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관련

송년 세월호 특별 르포(한겨레)

道雨 2014. 12. 27. 12:22

 

 

 

 

홍가혜는 어떻게 ‘거짓말의 화신’으로 만들어졌나

 

 

 

 

홍가혜씨의 첫인상은 밝았다. 그녀는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할 때 자주 눈물을 보였다.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아 인터뷰를 하고 있는 홍가혜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뉴스분석 왜?

▷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면 안 됩니다. 법적으로도 문제일 수 있고 도덕적으로도 나쁩니다. 하지만 공직자에 대한 비판은 경우가 좀 다릅니다. 세월호 사건 때 홍가혜씨 인터뷰는 ‘민관 합동구조’를 총괄하는 해경의 업무 방식을 비판한 것입니다.

홍씨를 형사처벌하는 게 옳은 것인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도덕적 비판을 할 것과 형사처벌을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2주 뒤 선고입니다. 홍씨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일부 확인됐습니다.

 

 

2014년 4월18일 아침 6시17분 종합편성채널(종편) <엠비엔>(MBN)이 진도 팽목항 현지에서 홍가혜(26)씨의 인터뷰 내용을 생방송으로 전했다.

 

“해양경찰청에서 지원해준다고 했었던 장비며 인력이며 배며 지금 전혀 안 되고 있고요… 민간 잠수부들의 말들도 다 똑같습니다… 뭔가 사람 소리와 대화도 시도했고 갑판 하나 사이를 그 벽 하나를 두고 신호도 확인했고 대화도 했고 지금 증언들이 다 똑같습니다… 정부 관련된 사람들이 민간 잠수부들한테 한다는 소리가 시간만 대충 때우고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월호 침몰사고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즉각 보도자료를 내어 홍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스포츠·연예매체 <스포츠월드>의 김용호 기자는 “홍씨가 과거 티아라(걸그룹) 화영의 사촌 언니 행세를 했다. 10억대 사기 혐의로 경찰 조사도 받았다. 홍씨는 진도에서 또 거짓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누리꾼은 이 보도를 근거로 홍씨를 ‘허언증 관심병 환자’라고 비난했다.

홍씨는 인터뷰 이틀 뒤인 4월20일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됐다. 해양경찰을 명예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홍씨의 인터뷰는 해프닝처럼 잊혀졌고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홍씨가 했던 주장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무엇이 과장되었을까. 그는 적절한 수위의 처벌과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일까.

 

재판에 나온 민간 잠수사들의 증언

 

홍씨가 4월18일 한 인터뷰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해경이 민간 잠수사들의 입수를 적극 돕지 않거나 막고 있다.

둘째, 민간 잠수사들이 배 안의 생존자와 교신을 했다.

셋째,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민관 합동구조가 잘되도록 정부가 조처해달라.

 

이 중 첫째와 둘째에 해당하는 내용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다. 재판정에서 나온 증언들을 살펴보면, 홍씨의 첫번째 주장은 대체로 근거가 있었다. 다만, 두번째 주장은 사실관계를 엄밀하게 검증하지 않고 방송으로 전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민간 잠수사들은 언론 보도와 달리 정부가 민간 잠수사들에게 비협조적이었음을 재판 과정에서 증언했다. 황아무개(61)씨는 7월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 나왔다. 그는 한국수중환경협회 특수구조봉사단 회장으로서 4월16일부터 팽목항에서 민간 잠수부들의 구조대 지원을 총괄했다.

황씨는 재판정에서 “해양경찰이 민간 잠수부의 입수를 막지는 않았지만 지휘체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보니 다른 곳에 가서 물어보라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대책위원회는 4월18일 ‘해경이 민간 잠수부의 투입을 막고 있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황씨는 “그러한 불만은 팽목항에 있던 사람은 누구나 갖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해경의 명예 훼손했다는 이유로 목포교도소에 3개월여 갇혔다가 보석으로 석방돼 재판받는 홍씨
20일간 독방생활 고통스런 기억, 진실 무엇이었고 처벌 적절했나

민간 잠수부 관련된 발언들은 당사자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 ‘생존자 교신’은 검증 빠진 발언
연예매체들의 무차별 비난 속에 거짓말쟁이 이미지는 확대재생산

 

홍씨의 ‘정부 관계자가 민간 잠수부에게 시간만 때우다 가라고 말했다’는 주장은 이러한 팽목항의 정서에 기반한 것이었다.

민간 구조대원 이아무개씨는 4월17일 밤 10시17분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민간은 (중략) 투입시켜달라 해도, 상황본부에서 자기들도 잠수부 많으니 시간 때우다 가라는 함장. 민간에 구조 협조 요청한 건 가족들 보여주기식이겠지”라고 글을 썼다.

 

이씨는 17일 오후 사고 해역으로 직접 배를 몰고 간 민간 구조대원이었다. 민간 잠수부들이 당시 완도해경 278함 쪽과 나눈 교신 기록을 살펴보면, 민간 잠수부들이 278함 쪽에 지원을 요청하자 278함은 “(민간 잠수부들이 해경과) 합류는 불가하고 자체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민간 잠수부들은 “현재 날씨도 매우 안 좋고, 기름도 떨어져 가고, 부식도 떨어져 가는데 우린 어찌하나요?”라고 다시 물었고, 278함은 “저희가 도와드릴 것도 없고, 사고 현장 주변을 둘러보고 알아서 자체적으로 수색하십시오”라고 설명했다.

 

해경이 ‘시간만 때우다 돌아가라’는 말을 직접 하지는 않았으나, 민간 구조대원들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정황이었다.

이씨는 이날 해경의 태도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홍씨의 인터뷰는 이씨의 이러한 경험을 전해 듣고 한 것이었다. 이후 언론들도 “민간업체 언딘이 수색을 독점해 민간 잠수사 투입이 제지됐다”는 의혹을 전했다.

 

홍씨의 인터뷰 중 또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민간 잠수부들이 세월호 안의 생존자와 대화를 했다’는 주장이다.

7월25일 재판정에 출석한 민간 잠수사 백아무개씨는 “(생존자와 대화 관련) 그런 이야기가 팽목항에 많이 떠돌았다. 말이 안 된다고 정리되었던 이야기였다. 홍가혜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족인 박아무개씨는 9월2일 재판정에 출석해 “(생존자와 대화 관련) 이야기를 4월17일 새벽 들었다. 저의 동서가 두번째로 나가는 배를 타고 갔다가 선내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며 돌아와서 이야기해주었다. (중략) 그래서 누가 어떻게 확인하였는지 물었더니 ‘잠수부가 내려가서 망치로 두드리니까 안에서 같이 두드리며 신호를 해주어서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하였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들이 홍씨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정황상 민간 잠수사들에 관한 이야기 등 근거가 있었던 부분도 있지만, 생존자와의 교신 같은 경우 정확한 사실을 언론에 공개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팽목항에서 떠돌던 확인 안 되는 소문들을 언론에 폭로한 것이 옳았는지는 비판적 평가가 필요하다. 홍씨 쪽은 없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폭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재판부에 강조하고 있다. ‘경솔한 행동에 대한 비판’과 ‘형사처벌’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홍씨 변호인 쪽의 입장이다.

 

‘티아라 사촌언니’ 사칭 발언의 진실

 

홍씨와 달리 경찰은 얼마나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홍씨를 구속한 것일까. 경찰의 수사 내용 역시 이곳저곳에서 수집한 소문과 전언에 불과했다.

 

청와대 모 사회안전비서관은 홍씨 인터뷰 직후 해경에 전화를 걸어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해경은 4월18일 저녁 9시께 김용호 기자와 통화해, 김 기자로부터 ‘홍가혜는 티아라 화영의 사촌 언니를 사칭하고, 야구선수 ㅈ씨의 애인이라고 사칭했다’는 설명을 듣고 통화 내용을 수사자료에 첨부했다. 홍씨가 인터뷰 직후 남긴 것처럼 보이는 “(엠비엔 인터뷰로 유명해져서) 나 이러다 영화배우 되는 거 아닌가 몰라”라고 쓴 트위터 글도 첨부했다.

 

그러나 김용호 기자의 주장 중 “홍가혜가 티아라 화영의 사촌 언니라고 사칭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홍씨는 여러 차례 ‘화영의 사촌 언니가 아니다’라고 트위터로 밝혔지만(2012년 8월5일 등), 연예매체들이 홍씨를 티아라 화영의 사촌 언니라고 계속 보도했을 뿐이다.

 

김 기자가 근무하는 스포츠월드 연예팀은 4월23일 ‘홍가혜가 기자를 사칭해 아이돌그룹 B1A4 콘서트장에 들어가 이들과 사진을 찍었다’는 내용의 인터넷 커뮤니티 글을 보도했다.

그러나 B1A4 소속사는 재판부에 ‘홍가혜씨는 연예부 기자를 사칭한 것이 아니라, B1A4 쪽 지인과 함께 와서 사진을 찍었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제출했다.

<한겨레>는 야구선수 ㅈ씨의 측근으로부터 “ㅈ씨가 홍가혜와 애인 사이였던 것은 맞다”는 증언을 들었다.

 

김 기자는 검찰이 홍씨를 기소하는 데 주요 참고인으로 8월12일 재판정에 출석했다. 김 기자는 자신의 주장은 “‘야구계 후배’와 ‘티아라 소속사 홍보실’의 설명에 근거한 것으로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김 기자는 홍씨를 거짓말쟁이로 몬 주요 근거였던 ‘사기 혐의 경찰 조사’와 관련해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은 몰랐다”고 말했다.

홍씨 쪽은 ‘김 기자가 악의적으로 홍씨와 관련해 허위 주장을 해왔다’고 강조하고 있다.

‘영화배우 되는 거 아닌가 몰라’ 글은 홍씨가 쓴 게 아니라 홍씨를 사칭한 누리꾼의 장난이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4월18일 오전 해경은 자체 조사 끝에 홍씨의 말이 허위라는 취지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러나 김재인 당시 해경 정책홍보계장은 같은 날 전남지방경찰청에 출석해 보도자료를 낸 경위를 설명하면서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 “그런 사실(홍가혜 주장)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정도의 의견만을 밝혔다.

 

홍씨의 선고 공판은 다음달 9일 예정돼 있다.

홍씨의 발언이 비록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우리 형법 307조(명예훼손 처벌 조항)는 허위 사실을 적시하건, 사실을 적시하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애초부터 누군가를 비방할 목적으로 어떤 주장을 공개적으로 했다면 처벌할 수 있다.

 

홍씨가 어떤 판결을 받을지는 불투명하다. 홍씨가 인터뷰할 당시 자신이 한 주장을 사실로 믿었는지 여부와 애초부터 해경의 명예를 훼손할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여부를 재판부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홍씨의 변호를 맡은 양홍석 변호사(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운영위원·법무법인 이공)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정부 정책이나 공무원의 업무와 관련한 지적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 일반 시민이 정부 정책을 비판할 때 설사 그 내용에 좀 문제가 있더라도 이것을 명예훼손으로 처벌한다면 정부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시민은 아무도 없게 된다. ‘잘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내 이름으로 사회생활 불가능할 정도’

 

<한겨레>는 지난 18일 홍씨를 만났다. 홍씨는 목포교도소에 3개월여 갇혀 있다가 7월31일 보석으로 석방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교도소 생활을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20여일간 독방에 수감됐는데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독방 생활이 가장 힘들었다고 홍씨는 말했다. 가위에 눌리거나 악몽을 꾸다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 소리를 지르거나 울었던 순간을 그는 “거대한 폭풍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었다”고 기억했다.

 

홍씨는 ‘왜 소문을 충분히 검증한 뒤 인터뷰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현장의 해경에게 여러 차례 확인을 했지만 아무도 확인해주려 하지 않았다. 해경을 믿을 수 없었다. 팽목항 현장에서는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방송에서 밝혀도 문제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해경의 명예를 훼손하려 한 것이 아니라, 민간 잠수사 중 입수한 사람은 2~3명뿐인데, 언론에 500명이 투입됐다고 나오는 등, 사실과 다른 부분을 국민에게 알리고 민관 합동 구조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해경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있었다면, 진도로 출발하기 전 ‘지금은 정부 비난보다 구조에 집중할 때’라고 에스엔에스에 글을 왜 썼겠나”라고 주장했다.

 

홍씨는 공식 잠수자격증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5년간 50번도 넘는 잠수 경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잠수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진도로 갔다. 민간 구조대원 모집 글에 특별히 잠수자격증 종류가 명시돼 있지 않았다. 내가 무식해서 용감했을 뿐이다. 또 설사 잠수를 안 하더라도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홍씨는 4월18일 인터뷰 직후 잠적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홍씨는 19일 저녁 7시23분 전남지방경찰청 지능팀 형사에게 ‘월요일(4월21일) 오후 4시 전에 출석하겠습니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홍씨는 약속시각보다 이른 20일 경찰에 자진 출석했다. 홍씨는 “경찰이 왜 언론에 내가 잠적 상태라고 설명하고,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홍씨는 사건 초기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했다. 그는 “검찰 수사관이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교도소 계장에게 물어보니 ‘검찰이 선처해줄 생각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때는 변호사도 없어서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잘못했다는 반성문을 왜 써야 하는지 속상해 많이 울었다”고 주장했다.

 

홍씨는 고등학생 때 자살을 기도한 이모가 늑장 출동한 구급대원들 탓에 숨졌다고 주장했다. 해경의 부실한 구조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아이들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불행했던 기억이 떠올라 진도에서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홍씨는 석방된 뒤 자신을 비난하는 보도들과 누리꾼의 댓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목을 매는 등 수차례 자살을 기도했다가 가족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는 최근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홍씨는 김용호 기자 등 자신에 대해 허위 사실을 주장한 언론과 누리꾼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홍가혜라는 이름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홍씨는 자신이 잘못한 것은 “현장에서 들었던 내용을 우회적으로 전하지 않고 가감 없이 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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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사 이광욱…바다에서 자라 바다로 돌아가다

 

 

 

숨진 이광욱씨가 스물세살이던 1984년 잠수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사진. 이씨는 잠수사였던 아버지 이진호씨에게서 어려서부터 잠수를 배웠다. 이승철씨 제공

[토요판] 잊지 않겠습니다

▶ 세월호 사건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도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월호 구조 작업을 돕다 지난 5월 초 숨진 이광욱(당시 53) 잠수사도 그중 한명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이씨가 숨진 뒤 7개월이 지난 이달 16일 이씨를 의사자로 지정했습니다. <한겨레>가 이씨의 동생을 만나 형에 대한 추억을 다시 청해 들었습니다. 목적은,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의로운 잠수부들이 세월호 구조 작업을 도왔다. 숨진 이광욱(53)씨도 그중 한명이다. 잠수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바다에서 산 남자였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역사는 길지 않다. 1860년대 초 프랑스의 기술자가 처음으로 원시적인 산소통을 개발했다. 물이 넘친 탄광에서 사람들이 탈출하는 것을 도우려는 용도였다. 프랑스 해군이 1894년 이 기술을 군사장비로 채택해 세계 최초로 잠수장비를 개발했다.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술 개발이 진행됐다. 1946년 프랑스의 과학자 자크 쿠스토와 에밀 가냥이 기술을 발전시켜 현대적 잠수장비를 개발해 특허를 냈다. ‘아쿠아렁’(애퀄렁. 물속의 폐)이라는 영어 이름을 붙였다. 1931년생인 광욱씨의 아버지 이진호씨는 군에서 이 기술을 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49년 3월 해군에 병사로 입대해 1960년 상사로 제대했다. 기관실, 소해정 근무 등을 두루 거쳤다. 소해정은 적이 설치한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씨는 이 당시 잠수기술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가족사는 한국의 잠수사 역사

 

아들처럼 아버지도 자주 의로운 일에 나섰다. 1960년 제대한 뒤 수중공사 작업을 많이 수주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16일치 6면에 이진호씨의 기사가 실려 있다.

“‘한강변의 독수리’로 통하는 ‘프로그·맨’ 이진호(서울 성수동 1가)씨는 금년에 천직처럼 여겨오던 익사자 구조작업을 마치고 노변에서 소일하고 있다. 금년 여름에는 10여구의 실종 익사체를 인양했고 40여명을 익사 직전에 구출해냈다. 이씨는 해군 ‘유디티(수중폭파부대)’에서 ‘스킨 다이버’(등에 산소통을 메고 발에는 오리발을 신은 잠수부)로 맹활약하다가 3년 전에 제대-그동안 한강변에서 80여구의 실종 익사체를 인양했고 2백여명을 수마로부터 구해냈다.”

기자가 오류를 저질렀다. 스킨 다이빙은 간단한 호흡장치인 스노클과 오리발(핀)만 착용하고 수면이나 얕은 수심에서 잠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산소통을 메고 잠수하는 것을 스쿠버 다이빙이라 부른다. ‘스쿠버’(SCUBA)라는 용어 자체가 ‘자급식 수중호흡장비’(Self-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paratus)라는 영어 단어의 두문자이다. 아쿠아렁 개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스쿠버 다이빙 기술이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1959년 ‘잠수교관연합’(NAUI)이 만들어졌다. 미국인 다이버가 1966년 또 다른 단체인 ‘전문잠수교관연합’(PADI)을 만들었다. 패디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잠수단체다. 18m까지 잠수가 가능한 ‘오픈워터 다이버’ 등 잠수 가능 수심별로 자격증을 세분했다. 한국에도 여러개의 민간잠수단체가 있다.

 

세월호 구조 작업에 참여
5월6일 작업 도중 숨져
장례식장에 총리도 왔지만
숨지고 7개월 지난 뒤인
지난 16일 의사자 인정

해군부대에서 잠수기술 배운
잠수 1세대 이진호씨의 아들
아버지 손잡고 배운 잠수
바다에서 자랐고 일했다
민간잠수사 지원 필요 목소리

 

현대적 잠수기술이 최근에야 안착된 점에 견줘 보면, 이씨는 매우 일찍 선진 잠수기술을 습득했다고 볼 수 있다. 보도를 보면, 이씨는 겨울에도 산소통 등 잠수장비를 활용해 얼음 밑에서 잉어들을 수십마리씩 잡았다. 잠깐씩 제주도 바다에서도 잠수했다. “이씨는 작년 겨울에 시험삼아 잉어잡이를 해보았는데 하루 평균 20마리씩은 잡았는데 장비만 좋으면 하루에 50마리 정도는 거뜬히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같은 보도) 이씨는 군에서 훈련받은 200여명의 잠수부들이 있는데 국가가 이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1963년 8월10일치 7면을 보면, 이씨는 광나루유원지 강물 바닥에 포탄 100여개가 있는 것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이씨는 ‘한국잠수협회’(KUDA) 창설 회원 가운데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광욱씨 동생 이승철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러므로 광욱씨에게는 바다와 물이 흙밭이었다. 지난 23일 광욱씨의 동생 이승철(49)씨가 <한겨레>에 한 설명을 종합하면, 광욱씨는 1961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태어났다. 이진호씨는 바다를 좇아 살았다. 자연스레 두 아들 광욱, 승철씨도 전국을 모험했다. 조안면에서 태어난 광욱씨는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남양주→서울’ 등으로 이사 다녔다.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군 복무를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에서 한 것을 빼면, 광욱씨는 내내 물에서 자라고 살았다. 승철씨와 광욱씨 둘 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3~4학년 무렵 처음 잠수를 배웠다. 자연스럽게 자격증을 따고 천직처럼 아버지의 수중 공사 작업을 도왔다. 이진호씨가 2001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광욱씨와 승철씨는 계속 잠수했다. 사진 속 검은 잠수복을 입은 20대의 광욱씨는 눈코입매가 뚜렷한 미남자다. 승철씨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2000년대 초반 잠수일을 떠났다. 서울 노원구에서 횟집을 운영해왔다. 형도 잠수 작업을 하면서 작은 횟집을 운영했다. 형은 자주 동생의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세월호 사건 뒤 제 식당에서 소주 한잔하면서 세월호 관련 티브이 뉴스를 볼 때면 우셨어요. 너무 마음 아프다고. 형이 ‘저렇게 구조하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한겨레>가 지난 23일 오후 남양주시청에서 동생 승철씨를 만났다. “저는 형이 진도에 내려간 줄도 몰랐습니다. 5월4일에 제 횟집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께만 ‘진도 내려간다’고 말씀하셨더군요. 저는 해경에서 6일 아침 8시께 형이 숨졌다는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둘째 조카 친구가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 그러더라고요.”

 

미루고 미뤄진 끝에 받은 ‘의사자 판정’

 

광욱씨는 민간 잠수 관련 단체의 요청으로 5월5일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갔다. 5일 오전 바지선에 올랐다. 안전교육을 받고 이튿날 아침 6시께 잠수했다. 바지선에서 세월호 5층 로비까지 줄(가이드라인)을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11분 뒤인 6시17분 교신이 끊겼다. 바지선 위에선 이씨의 호흡이 정상이 아님을 알아채고 다른 잠수사를 내려보냈다. 이씨의 잠수 마스크에 연결된 공기 호스가 가이드라인에 엉켜 있었다. 급히 인근 목포한국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광욱씨의 사체검안서를 보면 사인은 ‘기뇌증’이었다. ‘외상, 감염, 압력 차 등으로 인해 뇌 안에 공기가 들어간 증상’을 말한다. 잠수부들이 흔히 걸리는 질병이 아니므로 진짜 사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승철씨는 부인, 어머니 장춘자(73), 23살인 첫째 조카와 함께 6일 오후 3시께 목포한국병원에 도착했다. 형의 주검을 확인했다. 어머니와 논의해 부검은 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자들만 많이 있었다. 오도카니 기다렸다. 저녁 8시께 안전행정부와 보건복지부 직원이 찾아와 ‘의사자’ 제도 등 법적·제도적 절차를 안내했다. 6~10일 남양주 진건읍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정홍원 국무총리 등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이 많이 다녀갔다. 약속했던 의사상자 지정은 많이 늦어졌다. 남양주시(시장 이석우)가 5월 말 보건복지부에 의사자 신청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5월19일 세월호 참사 대국민담화에서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생업을 제쳐놓고 달려오신 어업인들과 민간 잠수사들, 각계의 자발적인 기부와 현장을 찾아주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계셨습니다… 민간 잠수사 고 이광욱님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사는 계속 미뤄졌다. 정부의 태도에 실망한 승철씨는 10월 초 청와대 누리집에 민원을 넣었다. 보건복지부는 광욱씨가 숨진 뒤 7개월 만인 이달 16일 광욱씨를 의사자로 인정했다. 5월30일 세월호 선박 절단작업 중 숨진 이민섭 잠수사는 절단작업이 위탁계약에 따른 ‘직무’로 판단돼 의사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직무 외의 행위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과 그 유족 또는 가족’으로 지원 대상을 규정하고 있다. 국회 세월호국정조사특위의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은 지난 7월, 군·경·민간 잠수사 등 세월호 잠수사 434명 가운데 45명(10%)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우울감, 스트레스, 자살사고 등을 겪는 ‘위험군’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에 대한 지원과 보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23살과 17살인 남은 두 아들은 법이 지원하는 일부 지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큰 지원군인 아버지는 숨지고 없다. 오래전에 이혼해 따로 사는 어머니가 있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의로운 일을 하다 숨진 남자라는 기억이 오래갈 것이다. 동생 승철씨가 형이 운영하던 횟집도 같이 운영해야 한다. 승철씨는 “앞으로 유사한 의사상자가 나올 경우, 정부가 알아서 먼저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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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벨의 이면, 투사로 추앙받거나 사기꾼으로 폄하되거나

 

 

 

지난 4월28일 오후 알파잠수기술공사의 다이빙벨이 사고 해역에 투입되기에 앞서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점검을 받고있다. 이에 앞서 정부는 유족과의 면담 자리에서 다이빙벨 투입을 약속했다. 진도/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토요판] 뉴스분석 왜?

▶ 잠수보조장비 ‘다이빙벨’은 세월호 사고 구조작업 내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존자를 살려내는 마지막 희망으로 떠올랐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나친 희망으로 혹세무민하는 고철 덩어리로 여겨졌습니다. 과도한 옹호와 과도한 비난. 두 가지 시각이 갈수록 극단화되면서, 다이빙벨은 갖가지 정치적 입장과 음모론, 믿음과 폄훼, 열정과 냉소가 뒤범벅된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때 우리는 다이빙벨을 차분하게 바라봤을까요?

 

지난 16일 낮 12시30분, 서울 광화문의 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 관객들이 하나둘 입장했다. 두툼한 파카를 입은 10대 넷이 일찌감치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40대 아주머니 서넛, 30대 커플 등 관객은 모두 17명이었다. “국내외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반응”을 소개하는 영화 전단지에서 몇 개의 단어가 눈에 띄었다. 타락, 역사, 무능과 공모, 진실 그리고 힘.

타락-“이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역사-“역사의 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경이로움”, 무능과 공모-“정부의 무능함과 미디어의 공모를 비판하고”, 진실-“배와 함께 침몰해가는 진실을 붙잡기 위해”, 힘-“다이빙벨과 같은 영화에 우리는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다이빙벨 앞에 서 있는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 사진 알파잠수기술공사 제공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와 안해룡 감독이 공동 연출한 <다이빙벨>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잠수장비인 다이빙벨을 둘러싼 논란을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했다. 카메라는 이상호 기자의 발걸음을 따라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의 세 번에 걸친 다이빙벨 투입 시도에 대한 정부의 방해와 직무유기 의혹을 제기한다.

지난 23일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통계를 보면, 10월 개봉 이후 4만7652명이 이 영화를 봤다. 상업영화와 별도로 순위를 매기는 다양성 영화 부문에서 개봉 이후 줄곧 10위권을 유지했다. 이 영화는 스크린 밖에서 더 큰 관심을 불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시가 <다이빙벨>의 상영 취소를 요구했다는 논란이 벌어졌고, <조선일보>는 지난달 20일 ‘다이빙벨 거짓말 계속하며 고3에게 영화보라 선동하는 이상호씨’라는 기사에서 영화를 거짓 선동이라고 비난했다. 지난달 19일 시민단체는 이 영화의 상영을 꺼린다며 멀티플렉스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다이빙벨(잠수종)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용하는 그림이 그려질 정도로 유서 깊은 잠수장비다. 고도의 공학적 설계가 필요한 장비가 아니다. 물 위에서 바가지를 엎으면 상층부에는 대기가 남는 원리를 이용한다. 잠수사들이 수중 탐색 중 다이빙벨에 들어와 맨얼굴로 지상에서 공급되는 공기를 내쉬면서 쉴 수 있다.

 

과도한 기대와 폄훼, 위악적 인터뷰

 

세월호 구조 작업은 악천후와 거센 조류로 중단되기 일쑤였다. <고발뉴스>와 <팩트티브이> 등 시민저널리즘을 중심으로 이종인 대표의 다이빙벨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다이빙벨 투입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정부 발표와 달리 다이빙벨은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들을 꺼낼 수 있는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4월24일 밤은 희망의 절정을 이룬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과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유가족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유가족들은 구조 지체에 대해 거세게 항의를 하면서 다이빙벨 투입을 요구하고, 이상호 기자는 이종인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이어준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은 이 대표에게 “모든 역량과 힘을 합쳐서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주시라고 부탁을 드립니다”라며 다이빙벨 투입을 요청한다. “원하는 대로 제가 가진 거 해서 이번 일 해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하면서 이 대표는 수락한다. “빨리 와주세요” 유가족들이 박수를 친다. 이 드라마틱한 장면은 인터넷 매체와 유튜브 동영상으로 중계된다. 공개적인 정부 허가로 다이빙벨이 생존자 구조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다이빙벨 작업은 그러나 앞선 시도(4월21일 다이빙벨이 사고 해역에 갔으나 해경은 거부했다)와 마찬가지로 순탄치 않았다. 4월25일 다이빙벨을 태운 바지선은 사고 해역에 도착해 구조를 총괄하는 바지선에 고정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4월30일 바지선을 고정하고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이날 오후 수중에 투입됐지만 지상에서 산소를 공급하는 공기줄(에어호스)에 문제가 생기면서 20여분 만에 물 위로 나온다. 5월1일 새벽 3시20분에 다시 투입된 다이빙벨에서 잠수사 세 명은 선체에 접근해 장애가 되는 로프 등을 제거하고 새벽 5시 넘어서 지상에 올라온다. 발견된 실종자는 없었다. 잠수사들은 2차 다이빙을 위해 휴식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자리를 떴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날 오전 언론에 ‘다이빙벨 자진철수’라는 자막이 뜨기 시작한다. 이 대표는 팽목항으로 귀환한다. 이 대표는 일주일 전 유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정부 관료들처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책당한다. 동영상으로 기록된 인터뷰 중 일부를 인용한다.

 

기자: 잠수부들이 50분 동안 수색하고 활동을 했어요. 그래서 선내도 들어갔다고 하셨는데, 현재 와서 실패라고 하는 것은 어떤 부분에서 가정을 하는 겁니까?

이종인: 이 작업 자체가 실종자를 수색해서 모시고 나오는 것이잖아요. 다이빙벨을 쓰든 뭐를 쓰든. 그 결과가 없었기 때문에 이건 실패죠.

……

기자: 그런데도 무리하게 다이빙벨을 들고 오셨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이종인: 제 장비를 써봤으니까.

기자: 단지 그것뿐입니까?

이종인: 써봤으니까. 그 조류에도 할 수 있는 거는 나한테는 증명이 된 거 아니에요.

기자: 그러면 공을 빼앗는 것을 떠나서, 다시 할 수 있다면 도전할 겁니까?

이종인: 다시 도전을 하면, 제가 이렇게 이런 취급을 받고 가족들에게 야단을 맞고 이렇게 할 리가 없죠.

기자: 지금도 다이빙벨이 구조작업에서 가장 월등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이종인: 그래서, 이거 빌려쓰려면 쓰라고 했어요. 그냥 장비니까.

……

기자: 세월호 밑에서 기다리던 실종자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하실 말씀 있으면 해보시죠.

이종인: 죄송합니다.

기자: 왜 죄송하시죠?

이종인: 구한다고 와서 못 구하고 가서… 그게 어떤 이유가 됐든 그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기자: 못 구한다기보다는 안 구하신 거죠.

이종인: 못 구했죠.

기자: 처음부터 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진심으로 얘기해주세요.

이종인: 네, 진심으로.

 

절박함에서 비롯된 기대 그리고 실망.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는 기자와 취재원이라는 관계에 견줘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다이빙벨은 이후 ‘실패’, ‘자진철수’ 등의 수식어와 함께 등장했다. 보수언론은 다이빙벨과 이 대표에 대한 ‘융단폭격’을 시작했다. 열기가 가라앉은 즈음의 어느 날, 이종인 대표를 직접 만나 물었다.

 

“위악적으로 대답한 측면이 있었죠?”

“그래. (해경이 구조작업에) 협조적이었냐 (물으면 나는), 아주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랬지.”

“약간 반어적으로?”

“그래. 반어적으로.”

 

이종인 대표는 자신의 다이빙벨을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사고 해역에 가져갔고 한번의 투입 뒤에 ‘자진철수’했다는 비판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해군의 요청을 받고 사고 해역에서 철수했으며, 팽목항에 도착해서는 유가족들로부터 실종자 수습에 실패했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5월1일) 1차 다이빙 끝내고 2차 다이빙을 준비하고 있을 때야. 잠수사가 없으니까 몸 안에 잔류 질소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든. 오전 10시께 (바지선 위의) 컨테이너에 누워 있는데 누가 찾아왔대. 해군 소장이 와 있더라고. 그러더니 ‘배 좀 빼주셔야 하겠네요, 우리 작업해야 하니까’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렇잖아도 내가 뺄라고 그랬다. 알았다’고.”

 

철수 요청을 한 해군 소장은 범정부사고대책본부에서 탐색구조단장을 맡은 김판규 해군 인사참모부장이었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김판규 소장은 이런 사실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24일 답변서를 보내왔다. 김 소장은 “알파잠수 작업실에서 이종인씨에게 향후 추가 작업 계획에 대해 문의했었고 곧 철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이에 “김 소장이 먼저 문의하지 않았다. 그게 대화의 전부였다”며 엇갈린 입장을 보였다.

 

정부는 다이빙벨이 편치 않았다
천신만고 끝 사고해역 투입됐지만
해경 경비정은 와서 부딪혔고
생명줄 ‘에어호스’는 찢어졌다
거대한 음모인가, 괜한 의심인가

바다는 다이빙벨한테도 공평하다
안에 있어도 감압 시간 줄지 않아
잠수사 부족해 계속 투입 못했지만
보수언론이 ‘사기꾼’ 딱지 붙이니
과도한 ‘정의의 투사’ 되어버렸다

 

 

에어호스는 왜 파손됐나

 

다이빙벨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다이빙벨 투입 과정에서 해경의 조직적인 방해가 있었는가.

둘째, 다이빙벨은 세월호 구조 현장에 꼭 투입해야 했던 장비였는가.

 

첫째 쟁점에 관해 영화 <다이빙벨>은 해경의 조직적인 방해 의혹에 무게를 싣는다. 작업 중인 다이빙벨 작업 바지선에 해경 경비정이 접안하면서 부딪힌 사건, 다이빙벨 작업 도중 잠수사의 에어호스가 파손된 점, 김판규 해군 소장의 최종 철수 요청 등을 보여주면서 조직적인 방해가 있음을 암시한다.

 

정부는 다이빙벨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비정 충돌 사건에 대해서, 해경 관계자는 당시 브리핑에서 “우리가 주의했어야 하는 건 사실”이라며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고의성에 대해선 부인했다.

 

에어호스 파손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잠수사들이 수중에서 산소를 공급받는 거의 유일한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파손 사고 당시 한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풍랑 때문에 밀려서 끼여 (파손되어) 나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반대로 제3자에 의한 인위적인 파손 가능성을 제기했다.

에어호스에 대해 이 대표에게 물었다.

“그건 미스터리야.”

“예전에 인터뷰 때 하신 말씀은….”

“거기선 그렇게 얘기했지. (전국민적 구조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근데 와이어에 씹혀서는 그렇게 되질 않아. 누가 엿먹인 거지. 호스가 씹혔다면 (어느 정도) 남아 있어야잖아. 이 호스의 사용압력이 120㎏이야.”

 

세월호 참사를 담은 첫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당시 해경과 구조팀이 ‘다이빙벨 작업’을 반기지 않았음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수색 작업의 더딘 속도에 대해 전국민적인 비판이 쏟아졌고, 일부에선 그 원인을 다이빙벨의 부재로 투사하고 있었다. 당시 범정부대책본부의 한 관계자는 “급박하게 이뤄지는 수색 작업에 지장을 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일부 가족들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다이빙벨 작업을 방해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르다. 영화 <다이빙벨>도 음모의 기반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성상민 평론가는 이 영화를 “주장이 근거가 되는 순환논증에 빠진 문제적 다큐”라고 규정하면서 “시종일관 두 사람의 입을 통해 다이빙벨의 가능성과 실패한 것에 대한 음모론을 말하지만, 정말 입으로 말하는 것에 그칠 뿐, 심층적인 분석과 입증을 하지 않는다”(<미디어스> 10월17일)고 비판한다.

 

둘째, 과연 다이빙벨이 세월호 구조에 필수적 장비였는지, 정규 투입됐다면 성과를 얻었을지 여부다.

세월호 구조 작업에선 ‘스쿠버 잠수’와 ‘표면호흡식 잠수’ 등 두 가지 잠수 방식이 사용됐다. 스쿠버 잠수는 잠수사가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는 방식이고, 표면호흡식은 지상의 바지선에서 에어호스를 통해 잠수사에게 산소를 공급한다.

 

다이빙벨 등 잠수사들이 물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치는 애초부터 고려되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이 대표의 다이빙벨 투입을 ‘실패’라고 단정했지만, 해경에서 장비기술을 담당했던 고명석 당시 범정부사고대책본부 대변인(현 국민안전처 대변인)조차도 23일 그런 단정에 반대했다.

“실패냐 성공이냐는 판단하기 곤란하죠. (잠수부가 교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기간을 두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바다는 주는 만큼 받아간다. 바닷속에서 오래 머물수록 잠수사는 육지에 올라와 오래 쉬어야 한다. 잠수 중에 쌓이는 몸 안의 질소를 빼내기 위해서다.

지상에 오른 잠수사는 잠수 시간에 따라 ‘감압체임버’에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맨몸으로 가이드라인(지상의 바지선과 수중의 세월호 선체를 연결한 로프)을 잡고 규정된 수심에서 여러 차례 머물면서 ‘아주 천천히’ 수면 위로 상승해야 한다.

 

다이빙벨은 이 과정에서 효율적인 감압이나 작업 도중 휴식 목적으로 설치될 수 있다. 다이빙벨에 머문다고 해서 감압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생존자도 감압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세월호에서 생존자가 발견될 경우, 2인1조의 구조팀이 내려가 생존자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운 뒤 데리고 올라와, 지상의 감압체임버에 넣는 방식을 계획했었다. 결국 핵심은 잠수사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교체함으로써 작업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이 대표가 투입한 다이빙벨은 두 시간 남짓 임무를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와야만 했다. 이유는 수중에서 ‘바통 터치’를 해줄 잠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이빙벨의 효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렸다. 그러나 구조 실패의 원인을 ‘다이빙벨의 부재’로 환원하는 이는 없었다.

‘다이빙벨의 장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종인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물속에서 가장 큰 문제는 조류와 추위입니다.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건 다이빙벨밖에 없습니다. 피로가 없으니까 잠수사에게 안전합니다.”

 

반면 심경보 동부산대 해양산업잠수과 교수는 22일 “바닷속에서 최소한의 감압만 하고 지상에 올라와 감압하는 게 빠르고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좋은 다이빙벨이 복수 투입된다면요?”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여러 대를 동시 운영하려면) 시야도 잘 나오고 조류도 미미해야 해요.”

 

소통부재와 불신을 투영하는 전장으로

 

애초에 복수의 다이빙벨과 이를 체계적으로 배치하는 역량, 본질적으로는 크루즈급 선박이 침몰하는 와중에 구조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인력, 장비, 전략은 부족했다. 해군 소유의 다이빙벨은 심해용이라면서 정부는 투입에 부정적이었다. 고명석 당시 대변인이 말했다.

 

“하루에도 희생자가 30여명 넘게 수습되고, 정돈이 안 된 상태였습니다. 사실 다이빙벨 세팅하고 그럴 여유 없었습니다. 설치하고 조류 맞추다 보면 며칠 흘러갈지도 모르죠. 살아 있는 사람 있으면 빨리 구하자, 맨몸으로라도 스쿠버 잠수 빨리 보내야지, 그런 생각밖에 없었죠.”

 

200여명의 아이들이 수장되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는 이 거대한 재난의 가시화되지 않은 주범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유가족들도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와 제도권 언론 등 주류 체제에서 외면받으면서, 동시에 세월호 사고를 잉태한 그런 주류에 대한 불신이 팽창하면서, 다이빙벨은 ‘거짓의 체제’를 깨뜨리고 ‘진실의 문’을 여는 열쇠로 떠올랐다.

과도하게 옹호하거나 폄훼하는 입장으로 양극화됐고, 이른바 ‘다이빙벨론자’들은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 추앙받거나 반대로 사기꾼으로 폄하됐다.

다이빙벨이 점차 세월호 구조 실패의 한 상징물을 넘어서, 정부와 국민, 진영 간의 소통 부재와 불신, 여론의 양극화 등 우리 사회를 투영하는 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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