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관련

천안함 1,2심을 통털어 진실 그 이상을 토해낸 최고의 증인

道雨 2017. 11. 18. 11:01




[천안함 항소심 8차공판]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의 증언 ①
천안함 1,2심을 통털어 진실 그 이상을 토해낸 최고의 증인
신상철 | 2017-11-17 15:55:1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정호원 부사장이 출석하기 까지의 우여곡절


11월 14일 서울고등법원 서관 303호에서 천안함 항소심 제8차 공판이 열렸습니다. 당초 정호원(88수중개발 부사장)과 김용현 병장(후타실 영상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두 명이 출석예정이었으나, 김용현 병장이 불출석하여 정호원 부사장만 단독으로 법정 증원대에 섰습니다.


애초 변호인단이 법정에 출석요구한 것은 88수중개발의 최고경영자인 정성철 대표였으며, 2011년부터 요구를 하였습니다. 정성철 사장은 건강상 이유를 대며 불출석을 거듭함에 따라, 부득이 현장에서 함미 인양작업을 총괄하였던 권만식 현장소장이 법정에 나와 증언대에 선 것이 2012년 1월 9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만식 소장의 증언들은 함미인양시 국방부의 요청에 따라 저수심 지대로 이동하였던 배경과 이후 작업 중 야기된 여러가지 의문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였고, 피고인과 변호인단은 정성철 대표가 출석할 것을 재판부에 다시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철 대표는 계속 불출석한 가운데 그렇게 1심은 종결되었습니다.


항소심 개시 후 새로이 구성된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 주관으로 항소심 증인목록을 작성하면서 정성철 88수중개발 대표를 다시 증인으로 채택하였으나, 정 대표는 항소심에서도 불출석을 지속함에 따라 부득이 정 대표 대신 그의 아들인 정호원 부사장(당시 32세)을 증인으로 대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항소심 제8차 공판의 증언석에 선 정호원 부사장


거듭된 정성철 대표의 불출석과 대신 법정에 나왔던 권만식 소장의 영양가 없는 증언으로, 큰 실망과 함께 정 대표의 아들인 정호원 부사장이 얼마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증언을 하게 될지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었습니다만,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던 것은, 함미 인양당시 언론들과 인터뷰하며 그가 쏟아낸 날카로운 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는 결국 국방부의 요구에 따라 국방부가 바라는대로 작업을 하였고 최대한의 협조를 함으로써, 여느 관련업체들과 같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함께, 그냥 어떤 증언을 하나 물어나 보자고 생각하였던 거지요. 그러나 그 결과는 경천동지할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천안함 재판 거의 끝무렵에서 말이지요.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9802




정호원 부사장의 증언 -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실의 기록’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의 재판후기 기사 첫 단락부터 언급된 <폭발한 배의 상태와 천안함 절단면 등의 손상 상태와 다르다고 증언> 부분만 하더라도, 국방부의 주장 그 중심축 자체를 무너뜨리는 메가톤급 증언이었습니다.

그리고 <함미 절단면의 손상이 무언가의 충격으로 긁힌 것으로 보였으며, 선저의 스크래치에 대해서도 해저에 가라앉은 후 생긴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증언은, 국방부의 ‘폭발’주장을 전면 거부함과 아울러, 그 동안 줄기차게 ‘좌초’주장을 일관한 저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정호원 부사장이 제가 좋아서 그랬을리는 만무합니다. 그는 해군출신이며 인양전문가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실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결국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과 저의 주장은 100%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의 증언가운데 단 한 개도 제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것을 넘어서 그는 그동안 베일에 쌓였거나 의문에 감추어져 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토해내었습니다. 






정호원, “ 선저 스크래치는 해저에 가라앉은 후 생긴 것이라 보기 어렵다


앞으로 열 차례에 걸쳐 재판결과를 분석해 올리겠습니다

88수중개발 정호원 부사장에 대한 피고인측의 질문내용과 함께, 그의 증언에 대하여 그동안 제가 주장하고 기소되었던 내용과 함께, 앞으로 열 차례에 걸쳐 분석글을 올리겠습니다. 그 만큼 정 부사장의 증언은 천안함 사건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에 중요하고, 그 만큼의 용기가 필요했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진실은 잠시 감추어 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진실은 마치 호주머니 속 송곳과 같아서 언젠가는 바지를 뚫고나와 반드시 허벅지를 찌른다고 하지요.

그것이 ‘진실의 힘’입니다.

신상철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3&table=pcc_772&uid=141 








***************************************************************************************





천안함 인양업체 부사장 “폭발한 배와 천안함 다르다” 증언

[항소심공판]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 첫증언, 7년만에 군과 다른 목소리
미디어오늘  | 등록:2017-11-15 13:25:11 | 최종:2017-11-15 13:31:36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천안함 인양업체 부사장 “폭발한 배와 천안함 다르다” 증언
[단독-항소심공판] 정호원 88수중개발 부사장 첫증언, 7년만에 군과 다른 목소리…“선저 긁히거나 부딪힌 흔적…작업자 핸드폰 압수”
(미디어오늘 / 조현호 기자 / 2017-11-15)


7년 여 전 침몰한 천안함 함미를 인양했던 업체의 부사장이, 폭발한 배의 상태와 천안함 절단면 등의 손상 상태와 다르다고 증언했다. 또한 함미 절단면의 손상이 무언가의 충격으로 긁힌 것으로 보였으며, 선저의 스크래치에 대해서도 해저에 가라앉은 후 생긴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그동안 수중폭발이었다는 해군과 합조단의 주장과, 실제 현장에서 작업했던 이들의 시각은 크게 다른 것으로, 법정에서 7년 여 만에 처음 확인됐다.


2010년 4월초부터 4월15일 천안함 함미를 인양할때까지 작업을 했던 88수중개발의 부사장을 맡고 있는 정호원씨는 14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윤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위원의 명예훼손 항소심 재판에 출석해 이같이 증언했다.

정 부사장은 당시 모두 30여 명의 88수중개발 작업인원이 백령도로 투입됐으며, 본인은 부산의 본사에서 현장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정 부사장은 천안함 손상상태와 폭발로 인한 선박의 손상상태에 대해 다르다고 밝혔다. 실제로 정 부사장은 지난 2012년 유증기 폭발사고가 났던 두라3호의 시신 인양 및 수습을 했다고 말했다.

정 부사장은 폭발로 크게 손상된 두라 3호의 사진(장면)을 제시하며 ‘날카롭다는 것이 저런 것이냐’는 피고인 신상철 전 위원의 신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이것이 천안함과 같은가라는 신문에 정 부사장은 “다릅니다”라고 밝혔다.


폭발한 배와 천안함이 어떤 면에서 다른지에 대해 정 부사장은 “제가 폭발전문가가 아니라 분석을 못해 (폭발전문가로서) 말씀을 못드리지만, 큰 충격에서 그렇게 됐는데, 특히 내부폭발해도 (두라3호와 같은) 저정도인데, (외부에서) 미사일 맞았거나 (어뢰가 폭발했다) 하면 선체 일부가 떨어져나갔다고 봐야한다”며 “(군에서 폭발) 실험을 하거든요. 유류 보급함을 폐선하기 전에, 예를 들어 청평함 등이 있다. 구축함 테스트 해서 쏴서. 그런 것을 보면. 저런(두라3호 같은) 형태”라고 증언했다.

두라3호 폭발사건에 대해 정 부사장은 “2012년 1월 두라 3호가 자월도 인근해역에서 삼등분된 사건으로, 청소하다가 불꽃이 일어나 터진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도 평택 해군제2함대 사령부에 전시중인 천안함 함미. 2015년 4월. 사진=조현호 기자

▲지난 2012년 1월5일 오전 8시5분께 인천시 옹진군 자월도 북쪽 3마일 해상에서 4191톤급 유류운반선 두라3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두라3호 선체가 처참하게 부서져 있다. (해경제공) 사진=연합뉴스



폭발로 침몰한 선박의 특징에 대해 정 부사장은 “폭발이 생기면 격실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사망하고, 폭발하게 되면 (손상 부위에) 돌출부위가 많이 생긴다”며 “선체 안에서 폭발시 밖으로 나온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시신의 경우 팔다리가 각각 따로 있었다. 시신이 온전하게 한 곳에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1명 가운데 4명의 시신의 경우 벽에 발렸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형체가 처참했다고 정 부사장은 답변했다.


이에 대해 외부 수중폭발과 내부폭발 절단면의 차이가 있느냐는 윤준 재판장 신문에 정 부사장은 “(방향은 다르더라도 폭발로) 돌출된 부위가 퍼지는 형태는 동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호원 부사장은 절단면과 함미 선저의 스크래치에 대해서도 반파 후 해저에 침몰하면서 조류에 쓸려내려가다 생겼을 것이라는 해군과 합조단의 그동안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정 부사장은 지난 2010년 4월16일자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함미의 절단면 부근에 무언가에 긁힌 듯 사선 모양이 많이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요구하자 “배가 있으면 군함의 경우 회색 계통으로 도색을 하는데, 절단된 면을 보면 절단되면서 쇠끼리 부딪힐 수 있는 것처럼 기스난 자욱이 있다, 그 쇠모양의 색깔이 달랐다”고 답했다.


긁힌 자욱의 원인에 대해 정 부사장은 “어떤 요인으로 파손됐는지는 모르나 큰 충격에 의해 절단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 부사장은 ‘뭔가에 긁힌 것 같으냐’는 김종귀 변호사의 신문에 “쇠끼리 부딪혔든지, 뭔가 긁혔으니 그런 것 아니겠나”고 답했다.


또한 ‘800톤이 나가는 함미가 침몰지점에서 발견된 지점까지 물살이나 해류에 의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해저의 지면에 쓸려 스크래치가 생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김 변호사와 윤 재판장 신문에, 정 부사장은 “사선형식으로 내려가도 … (저렇게 되긴 힘들다) 돌을 던져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박히지 거기서 굴러가 이동하지 않을것이라는 뜻이냐는 신문에 정 부사장은 “예 맞다”고 말했다. 결국 이동하면서 생긴 스크래치가 아니라는 것이냐는 신문에, 정 부사장은 “부딪히면서 생길 수는 있다”면서도 “(해저 바닥에) 긁히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답변했다.



▲함미의 절단면 선저 중앙에 나타나 있는 스크래치. 2017년 3월 촬영. 사진=조현호 기자



함미 선저의 스크래치는 해저로 떨어질 때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냐는 심재환 변호사의 재차 신문에, 정 부사장은 “넘어질 때 난 스크래치일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함미 인양 작업 중에 작업자의 휴대폰까지 압수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정호원 부사장은 “직원들이 저한테 자료를 사진이나 전송하는데, 이와 달리 (혹시라도) 개인적으로 부인이나 자녀에게 보낸다든지, 현장 작업 모습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게 목적이었다”며 “긴급한 일이 생겨 각자의 가정에 연락해야 하면 해군 관계자 휴대폰을 빌려줄 테니 각자 휴대폰을 반납하라고 요구했다. 이 때문에 반납 과정에서 시끄럽고, 멱살잡고 싸우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정 부사장은 “군인도 아닌 민간인한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군인이면 몰라도 전쟁도 아니고”라고 비판했다. 그는 “현장에 있는 모습이나 사진 영상 자료를 외부 유출하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당시 ‘함미 이동작업을 할 때 선체를 조금만 들어서 외부에 보이지 않게 하라’는 군의 지시가 있었다는 보도내용과 관련해, 88수중개발도 그런 군의 지시를 받았는지에 대해 정 부사장은 “그런 지시를 받고, 검은 차단막이 있는데, 그것을 덮어놓고 작업을 했다”며 “작업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정 부사장은 애초 천안함 함미를 인양할 때 체인을 두 가닥을 걸어 들어 올리고 있었으나 수면 위로 올라온 상태에서 군이 한 가닥을 더 요구한 과정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두 가닥이면 충분하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해군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세가닥을 걸게 됐다는 것이다. 인양 날짜도 기상악화 등을 이유로 사흘 뒤로 연기됐다고 그는 증언했다.


당시 함미 중량에 대해 정 부사장은 800톤으로 봤으며, 체인 한 가닥이 지탱할 수 있는 무게가 1000톤이므로 두 가닥이면 2000톤이라고 정 부사장은 설명했다. 두 가닥으로 최대 2200톤까지 인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4월12일 수면위로 들어올렸을 때 해군이 두 가닥 사이에 한 줄을 더 걸자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또한 세 줄을 감아도 올릴 수 있는 최대 중량은 2200톤으로 동일하다고 정 부사장은 증언했다.


‘체인 세 개 걸라고 했을 때 증인 업체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느냐’는 신문에 정 부사장은 “현장에서 그렇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군은 안전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고 답했다. 결국 88수중개발에서 두줄로 해도 충분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나를 더 걸었다는 것인가라는 재판장 신문에 정 부사장은 “예”라고 답했다. 체인 하나를 더 걸면 용역비가 추가되는지에 대해 정 부사장은 “동일하다”고 답했다.


▲ 2015년 4월15일 인양했을 때의 천안함 함미 모습. 합조단보고서

▲천안함의 함미 인양작업을 맡은 88수중개발(함미)과 해양개발공사(함수)는 사고 해역의 기상악화로 지난 2010년 4월12일 오후 대청도로 피항했다. 소형크레인선인 유성호(좌)와 중앙호(우)가 대청도 선진포항에 정박해있다. 사진=연합뉴스

▲법원에 제출된 서울신문 2010년 4월16일자 기사내용 및 정호원 부사장 사진. 사진=법원제출자료


출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9802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344&table=byple_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