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현병철 위원장님, 그만 내려오시지요

道雨 2010. 11. 12. 16:51

 

 

 

         현병철 위원장님, 그만 내려오시지요


» 최영도 전 인권위원장·변호사

 

 

현병철 위원장님, 국가인권위가 어떻게 하여 탄생했는지 아십니까? 인권위가 얼마나 피 어린 투쟁의 소산인지 아십니까?

 

1998년 9월 법무부는 인권위를 특수법인의 민간기구로 설립하고 법무부 산하기관으로 두는 법안을 밀어붙였습니다. 인권침해를 감시당해야 할 검찰이 인권위의 머리 위에 앉겠다는 것이었지요.

인권시민단체들은 인권위는 행정부서에 속하지 않는,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된 국가기구여야 한다며 맞섰습니다.

막강한 법무부를 상대로 2년8개월에 걸친 험난한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검찰 위세에 눌린 의원들은 몸을 사리고, 언론은 침묵했습니다.

필사적 저항에도, 법무부는 특수법인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해 정부 공식 법안으로 확정했습니다. 대통령께서 법무부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1999년 4월7일 정부 법안 철회를 촉구하며 명동성당에서 7일간 단식철야농성에 들어갔습니다. 투쟁이 제네바 유엔인권위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인권단체들의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우리는 더 강도 높은 투쟁으로 정부 법안의 국회 상정을 끝내 저지하고, 제15대 국회 종료로 법안을 폐기시켰습니다.

2000년 12월8일 우리 입장을 지지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의 의원입법을 발의토록 했습니다.

정기국회 회기 내 법안 처리를 촉구하며 12월28일부터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철야단식에 들어갔습니다. 농성천막도 없이, 영하 10도의 혹한과 폭설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아침에 허옇게 성에가 낀 얼굴을 쳐다보며 밤새 얼어죽지 않았나 확인했습니다. 농성 단원들이 쓰러져 현장에서 링거를 꽂고 병원에 실려 갔다가 의식을 회복한 뒤 농성에 합류하는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촛불시위가 이어졌으나, 대통령께서는 시종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여당 대표와의 면담도 거절당했습니다. 투쟁은 13일 만에 임시국회 회기 종료로 허탈하게 끝났습니다.

 

우리는 민주당 인권법소위원회와 법안을 축조심의해 확정했습니다. 2001년 4월30일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5월24일 공포됐습니다. 법무부와의 투쟁은 그렇게 시민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현 위원장님! 인권위가 얼마나 힘든 투쟁의 산물인지 아셨습니까?

당신은 국회에서 인권위는 행정부 소속이라고 발언해, 그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했습니다. 인권활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독립인데, 무임승차하신 당신께서 위원회 독립과 위상을 이렇게 훼손해도 되는 것입니까?

 

인권위는 정부에 대하여 쓴소리를 하라고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당신은 취임하신 이래 당연히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정권의 눈치를 보며 한 번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셨습니다.

당신은 <문화방송> ‘피디수첩’ 사건, 박원순 변호사 상대 손해배상 청구사건, 야간시위 위헌법률 심판청구사건,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등 정권과 연관된 사안에 대해 줄줄이 부결시켰습니다. 인권위 도움이 필요한 용산참사, 해고사태, 시위진압, 4대강 반대 이포보 농성자들에 대한 국가기관의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독재라 해도 어쩔 수 없다”며 파행과 왜곡을 일삼다가, 상임위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운영규칙개정안’을 전원위에 상정하셨습니다.

독선적 운영방식에 반발하는 문경란·유남영 상임위원과 조국 위원이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몰고 왔습니다.

 

국제사회 모범이던 위원회는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 놓고도 “인권위는 가장 잘 운영되고 있다”고요? 1년쯤 높은 자리에 계시더니 아주 뻔뻔해지셨군요.



현 위원장님, 당신은 임명 당시부터 인권 전문성과 경험, 인권 감수성과 지향성,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한 인권 문외한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애당초 안 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인권위원장은 당신과 같은 분이 앉으실 자리가 아닙니다. 위원회의 독립과 위상을 지킬 의지가 없으시다면, 이 이상 추한 모습 보이지 마시고 그만 내려오시지요.

 

 

<최영도 전 인권위원장·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