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장수가 행복인 사회, 국민연금 개혁으로

道雨 2011. 9. 2. 14:40

 

 

 

  장수가 행복인 사회, 국민연금 개혁으로 

 

 

계층 간, 현재·미래 세대 간 형평성에 문제 있는 국민연금

   …기초노령연금 강화, 연금보험료 인상과 정년 연장이 해법

 
» 한국 사회에서 돈 없이 오래 사는 건 재앙에 가깝다. 이처럼 다수의 사람들에게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불안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 5월4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사는 한 할머니가 늦은 아침을 먹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당첨되면 20년간 매달 500만원씩 지급되는 연금복권이 대박을 내고 있다.

복권 공급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해 지금 살 수 있는 건 한 달 뒤 추첨 복권이라는데, 매력적인 복권 상품을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밝지만은 않은 듯하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불안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서구 나라들도 공적연금의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되니 일찍이 공적으로 노후 대비를 해온 편이지만, 요사이는 공적연금으로 힘겨워하고 있다.

 

2008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공적연금에 지출하는 재정 규모가 평균 7%로 전체 복지지출 국내총생산(GDP) 19% 가운데 거의 40%를 차지한다.

 

정부는 연금액을 인하하거나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늦추는 방식으로 연금개혁을 추진하고, 가입자들은 이에 반발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최대 비밀 ‘후한 급여’

 

같은 OECD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공적연금 지출은 GDP 1.7%에 불과하다. 일찍 도입된 공무원·군인·사학연금 등 특수직역연금만 자기 역할을 할 뿐, 국민연금은 1988년에 시작돼 아직 연금수령자가 많지 않은 까닭이다.

앞으로가 문제다. 지금 유럽 국가들이 맞고 있는 과제가 미래 우리나라가 겪을 일이고, 그 정도는 더욱 심각할 수 있다.

 

올해 우리나라 고령화율(전체 인구 중 65살 이상 비중)이 11.3%로서 OECD 평균 16.3%보다 낮다. 하지만 워낙 우리나라 고령화 속도가 빨라 2050년에는 무려 38.1%에 달한다는 게 정부의 공식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성인 4명이 노인 3명을 부양하게 돼 노인부양비는 75%가 된다. 지금 노인부양비가 16%니 노인 부양 책임이 무려 5배나 커진다는 이야기다.

 

과연 국민연금이 이를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사실 국민연금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성의 대상이었다. 국가가 노후에 연금을 주겠다며 강제로 보험료를 징수해가지만 나중에 연금을 지급할 수 있을지 믿기 어려웠고, 과세 인프라가 취약한 탓에 연금보험료 산정을 두고도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2004년에는 한 네티즌이 올린 ‘국민연금 8대 비밀’이 전국을 강타해 국민연금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넣었다.

그 한 해 전에는 국민연금공단에서 지역가입자를 관리하던 노동자가 ‘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이라는 유서를 전하며 목숨을 끊었다.

“오늘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보험료를 조정하겠다는 문서를 만들었다”고 자괴감을 적은 그는, 당시 국민연금공단 경영진이 강요하는 징수 실적 올리기와 현장 민원 사이에 낀 자신의 처지를 견뎌내지 못했다.

 

 

지금은 어떤가?

국민연금을 둘러싼 여론이 바뀌고 있음이 느껴진다.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국민연금의 효과가 알려진 덕분이다.

몇 년째 국민연금을 받고 계시는 내 친척분은 국민연금만큼 좋은 게 없다고 홍보대사 역을 자임하신다.

국민연금공단 노동조합의 간부는 나에게 이런 말도 전해주었다.

“예전에는 연금보험료에 불만을 가진 가입자들이 지사에 찾아와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경찰차가 왔는데, 지금은 종종 동네 어르신들이 박카스 한 박스를 건네주곤 한다. 이렇게 국민연금을 받아도 되는지 미안하고 고맙다면서.”

 

내 생각에 국민연금이 지닌 최대 비밀은 ‘후한 급여’에 있다.

‘용돈연금’이라는 말에 익숙한 분들은 다소 의아하겠지만, ‘낸 것에 비해’ 후하다는 뜻이다.

민간보험과 달리 국민연금은 주주이윤과 광고비에서 거의 자유롭고, 더불어 ‘노후복지’라는 취지에서 보험료보다 많은 급여를 돌려준다.

 

예를 들어 월 200만원 근로소득자가 20년간 월 20만원씩 보험료를 낸다고 했을 때, 개인연금의 예상 수령액은 총 1억9천만원이지만, 국민연금은 1.8배인 3억4천만원이다. 직장가입자는 보험료의 절반을 사용자가 책임지니, 본인 부담 보험료 기준으로 보면 3.6배나 많다.

 

» 고령화는 인구학적 의제가 아니라 노동시장과 경제체제를 혁신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의제’다. 덴마크의 코펜하겐 인근 요양시설에서 노인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 도우미의 보조를 받으며 점심을 먹고 있다. 한겨레 자료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미래 연금 지출 늘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국민연금이 개인연금에 비해 손해라고 여기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이런 급여 구조는 정말 큰 비밀이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이 비밀을 누려온 사람들이 있다. 국민연금 임의가입자다.

국민연금은 성인이며 모두 가입해야 하는 의무제도이지만, 전업주부, 27살 미만 무소득자, 기초생활수급자 등은 소득이 없기에 의무 가입에서 제외되는데, 원할 경우 이들도 임의가입자로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다.

 

국민연금 도입 초기부터 2008년까지 임의가입자 수가 약 3만 명에 달했다. 사람마다 ‘공공의 적’이라 비판하며 국민연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던 시절, 스스로 국민연금에 가입한 분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비밀이 새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2009년 임의가입자 수가 4만 명에 육박하더니, 지난해에는 9만 명으로 급증했고, 올해 5월 현재 벌써 12만4천 명이다. 최근 임의가입자들의 주소지를 보면 서울 강남 3구가 많다고 한다. 역시 발 빠르시다.

 

이제라도 국민연금의 본래 모습이 알려지는 건 다행이지만, 난 여전히 국민연금이 불편하다. 공공복지제도이지만 두 가지 면에서 형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현재 세대 내부에 존재하는 계층 간 형평성 문제고, 다른 하나는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 간 형평성 문제다.

 

먼저 세대 내 형평성 문제를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국민연금은 괜찮은 노후복지제도다. 단 가입자에게만 그렇다.

현재 성인 인구 중 절반은 국민연금 가입 대상이 아닌 비경제활동인구이거나 가입했더라도 보험료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냉혹한 놈이어서, 자신에게 보험료를 납부한 사람, 즉 내부자에게는 ‘후한 급여’를 제공하지만, 외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내부자는 그럭저럭 연금보험료를 낼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외부자는 이것조차 힘겨운 사람들이다. 비정규 노동자는 젊었을 때는 노동시장에서, 늙어서는 국민연금에서 이중의 차별을 당하는 꼴이다.

 

미래 세대와의 형평성 문제도 ‘후한 급여’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세대 간 연대’라고 아름답게 표현하더라도, 현세대의 후한 급여는 후세대의 짐일 수밖에 없다.

보수 세력이 진보 진영의 복지확대론을 비판하려고 자주 사용하는 논리이지만,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미래 연금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세대가 지금까지 어렵게 살아왔다지만, 미래 세대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남겨주는 건 공평하지 않다.

 

공적연금제도가 지닌 이 두 가지 형평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국민연금에 대해 강연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깔끔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답변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지원 운동’도 한 방법

 

첫째, 세대 내 형평성은 결국 사각지대 해소 문제다.

두 가지 경로가 필요하다.

하나는 기초노령연금을 조속히 강화해 대부분의 노인에게 기본적 급여를 제공해야 한다. 현재 기초노령연금 9만원이 최소한 두 배로 올라야 한다. 일부에서 재정 부담을 걱정하지만, 고령화 시대에 이는 감수해야 할 비용이고, 우리는 그만한 경제력을 지녔다.

 

올해 초 국회는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논의하려고 연금제도개선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런데 애초 기초노령연금 급여율을 어떻게 올릴 것인지가 법적 과제였는데, 지급 대상을 현행 70%에서 50%로 줄여 선별복지로 제도를 고착하겠다는 보건복지부의 개편안이 논의의 중심이 되고 있어 황당하다.

외국처럼, 기초노령연금의 위상을 대다수 노인이 받는 보편연금으로 분명히 정립하고 연금액을 올리는 구체적 방안을 확정하기 바란다.

 

동시에 사각지대에 속한 사람들이 국민연금제도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들이 보험료를 제대로 낼 수 있도록 일자리가 괜찮아지는 게 최선이지만, 당장 그것이 어렵다면 연금보험료를 지원하는 게 차선이다.

최근 한나라당에서 저소득 계층에게 사회보험료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지원 대상이 일부에 그치는 한계를 지닌다.

2006년 민주노동당이 선보였던, 국민연금 가입자(정규직 노동자), 기업, 정부가 총 13조원의 재원을 마련해 640만 명의 저소득 계층, 비정규 노동자에게 본인 부담 보험료 전액을 5년간 지원하자는 ‘국민연금 보험료지원 운동’(일명 ‘사회연대 전략’) 같은 대대적인 국민운동이 전개됐으면 좋겠다.

 

둘째, 세대 간 형평성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후세대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국민연금 급여를 낮추자는 의견이 있으나, 국민연금액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급여율 인하는 고려할 방안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려운 과제이지만, 국민연금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사용자 몫을 늘리는 게 답이다. 현재 OECD 국가의 공적연금 보험료율 평균은 19.6%(피고용자 8.4%, 고용주 11.2%)로서 우리나라 9%(피고용자 4.5%, 고용주 4.5%)보다 두 배 이상이다.

향후 국민연금 급여 체험이 확장되는 것에 맞춰 보험료 수준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만들어져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연금을 둘러싼 세대 간 긴장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해법은 노인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1971년 62살에서 2005년 79살로 늘어났고, 2050년에는 86살로 높아질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노인의 기준 연령이 계속 65살로 설정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일할 체력과 의사를 가진 노인에게는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70살까지 일하게 된다면 고령화 기준은 70살이 되고, 그러면 기존 5년의 연금 수급 기간은 보험료 납부 기간으로 바뀌어 후세대에 주는 재정 부담도 줄 것이다. 연금 급여 수준을 낮추지 않으면서 말이다.

 

 

고령화는 사회경제적 의제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청년과 노인에게도 일감이 주어지도록 모두가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그만큼만 일하고도 먹고살 수 있게 소수가 독과점하는 사회적 부를 다수가 적절히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일하는 방식, 부를 나누는 방식에서 혁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는 시대사적 과제다.

 

결국 고령화는 인구학적 의제가 아니라 노동시장과 경제체제를 혁신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의제’다.

오래 사는 게 문제가 아니다. 장수(長壽)가 행복해지도록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