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국익, 4400명

道雨 2010. 8. 12. 11:29

 

 

 

 

                  국익, 4400명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가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단 몇달이면 끝날 것 같던 전투는 무려 7년5개월을 끌었다.
그 지루했던 전쟁이 이제 끝난다. 이달 말이면 이라크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한다.
그러나 상처는 깊다. 미군 사망자 수는 4400명을 넘어섰다. 지금까지 미국이 쏟아부은 전비만 9000억달러(한화 약 1000조원), 앞으로 국가재건 지원에 얼마가 더 들어갈지 모른다.

 

20세기 베트남전처럼, 21세기의 부도덕한 전쟁이 남긴 교훈은 차고 넘친다. 그 교훈의 몇가지라도 되돌아보는 건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역사는 시공간적인 차이를 뛰어넘어 비슷한 모습으로 자신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우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개시 때 주요 정치인들이 취했던 태도는 흥미롭다. 침공을 감행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개전 직후 90%를 훌쩍 넘었다.

그러나 퇴임 무렵, 그는 이라크전을 “가장 후회스런 결정 중 하나”로 꼽았다.

상원에서 이라크 침공 결의안에 찬성했던 민주당의 존 케리와 힐러리 클린턴은 각각 2004년과 2008년 대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라크 전쟁을 용인했던 전력이 발목을 잡았다.

 

반면에 반역자라는 비판에도 꿋꿋하게 반대표를 던졌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죽을 때까지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개전 당시 일리노이 주상원의원으로 “이라크 침공은 바보스런 짓”이라고 비판했던 버락 오바마는 지금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라 전쟁을 마무리 짓는 일을 하고 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가치를 지켜내는 게 정치인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1974년 리처드 닉슨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민은 더 이상 ‘정직하지 못한 정부’가 들어서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명분은 대량살상무기(WMD)였다. 그러나 바그다드 함락 이후 1200명의 전문가가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대량살상무기는 없었다.

 

침공 전,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들은 고의적으로 국민에게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 내부에서 ‘정보가 틀렸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무시했다. ‘국가 이익’이란 허상을 내세워 언제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게 국가권력이란 사실을 이라크전은 새삼 일깨웠다.

 

여기엔 언론도 일조했다. 전쟁 전, <뉴욕 타임스>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장문의 기사를 6차례나 실었다. 백악관이나 중앙정보국(CIA) 고위 관계자 등을 취재원으로 한 기사들이었다. 이 중 5개의 기사를 국가안보 분야 탐사전문기자인 주디스 밀러가 썼다.

나중에 기사들은 오보로 밝혀졌고, 밀러는 불명예스럽게 <뉴욕 타임스>를 떠났다. 빌 켈러 <뉴욕 타임스> 편집인은 “너무 쉽게 (취재원의 얘기를) 믿어버렸다. (취재와 보도 과정에) 제도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잘못을 인정하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

<뉴욕 타임스>가 이럴 정도니, 다른 신문·방송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언론이 잘못된 전쟁을 방조하고 편승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몇주 전,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식사를 하다가 이라크전과 천안함에 관한 언론 보도가 화제에 올랐다. 미국 정부가 대량살상무기 정보를 왜곡한 사실과 그걸 짚어내지 못한 언론의 문제를 언급하자, 그 관계자는 “4000명이 넘는 미군이 숨졌는데도 미국에선 부시 대통령에 대한 법적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런 점을 우리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똑같은 사건에서 서로 받아들이는 교훈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뭐, 그럴 수 있다. 어떤 사건이든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건 필요하다. 다만, 모든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서 반드시 잊어선 안 될 교훈이 하나 있다.

권력이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국익’으로 치장한 일이 정말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박찬수 부국장pcs@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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