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역사를 되돌리지 말라

道雨 2015. 1. 14. 12:36

 

 

                역사를 되돌리지 말라

 

 

 

새해 첫날 <한겨레>가 주관한 새해맞이 일출 행사를 위해, 얼굴을 때리는 세찬 눈보라를 뚫고 일행들과 함께 다랑쉬오름에 올랐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잿빛 구름 사이로 여명이 밝아오면서 밤새 내린 눈의 바다에 펼쳐진 오름 군락이 자태를 드러냈다.

 

다랑쉬오름을 택한 이유는 대설로 한라산 등산이 전면 통제된 것도 있었지만, 4·3의 상징과도 같은 오름이기 때문이었다.

1992년 4월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4·3 희생자 11명의 유골을 취재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기어들어가야 하는 조그마한 굴 안에서 유골을 만난 것은 충격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희생자들의 눈물이었다.

희생자들은 1948년 12월18일 토벌대에 발각돼 집단학살된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들이었다.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었고, 굴속의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돼 죽어갔다. 그 가운데는 7살 어린아이도 있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금기시되던 4·3문제 해결은 더디지만 진전돼왔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제주4·3특별법이 2000년 초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국무총리 산하 제주4·3위원회는 2002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9차례에 걸쳐 희생자 심사를 벌여 1만4311명의 희생자를 결정했다. 희생자로 결정되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희생자 위패를 봉안할 수 있고, 유족들은 언제든지 위패봉안소를 찾을 수 있다.

 

다랑쉬오름에 오른 지 10여일이 지난 지금, 4·3 유족들을 들쑤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 고위 관리의 입에서 희생자 재심사 발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제주도를 방문한 정재근 행정자치부 차관이 4·3유족회 간부들과의 오찬간담회 자리에서 “4·3추념일에 대통령께서 참석하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자 재심사와 위패 문제를 꺼냈다. 대통령이 참석하려면 보수단체들이 문제 삼고 있는 위패들은 재심사를 통해 정리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정 차관의 발언은 4·3특별법 제정을 부정해온 일부 보수단체들이 희생자 재심사를 통해 ‘주동자’들의 위패를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희생자 재심사를 해서 문제가 있으면 위패를 철거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상처를 끄집어내 부관참시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제주4·3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은 12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4·3 희생자 재심사 착수 운운한 정 차관의 발언은 4·3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을 우롱하는 반역사적 발언이자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몰상식한 행태”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새정치민주연합만이 아니라 새누리당 제주도당도 재심사를 반대하고 나섰다. 정종학 새누리당 도당위원장은 “화해하고 상생하려는데 왜 자꾸 소금을 뿌려대느냐”고 비판했다.

 

4·3문제 해결의 대원칙은 화해와 상생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화해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취지다. 이 때문에 군경 토벌대로 참여한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사과를 한 적은 없지만, 피해자들은 가해자 처벌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적도 없다.

 

제주4·3위원회에는 국무총리를 포함해 7명의 장관이 위원으로 들어가 있다. 심사소위원회에서 희생자를 심사하면 전체회의에서 희생자를 최종 결정하게 된다.

희생자 재심사는 국가 차원의 결정을 부인하는 행태다. 대통령이 과거 국가폭력행위로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된 곳을 찾아 추념하는 것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14일에는 심사소위원회가 열린다. 재심사 여부가 의제로 거론될 예정이다.

어두컴컴한 다랑쉬굴 속에서 죽어간 섬사람들, 그들이 앞마당처럼 다녔던 다랑쉬오름은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역사를 되돌리지 말라.

 

허호준 사회2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