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헌재 결정 그리고 지성의 공백
차이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없다.
플러스 부호만으로는 수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되지 않듯이, 자본가만 있는 세상에서는 시장이 존재할 수 없다.
지배계급만으로는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 마이너스 부호, 노동자, 국민이 있음으로써 수학과 시장, 정부가 존재한다.
자연도 차이가 있음으로써 존재한다.
암컷과 수컷, 동물과 식물, 시간과 공간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다.
차이는 세상의 존재 양식이다. 차이와 공존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차이가 없으면 공존도 없고, 공존은 차이를 전제로 할 때 성립된다.
무지개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다양성과 조화 때문이다.
한 가지 이념으로 통일된 공동체는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더위와 추위가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지역에서 문명이 더 융성한 것도 같은 이치다.
차이를 차별로 둔갑시키는 순간 공동체의 평화와 안정은 파괴된다. 유대인 학살과 5·18은 인종과 지역의 차이를 차별로 둔갑시켜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사건이다.
‘동쪽이 있음으로써 서쪽이 있고, 같은 인체 내에 있는 간과 쓸개도 다르다는 입장에서 보면 그 간격이 구만리다.’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다리가 짧은 오리가 학에게 다리를 자르라고 요구하면 공존은 불가능해진다.
잡초가 거슬린다고 모조리 뽑아버리면 식물도 온전하게 성장할 수 없다.
광활한 옥수수 밭을 기름지게 하는 것은 개량된 옥수수 종자가 아니라 도꼬마리와 쇠비름 같은 잡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식물들 때문에 흔히 표면의 흙은 영양분이 결핍되기가 쉽다.
이때 잡초들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그곳의 영양분을 힘껏 빨아올리고, 이를 다른 식물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제초제 과다사용으로 망가진 과수원이나 논밭을 다시 살리는 것도 바로 잡초다. 잡초가 없었더라면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목초 지역은 불모지가 되었을 것이다. 박주가리, 엉겅퀴, 덤불, 돼지풀 같은 잡초가 있었기에 미국의 평원은 푸른 목초로 덮여 있는 것이다.
식량을 생산하는 미국 목초지의 토양이 나빠진 주요인은, 자연이 내린 토양 개량 식물인 잡초와 야생초를 무자비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조지프 코캐너, <잡초의 재발견>)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식량위기는 공존을 거부한 인류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길을 내고, 수로를 만들어 이민족과 공존하는 정책을 선택한 로마는 세계의 제국이 됐고,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얼씬도 못하게 한 중국 왕조들은 그들만의 제국밖에 만들지 못했다.
메기는 미꾸라지의 천적이다. 그런데 미꾸라지 양식장에는 항상 메기를 풀어놓는다. 메기가 없으면 미꾸라지가 힘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메기가 있어야 미꾸라지는 놀다가도 잽싸게 진흙 속으로 몸을 처박아 튼튼해지는 법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가장 아름다운 화음은 차이 나는 것들로부터 나온다. 차이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들이 교실에서 왕따를 만든다. 차이에 익숙하지 못한 권력은 소통 대신 배제를 택한다.
헌법재판소의 진보정당 해산 결정은, 차이 나는 것들의 공존방정식을 찾아나간다는, 정치의 본질적 역할을 부정한 퇴행적 결정이다. 이번 결정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30년 뒤로 후퇴했다.
책임의 소재는 진영이 아니라 지성의 몰역사성에 있다.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 집단최면에 빠진 지성들의 공동 책임이다.
독일의 전체주의를 탄생시킨 것은 히틀러도 괴벨스도 아닌 지성의 공백이었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지성의 회복에 달려 있다.
박영규 중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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