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왕재산’ 반국가단체, 실체가 뭔가

道雨 2011. 8. 30. 14:17

 

 

 

        ‘왕재산’ 반국가단체, 실체가 뭔가

 

체제를 위협할 만한 조직세력이나 구체적인 활동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법적용이라면 시민의 상상을 범죄로 겨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상대 검찰총장이 취임사에서 ‘종북좌익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한 뒤 첫 작품이 나왔다. 이른바 ‘왕재산’ 사건이다.

8월25일 검찰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구속기소된 5명의 주된 혐의는 인천지역을 혁명의 전략적 거점으로 삼기 위해 왕재산이라는 지하혁명조직을 결성하여 인천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 및 군부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고, 미군 야전교범, 군시설 위성사진 등의 정보를 탐지해 수시로 북한에 보고했으며, 야권통합을 주도하는 등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7월 초였다. 두달 가까이 진행된 수사에서 국정원은 인천지역의 민주노총 관계자, 야당 구청장 등 수십명을 수사선에 올려놓고 마구잡이 소환조사와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실시하였다.

 

우선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이 저지른 인권침해와 위법수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속된 피의자들이 묵비권을 주장하였음에도 국정원은 그들을 매일같이 강제인치하여 강압적인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욕설과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구속영장에 대한 변호인의 열람등사를 불허하고, 변호인이 검색대를 통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호인 접견을 불허하는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수사 내내 지속되었다.

피의자로 지목된 이들이 변호인을 대동하여 조사를 받겠다고 하였는데도, 집이나 회사 근처로 찾아와 수시로 전화를 걸어 마치 참고인 조사만 간단하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유치한 회유를 하기도 하였다. 피의자의 가족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형사소송법과 국제인권기준이 정한 인권보호의 기준을 무시한 채로 두달 동안 수사를 진행한 결과물은 과연 어떠한가.

 

검찰이 왕재산이라는 지하혁명당의 조직원이라고 밝힌 사람들은 이번에 구속기소된 5명뿐이고, 그 외 5명 정도가 수사를 받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고작 5명 정도가 군부대 폭파와 같은 폭력혁명을 위해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란 대한민국의 체제를 부정하고 정부를 참칭하거나 체제전복을 직접적인 목표로 한 단체를 말한다.

반국가단체가 되려면 일정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조직과 세력이 있어야 한다. 5명 정도로 반국가단체라니, 법리적으로 보아도 검찰의 발표는 우스꽝스럽다.

 

게다가 구속된 이들이 인천의 주요 시설 장악 및 군부대 폭파 등 무장봉기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인데, 정작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매우 미약하다.

검찰의 발표 당시 ‘왕재산 구성원들이 폭파를 위해 무기를 구입하는 등 구체적인 정황이 있느냐’는 질문에 검찰은 ‘2014년까지 계획일 뿐 지금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옹색하기 이를 데 없는 답변이다.

 

구속된 이들이 간첩활동으로 북한에 넘겼다는 정보도 국가기밀이라고 하기조차 민망한 것들이다.

검찰은 이들이 미군 야전교범과 군시설 주위의 위성사진을 수집했다는 것을 간첩활동의 주요 증거라고 발표했지만, 그것은 인터넷이나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미군 야전교범은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위성사진집은 서점에서 누구나 구입할 수 있다.

간첩행위란 국가기밀을 탐지·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들이 국가기밀이라면 세상에 국가기밀이 아닌 게 없을 터이다.

 

야권통합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거나 각종 반정부 집회·시위를 주도했다는 대목은 황당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야권통합은 진보개혁세력의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인데, 왕재산 조직원 5명은 야권통합 논의를 좌지우지할 위치에 있지 않다.

 

 

한마디로 한상대 검찰총장의 첫 작품치고는 시나리오가 조악하기 그지없는 수준이다.

국정원과 검찰은 반국가단체 구성이라는 어마어마한 딱지를 붙였지만, 체제를 위협할 만한 조직세력이나 구체적인 활동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식의 법적용이라면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는 시민의 상상을 범죄로 겨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다시 한번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아마도 왕재산 사건은 공안정국을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 될 듯싶다.

이 사건은 인천지역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의 관계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해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안정국, 빨갱이 덧칠하기로 진보민주진영의 발목을 잡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의혹은 필자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국정원과 검찰의 권력은 참으로 막강하다.

수사 과정에서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온갖 인권침해를 자행하더니 결국 변변한 증거도 없이 지하혁명당 사건을 국민 앞에 일단 ‘질러버렸다’.

 

지금까지 검찰의 발표로 보면 이 사건은 무죄로 결론나거나 기껏해야 이적표현물죄 내지 회합통신죄 정도의 가벼운 처벌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에 재판 결과야 어찌되든 간에 검찰이 조직사건을 터뜨림으로써 야기될 정치적·사회적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질러버리되, 책임은 지지 않는, 참으로 막강하고도 편한 권력이다. 정치검찰의 본격적인 행보에 경종을 울려야 하지 않겠는가.


<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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