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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레 미제라블>이 2012년 한국에 던지는 질문

道雨 2013. 1. 2. 11:19

 

 

 

 

    대선결과 '미스터리', 이거 보면 풀린다

1832년 <레 미제라블>이 2012년 한국에 던지는 질문

 

 

 <레 미제라블> 포스터. 빅토르 위고 원작의 이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듯 '비참한 사람들' 또는 '극빈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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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을 위한 일인데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하는 일인데도, 사람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리케이드를 쌓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의자에 책상이며, 심지어 아끼는 피아노까지 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압군이 밤처럼 다가오자, 사람들은 피 흘리며 절규하는 학생들에게 팔 하나 숨길 문틈조차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들을 구하겠다'며 나선 청년들은 총탄을 비처럼 맞으며 쓰러져 갔고, 변화를 꿈꾸던 젊은이들의 '철없는 반란'은 이렇게 간단히 진압되었다. 아니,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다. 1832년, 파리.

<레 미제라블>이 한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관객 수를 늘려가고 있다. 개봉 일주일 만에 200만 명을 돌파해 관객수와 예매율 모두에서 1위를 차지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 영화가 '대선 후유증'을 달래는 '치유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한다.

대선결과, 그 충격적인 '미스터리'

이해할 만하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던 젊은 세대는 <레 미제라블>의 시민군 이상으로 절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왜 변화를 원했는지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20대 사망원인 1위도 자살이며, 30대 사망원인 1위 또한 자살이다.

이들이 40대가 되면 달라질까? 물론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암 사망률이 자살률을 2위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돌연사 비율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세계 최장 노동으로 인한 과로와 허술한 의료복지가 결합한 결과가 아닐까. 2012년 5월 영국 BBC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인은 한 해 평균 2193시간을 일한다. 2위인 칠레보다 무려 125시간을 더 일한다. '비공식 업무시간'을 뺀 통계가 이렇다.

이 젊은 유권자들이 당선자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절망과 과로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변화를 꿈꾸는 게 놀라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이들이 맞닥뜨린 대선결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선거 전만 해도 온 사회가 젊은 세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싸워줄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사회 분위기가 얼마나 심상찮았으면, 보수정당 후보가 '반값 등록금,' '선행학습금지,' '4대 질환 전액 국가부담' 같은 공약을 내세웠겠는가.

2012년, 한국. 변화를 꿈꾸던 청년들의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 것일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레 미제라블>의 선풍적 인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좌절한 세대가 영화를 통해 실패한 꿈을 되새김질할 뿐이라면, '힐링'보다는 '자학' (혹은 '헬링')에 가깝지 않을까?

 장발장은 실수, 용서, 화해, 연민 등 인간적 가치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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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은 시대와 문화적 차이를 넘어 한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낸다. 19세기 프랑스 민중이나 21세기 한국 민중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는 작품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남자들이 무지와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여자들이 빵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아야 하며, 아이들의 머리를 깨우고 마음을 덥힐 책조차 구할 수 없는 곳"을 다룬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국 관객에게 결코 '먼 나라의 옛 이야기'일 수 없는 것이다. 반도체 회사에서 수십 명이 암에 걸리고, 자동차 회사 부당해고로 수십 명이 자살하고, 이 추운 겨울에 고압 송전탑 위에서 수십 일째 목숨을 건 시위를 한다. 대선 이후만도 5명의 노동자가 자살과 돌연사로 목숨을 잃었다.

일터의 노동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 정서, 신체, 성적으로 학대 받는 아동의 수는 지난 10년간 두 배 이상 늘었다. 40만 명이 넘는 초등학생은 방학 때마다 점심을 굶는다. 매년 6만 명의 초중고생이 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거나 가정문제로 학교를 떠난다. 전국 거리를 헤매는 가출청소년은 20만 명이 넘고, 이들 4명중 1 명이 잘 곳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매매춘을 한다.

입시지옥을 뚫고 대학에 가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들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휴학 상태다. 나머지 학생들 다수도 편의점에서 술집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학생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성 평등 수준은 세계 최하위권(135개국 중 117위)으로, 그 결과 성매매 여성 비율이 유럽의 7배에 달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절반은 한 해에 1000만원을 벌지 못하는 빈곤층으로 전락했다(이들 절대다수가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

이게 세계 경제력 10위권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는 손을 놓고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면 차라리 낫겠는데, 정부가 적극 나서서 경쟁교육, 노동 유연화, 민영화와 복지축소를 밀어붙여 처참한 국민들의 삶을 더 '미제라블'하게 만든다.

원작보다 비참한 21세기 한국판 <레 미제라블>

<레 미제라블>은 권력자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진실도 드러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 기득권의 도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법은 부패한 권력자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면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빵을 훔친 사내는 19년이나 가둬 놓는다. 판틴은 공장에서 일하다 쫓겨난 후 딸을 살리기 위해 머리칼을 잘라 팔고, 이를 뽑아 팔고, 거리에서 남자들의 희롱과 학대의 제물이 되어도 '법과 질서'는 오직 가해자 편을 들 뿐이다.

만일 장발장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들린다면, 떡을 훔친 폐지수집상 할머니의 죄는 추상같이 물으면서도, 수백 억의 조세포탈과 수천 억의 배임 혐의를 받던 기업총수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한국식 법 정의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여배우 장자연을 능욕해 죽음으로 몰고 간 권력자들 가운데도 법의 처벌을 받은 이는 없다.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는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베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는 장발장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확고히 믿던 세계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자베르는 스스로 목숨을 던진다. 법이 인간적 가치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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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일깨우는 또 다른 사실은, 법이 개인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용서, 화해, 헌신이라는 인간적 가치이고, 장발장은 이를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를 쫓는 자베르 경감은 '법과 질서'의 알레고리로 등장한다.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의 용서에 감화된 후 혼란스러워 하다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진다. 자베르의 죽음은 이해, 배려, 공감이 법을 넘어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이 깨달음은 곧 한숨을 만날 운명이었는지, 영화관을 나서자 마자 들려온 인수위 위원장의 취임소감이 나를 무척 당황케 한다. 그는 자랑스레 자신이 '법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레 미제라블>은 자베르가 주연으로 나오는 모양이다.

<레 미제라블>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이 있다. 우리를 가장 아프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사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위의 (대체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판틴을 시기하고 미워해 직장에서 쫓아낸 것도, 탐스런 머리와 흰 이를 빼앗은 것도 같은 처지의 서민들이었다. 동료를 감싸지 못하는 약자들이 그를 위해 강자와 싸워줄 수는 없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철밥통'과 '귀족 노조'라는 허구에 속아 남의 밥그릇을 뺏는 공모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우리에게 돌아온 거라곤 내 빈약한 밥그릇을 '철밥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장발장의 후회, 되풀이하지 말자

장발장은 옥살이를 한 후 사업에 성공하고, 시장 자리에도 오르게 된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공장에서 작은 소란을 목격하게 된다. 직공 하나가 숨긴 딸이 있다는 이유로 동료들과 공장장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장발장은 공장장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하고 급히 자리를 뜬다. 무심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자베르 경감때문에 마음에 여유를 잃었을 뿐이다.

 장발장의 가장 큰 후회는 눈 앞에서 고통 받고 있던 사람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는 판틴의 딸을 맡아 키우는 것으로 속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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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은 이 순간을 눈물로 후회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거리에서 낯 익은 얼굴을 만나게 된다. 한 여성이 거리에서 몸을 팔다 남자에게 조롱당하고 경찰에 끌려가는 데, 바로 자신이 외면한 직공 판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문을 묻는 장발장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곳에 있었지만 나를 외면했어요. 아무 죄도 없는 나를."

한국사회의 비극은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내성을 지니게 됐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 결과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대통령 직선제는 시민들이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결실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싸워서 얻어낸 투표권으로 사회를 구체제로 되돌리는 선택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투표를 인정하지 않았던 지도자를 복권시킨 것이다.

<레 미제라블>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이 등장한다. 종교적 사랑, 모성애, 부성애, 짝사랑, 한 눈에 반하는 사랑, 연민, 우정, 그리고 연대. 장발장은 이 모든 사랑을 아우르는 인물이다. 장발장은 혈육이 아닌 코제트를 돌보기 위해 높은 지위와 안락한 삶을 버리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그리고 가장 베풀기 어려울) 선물을 준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향해 떠날 자유다.

 코제트와 마리우스. 장발장은 코제트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시민군 진영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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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혁명군과 연대한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은 가장 사회적인 선택이 된다. 개혁에 힘을 보탬으로써 코제트뿐 아니라, 코제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지켜낸 셈이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학생들의 혁명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지만, 이들의 희생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된다. 학생들이 바리케이드에서 전사한 뒤 16년 후 2월 혁명이 일어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혁명의 기운은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각국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된다.

영화가 후반부에 달하자 이곳 저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오바마를 뽑은 시민들 속에 앉아, 박근혜 나라의 국민도 섞여 함께 박수를 친다.

2012년 대선, 실패하지 않았다

 서민을 위해 일하던 정치인이 죽자,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부군과 맞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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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까지 한국사회는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들의 외침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일부는 이번 대선결과와 인구비율을 놓고 비관적인 전망을 하기도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보수 성향을 지닌 50대 이상 유권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적이라는 50대의 37% 이상(방송사 출구조사 기준)이 박근혜를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대의 34% 가까이가 박근혜 후보를 골랐다는 사실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들 모두가 인주를 묻히는 순간 재채기를 한 게 아니라면, 사람에게 사회적 조건을 뛰어넘는 의지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러기에 절망할 필요도 없고, 낙관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이들을 포함한 사회구성원들과 어떻게 나누고 소통해 갈 것인가다. 이것은 5년 후 선거결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까지 얼마나 더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투표하기 위해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저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 분노한 사람들의 노래가.
저것은 결코 노예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민중의 의지가 담긴 가락이다.
당신의 심장에서 울리는 고동이 저 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때
내일과 더불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이 노래는 희망의 조건을 말해준다. 당신의 '심장 고동'이 '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주위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레 미제라블>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될 것이며,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내일과 더불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 강인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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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허탈과 절망, 좌절에 빠진 민중들의 아득한 심경에 위안을 주는 영화

 

                                                                -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을 보고

 

 

여즘 연일 영화감상이다. 허탈한 심경을 달래려는 탓이 크다.

수 많은 민중들(특히 젊은 세대)의 바램이 좌절된 이번 대통령 선거.

지금과 같은 악몽같은 세월을,  5년을 더 견뎌야만 한다니, 정말 아득하기가 그지 없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다.

아니 그저 다음 대통령이 기적처럼 좋은 쪽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만큼 MB 5년동안 민주주의의 기본인 인권과 자유의 퇴행을 가져오고, 소유의 집중화(소득의 양극화)를 심화시킨 탓이 크다. 부정부패는 또 어떻고...

 

그 좌절과 허탈감에 위안을 주면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며칠 전에 개봉된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이다.

그저께 밤에 집사람, 범진(작은 아들)이와 함께 셋이서 심야시간에 봤는데, 2시간 30분짜리 뮤지컬 영화이다.

 

뮤지컬 대사에 익숙하지 않은 나인지라 중반에 약간 지루한 느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그 순간에는 실패하고 좌절을 겪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희망의 시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요즘의 우리나라 상황과 딱 들어맞는 듯하고, 절망하는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화면 가득 배우의 얼굴(감정표현)로 채우고, 요즘과 달리 종교의 긍정적인 면도 부각되고, 시대상황과 민중혁명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베르 경감의 자베르적인 이미지, 마지막 엔딩장면에서의 바리케이트와 민중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거의 모두 나갔는데도 집사람은 우느라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한참이 걸렸다. 우리가 일어서고 자막이 모두 끝나는 순간까지 어느 한 중년의 관객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아마 그분도  우리와  같은 심경이었을 것이다.

 

집에 와서는 아들을 포함, 셋이서 영화를 본 감상을 얘기하였다.

아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도 드문 기억이고, 더욱 영화를 보고나서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라 좋았다.

 

나는 장발장 역에는 강인한 힘과 이미지를 가진 러셀 크로가 더 맞을 것 같은데, 아마 뮤지컬이라는 특성상 노래 실력도 고려된 것이 아닌가하는 근거없는 추정도 했지만, 집사람은 레 미제라블 원작을 보건대 자베르 경감의 이미지, 자기자신의 오류(정부의 폭력과 인식의 잘못)조차 용서하지 못하는(결국 자살하고 만다), 원칙적이고 강인한 모습이 오히려 러셀 크로와 맞다고 얘기하였다.

아들은 요즘 그런 역할(악역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이 배우들이 모두 탐내는 배역이라고도 하였다.

 

 

영화 도입부의 난파선을 끌어당기는 장면이나, 마지막의 바리케이트와 민중들의 모습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하는 것은 역시 민중들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작금의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인해 멘붕에 빠진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위안을 삼으면 좋을 듯 하기에 여기에 소개해 본다.

특히 미래의 주역들인 20, 30대들이 좌절하지 말고, 희망의 불씨를 더욱 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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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새로운 내일을 믿으며 부르는 진혼곡 ‘레미제라블’

 

[이안의 컬처필터] 성난 민중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가?

이안 영화평론가 | angela414@paran.com  

 

 

가혹한 압제에 맞서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을 치켜들고, 피 흘려 이룩했던 위대한 공화정의 역사를 되돌려, 다시 왕정의 지배 아래 가두려는 위정자들에게 맞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맞서며 기다리면, 다시 위대한 시민들이 그 저항에 함께 떨치고 일어서리라 믿으며,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위대한 시민들 대신 더 많은 군인, 더 많은 무기에 에워싸여 고립된 바리케이트 안에서 버텨야했던 참혹한 시가전 끝에 3만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고, 4만이 넘는 시민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가운데 1만여 명이 사형 또는 무기 징역 등의 유죄 선고를 받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쌓았던 바리케이트는 무너졌다.

 

이 참혹했던 '피의 1주일'을 역사는 파리 코뮌이라고 기록했고, 그 기억을 빅토르 위고는 대하소설 <레미제라블>에 촘촘히 기록했다.

단지 그 사건이 벌어진 일주일이 아니라 그날, 그 깃발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그 안에서 꿈을 꾸다 죽어가고, 그러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거대한 구원의 역사로.

 

그리고 이제 그 사건은 뮤지컬로, 드라마로, 영화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깃발을 나부끼며 울려 퍼진다.

 

   
 

톰 후퍼 감독의 <레미제라블>은 스크린으로 무대를 바꾼 뮤지컬이 아니라, 소설이든 뮤지컬이든 영화든 그 안에서 새롭게 되새겨야할 혁명의 역사와, 그 안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공화정이 무너지고 다시 왕이 돌아왔다.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감옥에 갇혀 고된 노역을 하며 버틴 세월이 19년, 그 사이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꿈꾸던 깃발은 누더기가 되어 팽개쳐졌으며, 가석방되어 다시 나온 세상에서도 흉포한 범죄자라고 낙인찍어 감시의 눈을 부라리고, 그 낙인 때문에 세상 모두가 그를 내치고 돌을 던진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자신에게 따뜻한 저녁 한 끼를 대접하고, 포근한 하룻밤 잠자리를 펼쳐준 대주교의 선의보다 그 한 끼가 담긴 값진 그릇을 훔쳐 달아나다 잡혀온 장발장(휴 잭맨)으로부터 이 거대한 서사는 시작된다.

 

   
 

주리고 지친 이에게는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벗어날 길 없는 어두운 삶을 밝힐 빛이 더 필요했다는 것을 깨달은 대주교가, 그릇에 더해 은촛대까지 내어주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행위에 대한 자비나 용서가 아니라, 존재를 걸어 볼 삶의 희망이 되었고, 그래서 장발장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내딛는다.

 

그렇게 새로 시작한 8년의 삶.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많이 이루었다. 자본가가 되어 공장을 소유하고, 시장이 되어 권력도 얻었으며, 신분을 바꿔 명예까지 차지했다. 평탄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런 장발장이 여전히 자신을 찾으려는 자베르 경감(러셀 크로우)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다시 장발장이 되어 어두운 그늘로 숨어들게 된 것은 스스로의 무관심이 죄가 되었다는 깨우침 때문이었다.

 

   
 

어려운 형편과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보지 않고, 소란 피우지 말라고 내친 자기 공장의 여성노동자 판틴(앤 헤서웨이).

가뜩이나 가난한 처지에 부당해고로 생계가 막막해진 판틴이 자기 것으로 가진 단 하나, 몸을 팔아가며 지키고자 한 것이, 남의 손에 맡긴 어린 딸이었다는 것, 더 이상 그 몸조차 팔 수없이 병들어 죽어가게 만든 것, 그래서 그 딸이 무관심과 학대 속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장발장은 다시 되돌아온다.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숨지 않는 대신에, 다시 세상으로부터 숨어 살아야하는 그 이름 장발장으로.

 

자신의 무심함 때문에 죽은 판틴 대신 아버지가 되어 정성을 다해 기른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아리따운 아가씨로 자랐으니, 마음의 짐을 덜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도 좋으련만, 세상은 장발장을 그예 다시 불러낸다.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고,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위험하다. 하필 압제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라니.

여전히 감시의 눈길을 부라리며 뒤쫓는 자베르로부터 꽁꽁 숨어, 아이 하나 잘 키우는 것으로 속죄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세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으나, 장발장은 다시 되돌아온다.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든 젊은이들의 용기와 사랑을 지켜주러. 모두가 문 닫아걸고, 귀 막고, 눈 질끈 감고 돌아선 바리케이트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혁명은 실패했고 사람들은 죽어갔으나, 장발장이 지키려던 젊은이들은 살아남았고, 다시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그때서야 장발장은 깨닫는다. 더 이상 숨어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법 앞에서가 아니라 세상 전체로부터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법과 자본과 정치와 역사 안에서 사람은 개인으로서 죄짓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고, 더불어 싸우고, 더불어 꿈꿀 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레미제라블>은 이런 깨우침을 인물들 하나하나의 숨소리, 눈물 방울, 불거진 핏줄까지 잡아내는 클로즈업, 골목골목을 누비는 카메라, 그 인물과 거리가 하나의 세계를 이룬 도시 전체를 하나에 담아내는 익스트림 롱샷을 오가며, 거대하지만 섬세하게 펼쳐보인다.

 

그 안에서 부르는 노래를 스크린 밖에까지 울려 퍼지게 한다. 무대 공연에서 객석을 향해 부르는 노래가 밖을 향해 지르는 거라면, 관객이 아니라 바짝 다가 든 카메라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나직하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고, 숨이 차기도 하고, 몸이 떨리기도 하면서, 배우도 관객도 각자 자기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가난, 실업, 부당해고가 사람들을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다.

박근혜 후보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현대자동차는 용역경비원들을 동원해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짓밟았고, 다음날 한진중공업에서 노조 간부 최강서씨가, 그리고 이어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이운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파업의 대가로 돌아온 것이 분배 정의가 아니라, 무려 153억 원의 배상금 통지서라니!

이것은 정당한 법 집행이 아니라, 자베르의 추적보다 더 지독한 사형선고다.

 

   
 

<레미제라블>은 절절하게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노래한다.

혼자 달아난다고, 혼자 열심히 산다고, 혼자 속죄한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은 오지 않는다고.

누군가 굶주리고, 누군가 도둑질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그 세상을 바꾸는 것은 두렵고, 힘들고, 살아서 자기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

그러나 미래를 위해 그 꿈을 계속 꿀 수 있는 씨앗을 뿌리고, 그 싹을 지키고, 꽃 피우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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