유도,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양국간 과거사 인식 격차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한·일 지식인들의 공동성명은 기쁜 일이면서도, 아직도 비정상적인 분단국의 나라 꼴을 그대로 반영하는 참 슬픈 일이기도 하다.

 

광복 60년이 넘도록 미국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나라.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