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급식, 인식의 전환 | |
무상급식의 대표적 반대론자인 오세훈 서울시장이 꼭 읽었으면 하는 글이 있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교수 논지의 뼈대는 이렇다.
‘무상급식을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무상급식이 사회복지와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당위성은 다른 데 있다.
현대 정부가 수행하는 다양한 경제적 역할 중에서 국방·경찰 서비스 같은 공공재를 생산·공급하는 일은 중요하다.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공공재와 관련한 정부 개입의 당위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공공재와 더불어 정부 개입이 필요한 또다른 상품이 바로 가치재(merit goods)다. 가치재는 공공재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가치재는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 일정 수준 이상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정부가 직접 생산·공급하는 상품을 뜻한다. 의료, 주택, 교육 서비스가 좋은 예다. 의무교육은 교육이 가치재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는 대표적 사례다.
무료급식을 사회복지정책으로 보면, 부유층에게 무료급식 혜택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 정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혜택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료급식이 가치재이기에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것으로 보면 결론은 180도 달라진다. 공공재나 가치재 성격을 갖는 상품은 무상배분이 원칙이다.’
이 교수의 가치재 개념은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 국민 모두가 공동체의 기본가치를 체득하고 일정 수준의 지적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초·중등 9년 교육을 의무화했듯, 아이들이 차별감을 느끼지 않으며 영양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공평한 식사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무상급식보다는 ‘의무급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취지다. 보유주식 가치가 9조원이 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손자가 의무교육을 받아도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런 인식의 전환이 무상급식을 곧바로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느냐’는 비판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렇지만 “선거판에서 돈을 나눠주는 행위” “망국적 좌파 포퓰리즘” 등으로 무상급식을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정책 우선순위와 재원조달 방안 등을 냉정하게 따질 자세만 갖춘다면 길은 보인다. 우선 허투루 쓰이는 예산을 줄이면 된다. 4대강에 보를 쌓고 물길을 내는 데 드는 천문학적 돈은 둘째로 치고, 4대강 등의 강둑 위에 1728㎞의 자전거도로를 만드는 2000억원은 아껴보자. 도로가 생긴들 이 추운 겨울 누가 자전거로 그 시멘트길을 달릴 것인가.
‘부자감세’라 비판받는 소득·법인세를 감면하지 않으면 더 좋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2012년부터 이 세금 감면으로 한해 3조~4조원의 세수가 줄어든다. 이 정도면 의무급식을 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부유층이 더 낸 세금으로 부유층 아이들까지 의무급식을 받으면 형평성 논란도 없을 테니 ‘꿩 먹고 알 먹고’다.
‘가능한 범위에서 점진적으로’ 무상급식을 하는 방안도 있다. 민주당이 최근 내놓은 통계를 보면, 오는 3월부터 전국 229개 시·군·구의 79%(181곳)가 초등학교 무상급식을 실시한다. 인천 옹진군처럼 유치원부터 초·중·고까지 전면 실시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자체는 유치원에서 초·중까지, 또다른 지자체는 초·중에서 전면 혹은 부분 무상급식을 실시한다. 대개 서울시보다 재정자립도가 낮지만, 여건에 따라 ‘현명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오 시장이 주민투표라는 승부수까지 던진 마당이니 급식논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기왕에 쟁점이 된 이상, 무상급식 이슈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차원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혜택이 제공돼야 한다’는 가치재 차원으로 한 단계 높였으면 좋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jjk@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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