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가리봉동 ‘구로공단의 신화’,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道雨 2018. 11. 23. 11:36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철야 몰린 15세 여공… 가슴 후비는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29>가리봉동 ‘구로공단의 신화’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9회 가리봉동(구로공단의 신화)편이 지난 17일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가산디지털단지역에 집결한 투어단은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금천 순이의 집)~가리봉시장~디지털단지 오거리~마리오 아울렛~수출의 다리 순으로 다녔다. 이번 특별답사기는 김동률 서강대 교수가 맡았다.


      

구로공단 생활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 방 안 풍경. 고향 갈 때 입을 새 옷들이 걸려 있고 재봉틀이 눈길을 끈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에는 할리우드 미남배우와 팝송가수 사진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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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공단 생활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 방 안 풍경. 고향 갈 때 입을 새 옷들이 걸려 있고 재봉틀이 눈길을 끈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에는 할리우드 미남배우와 팝송가수 사진이 붙어 있다.


식권이 한 장 나오는 날은 잔업, 두 장 나오는 날은 철야하는 날이다.

철야하는 밤, 공장 입구에는 ‘타이밍’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386세대들이 공부하면서 한번쯤 삼켜 봤을, 잠을 쫓는 바로 그 각성제다. 불량품이 나올까 봐 공단의 십대 소녀들에게 반강제로 먹인 것이다. 

      

구로공단 생활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에 재현된 벌집. 철거된 가리봉동 133-52 벌집주택에서 가져온 문짝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여공들은 돈을 아끼려고 두 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3~4명이 살았다. 이런 방이 6개 잇대어 있는데 화장실은 달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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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공단 생활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에 재현된 벌집. 철거된 가리봉동 133-52 벌집주택에서 가져온 문짝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여공들은 돈을 아끼려고 두 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3~4명이 살았다. 이런 방이 6개 잇대어 있는데 화장실은 달랑 하나다.



고된 철야를 끝내고 돌아가 쉬는 곳은 벌집이다. 두세 평 남짓한 벌집엔 벌이 살지 않는다. 사람이 산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공들이 살았다. 벌집의 필수품은 취사도구와 비키니 옷장, 가족사진이다. 벽지는 신문지. 공동구입한 카세트가 사과박스로 만든 간이책상 위에 놓여 있다. 

너무 늦게 찾아와 송구스런 마음이 앞선다. 구로공단 생활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은 구로공단 노동자 거주지가 모델이다.

두 평 남짓한 방, 지금은 사라진 ‘후지카 석유곤로’가 맨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방구석 앉은뱅이 책상이 남루하다. 못 배운 한을 풀고자 했을까. 책상에 놓인 ‘철학에세이’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들을 보니 갑자기 먹먹해진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에는 잘생긴 할리우드 미남배우와 팝송가수 사진 열댓 장을 다닥다닥 끼워 넣은 액자가 있다.

그리고 파리똥이 얼룩진 누런 벽에 붙어 있는 낡은 액자가 인상적이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아득한 시절, 이발소 그림에 곧잘 등장하던 푸시킨의 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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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들은 돈을 아끼려고 좁은 방에서 3~4명이 살았다. 이런 방이 6개 잇대어 있는데 화장실은 달랑 하나다.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으리라.

생활관 측에 따르면, 과거 이 일대에서 일했던 중년여성들이 혼자 오거나 옛 동료들과 찾는다고 한다. 자신의 곤고했던 시절을 피붙이에게도 알리기 싫었을까, 가족과 함께 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쪽방 문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체험관을 둘러보지 못하고 흐느끼며 떠난다고 전했다. 

작가 신경숙도 한때 ‘벌집’에 살며 구로공단에서 일했다. 1970년대 후반 열여섯에서 스무 살까지 여공으로 산 신경숙은 소설 ‘외딴방’에서 ‘서른일곱 개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방’이라고 묘사했다. 

구로공단은 진한 땀 냄새와 애환이 배어 있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발점이다. 70년대 중반 전성기 때 이 일대에서 일하던 십만 노동자의 대부분은 십대 소녀였다. 공순이라 불리며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 땅의 수많은 누나, 언니, 여동생들이다.


그들이 흘린 회한과 서러움의 눈물에 대해 우리는 오늘 말을 아껴야 한다. 적어도 이 공간을 찾는 순간만큼은 누구든 옷깃을 여미며 한없는 연민과 함께 예의를 차려야겠다.

그들은 대개 가부장적인 전통사회에서 오빠, 남동생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희생한 이 땅의 ‘효순이’들이다. 그리고 이 공간과 절묘하게 묘사한 딱 떨어지는 노래가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찾사의 ‘사계’다.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1985년 6월 시민과 학생이 노동자파업에 손을 내민 구로동맹 파업의 현장을 기념한 바닥 동판이 옛 가리봉 오거리 보도에 부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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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6월 시민과 학생이 노동자파업에 손을 내민 구로동맹 파업의 현장을 기념한 바닥 동판이 옛 가리봉 오거리 보도에 부착돼 있다.



훌쩍 커버린 딸아이가 아주 어렸던 시절, 노래를 듣던 딸아이가 말했다.

“넘 슬퍼.”

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랬다.

가리봉동은 한국사회의 슬픈 역사와 함께한다. 오래전 그날 나는 오랜만에 ‘노찾사’의 ‘사계’를 틀었고, 옆에 있던,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초딩’ 딸아이가 그냥 슬퍼했다.

가리봉동은 이 땅에서 가장 슬프고 서러운 낮은 동네였다. 

      

마리오 아울렛 외벽에 구로공단 수출신화를 이룩했던 기업들의 이름과 건립 날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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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오 아울렛 외벽에 구로공단 수출신화를 이룩했던 기업들의 이름과 건립 날짜가 새겨져 있다.



또 다른 역사도 있다.

험악했던 그 시절, 그러나 가리봉동에는 목숨을 내건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구석구석에 위장취업한 또 다른 젊음들이다.

70년대 말부터 본격화한 엘리트 대학생들의 노동현장 투신은 한국 사회의 특이현상으로 시대정신(Zeitgeist)의 상징이었다. ‘학출’(학생운동 출신), ‘학삐리’로 불리던 그들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던지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들을 ‘위장취업자’로, 노동현장에서는 ‘먹물’로, 정권에서는 ‘불순세력’, ‘좌경용공세력’으로 불렀다. 개발연대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실제로 그 시절, 기업에선 아래와 같은 위장취업자 색출 지침까지 배포되고 학습됐다. 

‘이력서의 필체가 기재된 학력에 비해 좋거나, 안경을 쓰거나 대학생들이 잘 입는 복장을 한 근로자, 대학가의 속어를 무의식적으로 쓰거나 노동법에 밝은 자, 이유없이 동료에게 친절한 자….’ 

      

서울미래유산인 수출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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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미래유산인 수출의 다리.



그들은 앞서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들과는 달리 스스로 공장을 택한 자발적 ‘공돌이’, ‘공순이’였다. 부모가 뼈빠지게 일해 ‘우골탑’ 대학에 보낸 촉망받던 아들딸들이, 고시공부 안 하고 제 발로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가 됐다. 가난한 부모의 기대와 눈물을 모질게 외면한 채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청춘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무모함 그 자체였다.


젊은 학출들은 동료 노동자들과 연대했지만, 때론 갈등했다. 대학생, 그것도 일류 대학생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태생적 차이 때문에 적잖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서울대 재학 중 공장에 뛰어든 심상정 국회의원은 노동자들과 정서적인 괴리에서 오는 갈등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이 우리 사회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청춘을 바쳐 민주화를 부르짖던 그들도, 이제 꽃다운 꿈을 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시나브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금천 순이의 집은 주로 공간적, 건축적인 면에 치중한 다른 문화유산과는 달리,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감 있는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발연대, 힘들었던 그 시절을 한번쯤 돌아보고 싶은 자는 당장 가리봉 오거리로 달려가야 한다. 그래서 철거된 가리봉동 133-52 벌집 문짝들을 이용해 재현해 놓은 순이의 집을 보며 침묵에 잠겨야 한다. 



‘폭풍이 부는 들판에도 꽃은 피고/ 지진 난 땅에서도 샘은 솟고/ 초토 속에서도 풀은 돋아난다/ 밤길이 멀어도 아침 해 동산을 빛내고/ 오늘이 고달파도 보람찬 내일이 있다/오! 젊은 날의 꿈이여, 낭만이여 영원히’


그 시절을 재현한 여공의 방, 낡은 액자에 끼워져 있던 바이런의 시 ‘희망’이다.

그렇다.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으리(The best is yet to be).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살아냈다.



글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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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임병도님께서 2013년도에 쓴 글이라, 여기에 나오는 통계수치가 현재(2018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여왕벌‘과 벌집에 살았던 구로공단 ‘여공‘
임병도 | 2013-05-01 10:16:00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976년 7월 26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 양은, 육군 여군단에서 열린 서울 구로공단 여직원 1백여명의 입대식에 참석해 이들을 격려합니다.

왜 구로공단 여직원들이 여군단에 입대하고, 박근혜 양이 그녀들을 격려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버지 박정희와 박근혜는 유독 구로공단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던 구로공단은, 1978년에는 일하는 노동자만 무려 11만4천여명에 달하는 거대 산업단지였습니다. 

지금의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1만여개 업체, 14만여명이 일하는 대한민국 IT 산업밸리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박정희가 내세웠던 경제 정책의 가장 큰 성공 요소가 구로공단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여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집에도 보내주고 수출역군의 역할까지 하는 장한 딸이라는 극적인 스토리를 갖춘 구로공단은, 박정희의 업적에 딱 맞아떨어지는 홍보 만점 아이템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성공 신화 속에 있었던 구로공단 여공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으며 12시간씩 일해봤자'

1977년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50% 이상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고, 그중 70%는 농촌출신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못 배우며 살다가 성공을 꿈꾸며 서울에 올라온 여공들의 삶은, 박정희가 선전하는 성공신화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구로공단 여공들은 대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곤 했는데, 작업장은 봉제공장 특유의 먼지와 소음으로 뒤덮여 있어, 항상 기침과 감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부 업주들은 밤샘 작업을 시키면서, 행여 이들이 졸면서 일을 하지 않을까 봐, 피로회복제라면서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일을 많이 하는 대신에 돈이라도 많이 벌면 그나마 좋았겠지만, 이들의 수입은 방송에서 보여주는 집에 송금도 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했습니다. 






구로공단에 처음 들어가면 견습공이라고 해서 한 달 내내 일해도 겨우 1만원대의 급여만 받습니다. 일당으로 치면 300원정도인데, 이런 급여를 받으며 1~2년을 일해야 일당이 500원 이상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경력 3년차, 17살 여공의 급여 명세서를 보면, 한달 내내 생리휴가는커녕 일요일까지도 일하고 받는 돈이 고작 2만2천원, 그것도 초과수당 3천원을 포함해서입니다. 일당 6백원인셈입니다.

2만2천원을 받아 방세 5천원을 내고, 쌀값과 식비, 점심값으로 1만3천원, 전기수도 요금 7백원, 버스비 2천1백원을 지출하고 나면, 수중에는 겨우 1천2백원이 남습니다. 이 돈으로는 집에 송금은커녕 학교도 무료로 하는 야학 이외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일을 열심히 오래 하면 그나마 나을까요?

아닙니다.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가면, 돈을 많이 주기 싫은 업주들은 숙련공을 해고하고 견습공을 채용해 인력을 보충하기도 했고, 10년이 넘는 기능공이 되어도 급여가 5만원 이상은 넘지 않았습니다.

 

▲ 1976년 구로공단을 방문했던 박정희. 출처:매일경제




그렇다면 도대체 방송에 나왔던 성공신화의 여공들은 어떻게 집에 송금도 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었을까요? 정답은 점심도 굶고 저녁도 굶고 버스도 안 타고 걸어 다녔기 때문입니다. 즉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걸어 다녀야만 그런 성공신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는 박정희의 말 한마디면 당장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976년 구로공단을 방문해 저임금을 개선하라고 박정희는 지시했지만 (그토록 명령을 내리길 좋아하던 박정희가 유독 이런 일에는 기업의 자율에 맡기는 이상한 현상),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여건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부탁(?)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은 고단했고, 죽어라 일해도 밥을 굶지 않으면 집에 송금조차 못했던 빈곤의 연속이었습니다.


' 몸수색을 당하며 2평 방에 3~4명이 함께 잤던 여공들'

구로공단 여공들이 수출역군이라 신문과 방송에 미담사례로 자주 등장했지만, 실제 그들의 인권은 최악이었고, 구로공단에서 여공은 인간이 아닌 그저 미싱을 돌리는 기계에 불과했었습니다.

구로공단에는 섬유, 전자, 완구 봉제 등의 생산공장이 많았습니다. 여공이 퇴근하려면 반드시 '검신' 또는 '센타'라고 불리는 몸수색을 받아야만 공장 밖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돈을 뺏을 때 '센타깐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어원이 구로공단 여공 몸수색에서 나왔다고 하기도 합니다.

▲몸수색을 마치고 퇴근하는 여공들. 수위실에는 아직도 많은 여공들이 몸수색을 하고 있다.출처:동아일보



여공들은 정문이 아닌 수위실로 가서 관리자가 상의에서 하의까지 손으로 더듬어 숨긴 물건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퇴근할 수 있었는데, 수십 명의 여공들이 좁은 수위실에서 남자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으며, 어린 여공들은 처음에 울기까지 했습니다.

예전에 버스안내양들에 대한 몸수색이 인권침해라고 해서 없어졌지만, 구로공단 여공들은 여전히 밖에서도 보이는 칸막이조차 없는 수위실에서 몸수색을 당했던 것입니다.


▲금천구청이 재연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의 모습. 출처:연합뉴스.




1960~8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이 살았던 집을 '벌집' 이라고 불렀는데,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서 미로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로공단에 여공들이 대거 몰리자, 구로공단 일대는 방이 없어 여공들은 2평도 안 되는 방을 4~5명이 함께 사용하기도 했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현관문을 들어서면 1평도 안 되는 부엌, 빨래터 겸 세면장이 있고, 1평 정도의 방에 비키니 옷장을 놓으면, 4~5명의 여공들은 칼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벌집은 보통 2층짜리 단독주택 하나에 20여개의 방을 만들었는데, 수십 명이 살아도 화장실은 겨우 1개였고, 무허가로 난립해 집을 개조하다보니, 연탄가스 위험은 물론이고, 성폭력과 절도 등의 범죄에 고스란히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돈이 있는 여공이나 자매가 함께 일하는 여공들은 괜찮지만, 혼자 시골에서 상경해 돈을 버는 여공들은 서로 함께 모여 방값을 나눠내면서,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구로공단을 방문한 박정희. 출처: 동아일보




박정희의 성공으로 손꼽는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여공들은, 급여도 인간적인 대우도 전혀 받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공으로 성공하려면 휴일도 없이 한 달 내내 12시간씩 매일 일하고, 점심과 저녁도 거르며, 2평이 안 되는 방에서 칼잠을 자야 가능했습니다.

그런 직장도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있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시기가 1961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978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대통령에 있으면서, 겨우 굶어 죽는 일을 모면하게 했던 것이 어찌 업적이 될 수 있습니까?

구로공단의 성공은 한 달 내내 일요일도 생리휴가도 없이 최저임금을 받고 일했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었지, 결코 박정희의 성공 신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1976년 박근혜가 방문한 구로공단,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나?'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구로공단이 지금은 멋진 고층 빌딩 숲으로 바뀌었습니다. 봉제와 완구 등의 산업에서 IT관련 산업으로 바뀌었으니, 이제 구로공단의 어두운 과거는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여공이라는 말 대신에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로 바뀐 우리의 아줌마 여공들은 여전히 구로공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구로디지털단지 휴대폰 생산공장의 모습. 출처:연합뉴스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 주변에는 휴대폰이나 IT기기 조립 공장이 공장형 공장 빌딩에 입주해 있습니다. 여기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줌마 여공들입니다.

휴대폰 생산공장에 일하는 아줌마 여공들은, 휴대폰 성수기인 여름이면 한달에 300여시간, 평소에는 250여시간을 일합니다. 휴식 시간은 오전 10분, 오후 10분, 점심시간 1시간 뿐이고, 그렇게 일해도 기본급+상여금으로 월평균 130만원을 겨우 받습니다.

아줌마 여공들이 상여금에 연장근무 수당을 받아도 150만원이 넘기 어려운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인력 파견업체에 고용돼, 공장에 파견직, 즉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최저임금밖에 받지 못합니다.

"저도 독산동에서 일을 합니다. 처녀 때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일했었고, 애 키운다고 일 안하다가,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삶이 쪼들려서 다시 이곳에서 일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냥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려니 해서 일하는 거니, 사대보험도 없고, 보너스도 없고, 공장 사정에 따라서 어떤 때는 일 나오라고 하고, 어떤 때는 기약도 없이 갑자기 쉬라고 해도 참고 일할 수 있습니다. 한 달에 80만 원 받을 때도 있고, 야근도 하고 그러면 100만 원 받을 때도 있고 해도 참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도 졸업하고, 이제 꿈과 자기계획도 갖고 일하려는 애들한테까지 이렇게 하는 건 절대 아니죠. 그렇지 않나요?"

('서울 디지털단지 비정규직 노동자와 나' 수기 중에서)



풍요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구로공단 여공들은 자신들의 몸과 정신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구로공단에 일했던 여공의 딸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어머니가 일했던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삶이 1970년대나 2013년이나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노동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노동자보다 기업을 우선시하는 나라'

한국노총이 조합원 58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주 근로시간이 40시간 이하라고 답한 응답자는 겨우 17.6%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 40시간 이상이었고, 50시간 이상도 25.7%에 달했습니다. 이 자료는 한국노총 조합원의 설문조사이기 때문에, 파견업체 비정규직인 경우는 더 심합니다.




파견업체에 고용된 비정규직은 임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정규직보다 더 많은 근로를 합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당을 더 줘야 하는 정규직보다 임금이 싸면서도 근로 환경이나 복지, 노동 여건에 대한 불만이 없는 비정규직을 선호합니다. 

구로디지털 단지의 여공 아줌마들은 일주일에 60시간 이상을 일합니다. 이렇게 일해도 급여가 150만원도 넘지 못하는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법정근로시간이 52시간이지만, 휴일근로가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로기준법상 법정근로시간은 1일 8시간씩 1주일에 40시간, 연장근로 12시간까지 합쳐도 52시간입니다. 그러나 토요일, 일요일에 8시간씩 근무를 해도 이는 연장근로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장근로시간까지 52시간을 채워 일을 시키고, 토요일, 일요일까지도 근무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휴일근로시간을 법정근로시간에 포함하고 있으며, 독일과 벨기에는 아예 휴일근로 자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꿀벌의 먹이를 가만히 앉아서 먹는 여왕벌은 이제 그만'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공약집에서 분명히 '휴일근로 초과근로시간 산입'을 내세웠습니다. 이럴 경우 근로시간은 최대 52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근로시간을 최대 60시간으로, 현재의 68시간과 박근혜 대통령 공약 52시간의 중간을 선택했습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근로시간 관련 공약


노사정위원회는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해 허용되는 근로시간을, 휴일근로 여부와 관계없이 최대 52시간을 넘지 말라는 권고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노사 합의에는 실패해, 이제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재계의 반발에도 노사정위원회의 근로시간 개정을 추진할지 여부는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스스로 했던 공약은 지켜져야만 하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 1856년 호주의 8시간 노동제 요구 플래카드 (8시간 일하고, 8시간 즐기고, 8시간 쉬자)



오늘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그러나 사실 5월1일은 전세계가 기념하는 노동절입니다. 하지만 유독 대한민국에서는 노동절이 아닌 '근로자의 날'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유는 노동이라는 관점이 언제나 독재 권력자의 시각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은 '노동절이 공산 괴뢰도당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라'면서, 대한 노총의 결성일이었던 3월10일을 노동절로 만들었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꾸고, 산업역군, 수출역군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포상을 하며, 그저 '일 잘하는 근로자'라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구로공단에서 여공에게 새마음직장봉사대기를 수여하고 있는 박근혜, 출처:동아일보.




"(구로공단) 산업장에 여러분들의 정성과 땀으로 이룩한 경제 성장은, 우리의 1백억달러 수출탑을 성취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풍요로운 국가건설을 기약한 디딤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박근혜)

"근로자는 자립과 번영의 시금석인 3차 오개년 계획 사업의 주역이라는 사명감과 긍지를 지녀야 할 것이며, 이 사업이 끝나는 70연대 중엽에 가면 우리근로자들은 경제건설에 쏟은 '피와땀'의 대가를 누구보다 알차게 지불받게 될 것이다"(1971년 근로자의 날, 박정희)


박정희가 근로자에게 약속했던 '피와땀'의 대가는 여전히 노동자에게는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그의 업적과 성공 신화로 미화되어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집에 사는 일벌이 땀흘린 수고가 여왕벌에게만 돌아가듯

대한민국 노동자는 여왕벌을 먹이기 위해 존재하는 일벌이 아닙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인간입니다. 1976년 구로공단을 방문했던 박근혜 양이 이제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녀가 2013년에도 노동자의 피와 땀의 대가를 외면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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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로기준법 개정


2018년 2월 28일 '일주일은 7일'이라는 내용을 포함,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이에 따라 휴일 근로수당은 통상임금의 50% 가산이었던 현행에서, 8시간 이내의 경우 통상임금의 50%가 가산되고, 8시간을 초과할 경우 통상 임금의 100%가 가산되도록 변경되었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 개정안은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은 2018년 7월부터, 50인 이상의 사업장은 2020년 7월부터, 5인 이상의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