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대선개입 부정하며 무슨 국정조사인가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특위가 24일 법무부에 대한 기관보고를 시작으로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애초 예상했듯이 첫날부터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현격한 시각차를 드러내 과연 순항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이 이날 회의에서 공개한 녹취록을 보면, 대선 당시 새누리당 선대본부 종합상황실장이던 권영세 전 의원이 “원세훈으로 원장 바뀐 이후…(대화록) 내용을 다시 끼워 맞췄거든요. 그 내용을 가지고 청와대에 보고를…, 그걸…어떤 경로로 정문헌한테 갔는데”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정상회담 대화록을 국정원이 손을 봐서 청와대에 보고했고, 그것이 대선 전 정 의원의 폭로로 이어졌다는 취지로 읽힌다.
민주당은 국정원의 대화록 유출도 ‘대선 개입’이므로 당연히 국정조사 범위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댓글 공작에 한정해야 한다며 반대한다.
애초 합의 과정에서 분명하게 해놓지 않은 대목이긴 하지만, 김무성 의원의 발언이나 권 전 의원의 발언록에 의하면, 국정원이 대선을 앞두고 의도적으로 유출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으니 포함시키는 게 맞다.
이날 회의에서 새누리당 간사인 권성동 의원은 “민주당이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 대북심리전단의 정상활동을 선거활동으로 호도해 이슈화하면서 대선 승리를 꾀하려다 현명한 국민 판단으로 수포로 돌아갔다”며 검찰의 선거법 적용 자체를 비판했다.
김도읍 의원은 “(이번) 국정조사가 삼권분립이 천명돼 있는 헌법에 합치하느냐”며 딴죽을 걸고 나왔다. 검찰이 이미 기소한 내용까지 부인하면서, 국정원 ‘대선 개입’의 진상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속내를 대놓고 드러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국가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국기문란 행위가 드러났다면,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이나 여야의 정파를 떠나 진상을 철저히 밝혀 엄히 단죄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게 정상적인 민주국가다. 이를 감싸는 정당이라면 민주주의를 할 자격도 없다. 심히 유감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민주당도 오십보백보다. 애초 부실하게 합의한데다, 대화록 공방에 이어 위원 사퇴 논란까지 불거지며 시일을 허비했다. 당운을 걸고 덤벼도 시원찮을 사안인데 별다른 성과가 안 보인다. 앞으로도 국정원 보고 공개 여부 등을 놓고 논란이 예상된다.
정치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목청만 높일 게 아니라 정치력과 지혜를 총동원해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거듭되는 악수로 국민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 2013. 7. 25 한겨레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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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승자는 누구일까?
여야 열람위원들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찾기 위해 국가기록원에서 검색을 한 21일 국가기록원 직원들이 자료를 가지고 대통령 지정기록물 열람실로 향하고 있다. 성남/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
어설픈 양비론으로 핵심 흐리지 않겠다
대통령·정당·언론 수준 적나라하게 드러나 참담하다
어설픈 양비론으로 핵심을 흐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서해 북방한계선(엔엘엘) 공방으로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 또 무엇을 잃었는지 차분하게 따져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전말은 간단하다.
선거개입 사건을 물타기 하려고 국가정보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 국회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대화록 원본을 열람하기로 의결했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에는 대화록이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24일 기자들의 질문에 청와대가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진흙탕 싸움에 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처음부터 엔엘엘 공방의 당사자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기간 내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 발언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금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에 별문제가 없다고 알게 됐다.
더구나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대화록 공개 전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시나 결재를 받았을 것으로 국민들은 믿고 있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을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호도해 문재인 후보를 몰아붙이던 동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흙탕물이 이미 치마를 흥건히 적신 것이다.
새누리당은 정쟁에서는 이겼지만 안보를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이비 보수 정당임이 확인됐다.
대선 전에는 표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했다고 쳐도, 겨우 국정원 댓글 사건을 물타기 하려고 엔엘엘 논쟁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졸렬하다.
새누리당이 진정한 보수 정당이라면 국정원과 국가기록원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추진할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은 엔엘엘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고 북한에 호통을 쳤어야 한다.
24일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정조사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을 수사해서 기소한 검찰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몰아붙였다.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상식의 눈을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국정원 댓글공작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이 오히려 훼손되었다. 민심은 국정원의 공작에 놀아날 만큼 어리석지 않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을 이번 기회에 근절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당 의원은 없었다.
문재인 의원은 지난 6월30일 국가기록원 문서 열람을 제안하며 “만약 엔엘엘 재획정 문제와 공동어로구역에 관한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입장이 북한과 같은 것이었다고 드러나면, 사과는 물론 정치를 그만두는 것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에도 걸지 않았던 정치생명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자신의 결백에 건 것이다.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쓴 결정이었다.
그리고 7월23일 성명에서는 “국민들의 바람대로 엔엘엘 논란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끝내자.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에 의하더라도 엔엘엘 포기가 아니라는 것이 다수 국민의 의견이다. 거기에 열람 가능한 기록물까지 살펴보면 진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이런 취지의 성명을 6월30일에 냈어야 했다.
문재인 의원에게 끌려다닌 김한길 대표와 전병헌 원내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도 결국 바보가 됐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민주당 지도부의 안목과 판단 능력은 10년 집권 경험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건을 이 지경으로 만든 데는 언론의 책임도 컸다.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방송, 일부 수구 성향의 신문은 국익을 외면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흠집내기에 몰두했다.
국가기록원에 문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이후에는 갑자기 ‘친노’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며 민주당 내부를 이간질하고 있다.
이들이 ‘노무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그래서 결국 승자는 누구일까?
댓글사건 물타기에 성공하고 정쟁에서 이긴 국정원과 새누리당일까? 정말 그럴까?
이번 사태로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 정당, 그리고 언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적나라하게 알게 됐다.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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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초 범죄와 참수형
국가정보원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무단공개 이후, 새누리당은 사초(史草)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서 발견되지 않자, 갑자기 물 만난 고기처럼 연일 사초 공세를 펴고 있다.
반면에 민주당은 사초라는 말을 가급적 꺼리고 있으니, 언어 구사에서도 공수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급기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24일 “예전에 사초 관련 범죄는 참수로 벌했다”는 섬뜩한 말까지 했다.
황 대표의 말대로 조선시대에 사초에 대한 훼손·누설 행위는 중범죄로 엄히 다스렸다.
“관련 사실을 없애고자 하여 권종(卷綜)을 훔친 자는 ‘제서(制書·국서)를 도둑질한 율(律)’로써 논죄하여 참(斬)하고, 사초를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는 ‘제서를 찢어버린 율’로 논죄하여 참하며, 동료 관원으로서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하는 자는 율에 의하여 한 등급을 감하고, 사초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하는 자는 ‘근시관(近侍官)이 중요한 기밀을 남에게 누설한 율’로써 논죄하여 참해야 한다.”
세종시대 춘추관에서 올린 이런 내용의 보고서는 세종의 윤허를 받아 조선의 기록 관리에 관한 기초 법령이 되었다. 그 뒤 중종 때는 사초 작성 과정뿐 아니라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초를 누설해도 목을 베는 규정이 추가됐다.
황 대표의 발언은 이런 점에서 매우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의문은 국가기록원 대화록만 사초이고 국정원이 보관해온 대화록은 사초가 아니냐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도 사초(시정기·時政記)를 두 부 만들어 한 부는 춘추관에, 부본(副本)은 충주서고에 보관했다.
지금의 상황은 춘추관(국가기록원) 사초는 실종되고, 충주서고(국정원) 사초는 누설된 셈이다.
국가기록원 사초 증발은 그것대로 엄밀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사초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한 자, 동료 관원의 비행을 고하지 아니한 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황 대표의 사초 관련 범죄 발언이 빈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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