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 최인호의 '산중일기'를 읽고
잠시 시간이 나서, 한 켠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한참 전부터 뜨문뜨문 읽던 책인데, 끝까지 읽지를 않아 내 등 뒤에 놓여진 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최인호 선답 에세이'라고 부제가 붙어있는 『산중일기』라는 책이다.
작년(2013년)에 고인이 된 작가 최인호는,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늘 승려들과 교우하며, 불교와 관련된 글을 많이 썼다.
이 책(산중일기)도 최인호 작가 자신의 생애가 담긴 일기이자, 삶이라는 인생 전체에 대해 불교적 관점에서 던지는 찬가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는, 최인호 작가도 그 내용이 좋아서 책상머리에 두고 읽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꼭 지금의 나에게 충고하는 말 같이 공감이 가기에, 여기 내 불로그에 다시 소개해본다.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 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고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에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을 향해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제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막아 주소서.
제 신체의 고통은 해마다 늘어 가고, 그것들에 대해 위로받고 싶은 마음들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기꺼이 들어주는 은혜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마는, 적어도 인내심을 갖고 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기억력을 좋게 해주십사고 감히 청할 수는 없사오나, 제게 겸손한 마음을 주시어, 제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부딪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게 하소서.
저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영광된 가르침을 주소서.
적당히 착하게 해 주소서.
저는 성인까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성인들은 더불어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요. 그렇더라도 심술궂은 늙은이는 그저 마귀의 자랑거리가 될 뿐입니다.
제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는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해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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