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옛 동독 건설사병 이야기

道雨 2011. 9. 1. 11:01

 

 

 

               옛 동독 건설사병 이야기 

 

동독 인민군에는 ‘건설사병’이 있었다. 양심상 무기 들기를 거부하는 젊은이에게 허용된 대체복무제였다

 

 

 

»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옛 동독 출신 독일인들과 면담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롤란트 가이펠도 그중 한 분이었다.

1939년생인 그는 동독에서 태어나 서독에 가서 살다가 다시 동독으로 와서 활동한 개신교 목사다.

서독에서 대학을 다닌 그가 1969년 동독으로 영구이주한 것은 그 2년 전 동독 여행에서 알게 된 동독 처녀와의 사랑을 위해서였다.

 

그는 결혼하여 게라에 정착한 후 목사로서 문학·예술·환경문제 연구 청소년 모임, 장애인 지원 모임 등 다양한 모임을 주도했으며, 동독 체제 전환기였던 1989년 가을에는 변화를 요구하는 게라 시민들의 촛불집회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2009년에는 독일 정부의 연방공로훈장을 받았다.

자유와 사랑을 찾아 동서독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의 삶의 이야기는 <넘어가라니까-독일 역사 오십년>(1999)이라는 만화로도 재현되었다.

 

 

이분의 이야기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병역 이력이었다.

그는 청년시절 서독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동독의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에 “네가 서독 군대에서 복무하게 되면 동독에 입국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복무를 중단했다.

그런 후 10년이 지나 동독으로 들어왔으며, “나는 서독에서도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역설하여 건설사병으로 복무할 것을 허용받았다.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지기 전 동독 인민군에는 건설사병(Bausoldat·바우졸다트)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2차 대전 후 분단된 독일에서 동서독은 각기 다른 시기에 국방부를 부활시키고 군대를 창설하였다.

동독에서는 1962년부터 징병제가 실시되었고 1964년 건설사병제가 도입되었다.

건설사병제는 퀘이커교도, 개신교회 인사를 비롯한 동독 종교인들, 평화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마련한 것으로, 양심상 무기 들기를 거부하는 젊은이에게 허용된 대체복무제였다.

대체복무의 초기 형태가 총 대신 삽을 들고 토목건설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었기에 이 명칭이 붙었으나, 후기에는 산업체·농장 등에서 일하는 건설사병도 있었다.

서독에서는 대체복무가 광범하게 인정되어 많은 대체복무자들이 현역병보다 긴 기간 동안 각종 시설 등에서 공익요원으로 복무했으니, 동독 건설사병제는 이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가이펠 목사는 복무를 이행한 뒤, 청소년 예배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건설사병들의 삶의 목적이라고 자주 설교했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병역을 마친 아버지들에게도 이 제도를 소개하며, 무기를 거부해도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8월3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종교 등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하도록 한 병역법은 합헌이라고 다시 확인했다.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한 춘천지법은 대체복무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무기를 손에 들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기본권의 침해가 아닌지 질문했었다.

 

이에 대한 헌재의 대답은 실망스럽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구 사회주의권 사회가 경직적·비인간적 체제였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주의 동독에서도 양심적 무기거부, 대체복무가 인정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 날, 언론은 재벌 집안 남자들의 병역면제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헌재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남북대치 상황하에서 사회통합을 저해한다’고 판단했다는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해주는 것과 징병제는 그대로 둔 채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의 병역기피 만연을 방치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사회통합을 저해하는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굳이 형사처벌하여 범법자, 전과자로 만드는 것은 진정으로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