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지구의 눈물, 인간의 눈물. 탈육식. 기후위기의 정치학과 심리학

道雨 2020. 8. 12. 15:19

지구의 눈물, 인간의 눈물

 

2007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은 2050년대 아시아권에서는 대형 삼각주에서 홍수로 인한 강의 범람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한탄강의 범람으로 마을이 잠기는 것을 보며, 임진강, 북한강, 남한강이, 마침내 한강 또한 장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년 앞당겨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에 전율이 인다.

 

전쟁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기로 터진다. 환경위기는 명백한 파국의 기반이 서서히 쌓여간다. 전쟁은 마지막 순간에도 막을 수 있지만, 환경위기는 티핑포인트를 지나면 되돌릴 수 없다.

IPCC의 2018년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는 지금 당장 세계가 탄소중립사회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실제로 인류가 행동할 기간은 1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비상종이 울리고 있다. 어떤 인간안보도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이 결정한다. 불교의 가르침인 신토불이(身土不二)는, 몸은 지금까지의 행위에 의한 결과인 정보(正報)로, 땅은 그 몸이 의지하고 있는 환경인 의보(依報)로 나타나는데 둘이 아니라고 한다. 지구의 환경은 인간의 마음이 만든다는 뜻이다. 지금의 코로나19가 그 예증이다.

시간문제인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은 자초한 것이다. 제5의 멸종인 공룡 다음으로 인류가 6번째 멸종이 되려 한다. 사람들은 비관적인 말보다 희망 섞인 이야기를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들 인간의 공업(共業)인 이 상황이 반전될 수 있을까. 눈앞에서 일어나는 시간당 100㎜ 이상의 물폭탄이 정상인가. 남의 나라의 이야기 같던 긴 장마와 물폭탄은 한반도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폭염, 폭설, 강풍, 가뭄도 마찬가지다. 24절기는 과거에 존재할 뿐 자연 질서와 인간 감각의 소통은 멀어지고 있다.

숱한 보고서가 전하듯 이 자세로는 2050년 온실가스 배출 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북극지방의 만년설이 사라지는 현실을 뻔히 보면서도 비상등을 켜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인간 개개인이 힘을 합쳐도 해결할 수 없는 임계 상황에 접근하게 된다.

선거의 귀재로 알려진 일본의 다나카 쇼조는 한 세기 전 도치기현 아시오 구리광산에서 흘러내린 광독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을 위해, 정계를 떠나 죽을 때까지 그들 편에 서서 자본의 횡포와 국가권력에 대항해 싸웠다.

그는 “숲을 마구 베어 없애는 것은 나라를 스스로 죽이는 행위이다” “치수는 흐르는 물이라는 자연을 따르고 모든 인위적인 방해물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고마쓰 히로시 지음).

지구의 생태계 질서를 무너뜨린 근대문명이 마침내 인간의 안식처마저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태위기를 인류 공동의 집에 대한 문제라고 보는 인식과 같다. 인간이 지구로부터 추방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환경위기는 지구가 45억년 동안 쌓아온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똑똑한 영장류인 인간이 벌인 일이다. 설사 인간이 멸종한다고 해도 지구는 자정 능력을 회복할 것이다. 오만한 인간이 모든 존재와 공생하는 것이 아니라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다.

장대비는 사라질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지구의 눈물이다. 냄비 속 개구리 실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온도가 계속 올라가도 자신이 산 채로 익어가는 것도 모르는 인간을 애도하는 자연의 눈물이다.

 

2019년 유엔 기후변화총회에서 발표된 ‘기후변화대응지수 2020’에서 한국은 총 61개국 가운데 58위였다. 기후악당의 오명을 쓰는 이유이다. 온실가스 배출량과 에너지 소비량, 정부가 제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 부족 등 원인은 자명하다.

우리가 인류 멸종의 주범인 이상 전시 상태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뭐라도 실천해보자. 나는 출근길에 피켓이라도 들고 서 있을 생각이다. 여의도가 물에 잠겨도 위정자들이 철들지 못하면, 백성의 눈물은 끝내 마르지 않으리라.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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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080300055&code=990101#csidx58d27e058bdc8c49194933f1e13b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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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탈육식

 

지구물리학자 호프 자런의 신간 제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국내 출간을 앞두고 사전 연재 중인 책이다.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서 지난 50년간 인간이 누린 풍요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룬다. 땅과 바다와 하늘을 망쳐놓은 인류의 식생활과 소비생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구는 앞으로 더 빠르게 달라질 테고 우리는 결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풍요로울 수 없을 것이다.

 

호우가 계속되고 있다. 기후위기 전북비상행동은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고 말하며, 온라인 피케팅 운동을 시작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대륙의 북극곰 이야기가 아니다. 코앞에 닥친 미래를 바꿔놓을, 이미 시작된 재난 이야기다.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점점 심각해질 기후재난의 속도와 강도를 최대한 늦추고 약화시킬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2050년을 목표로 장기 저탄소 발전 전략을 지향하는 것은 전 세계적 추세다. 한국 정부도 이에 맞춰 그린 뉴딜 정책을 발표했으나, 여전히 석탄발전소 건설을 계획한다는 점, 탄소 배출 제로 목표가 포함되지 않은 점,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미미하다는 점 등에서, 지극히 산업중심적이고 성장중심적 정책이라는 여론이 있다. 강한 의지와 섬세한 시선으로 기후 환경 정책을 이끄는 정치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정부가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만큼이나 개인들의 일상적 실천도 중요하다. 기후위기를 늦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결정적 실천은 탈육식이다. 텀블러를 쓰고 일회용품을 줄이는 생활습관도 중요하지만, 탈육식은 그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가져다준다.

육식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서 외면할 뿐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온실가스의 18%가 축산업에서 배출된다. 공장식 축산에서 발생하는 탄소의 비율은 전 세계 모든 교통수단에서 발생하는 탄소의 비율보다 높다. 소고기 1㎏을 얻는 데 옥수수 16㎏이 사료로 쓰인다. 사육 과정에서 막대한 경작지와 물이 소모되며, 운송과 보관 등의 과정에서 꾸준히 화석연료가 쓰인다. 가축이 배출하는 메탄가스도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킨다.

육식은 지구의 에너지 자원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빠르게 소진하는 생활습관이다. 수많은 개인들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고기를 먹는다면, 기후위기가 늦춰질 수 있다는 희망은 갈수록 희미해질 것이다.

 

같은 단백질이라도 식물성 단백질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현저히 낮다. 채식으로 향상되는 건강과 채식으로 해결하는 동물 착취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인간으로서 무탈하게 살아가기 위해 채식을 고려해야 한다.

지나친 육류 섭취 또한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누려 온 풍요 중 하나다. 이 풍요를 의심해야 한다.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태학자 로빈 킬 워머러는 그의 저서 <향모를 땋으며>에서, 어느 부족 연장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오로지 취하려는 생각뿐이지요. (…) 우리가 맨 처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대지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라고요.”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 말고, 지속 가능한 공생을 계획해야 한다. 생태계를 착취하는 인간 말고 생태계와 함께 공생하는 인간(호모 심비우스)으로 거듭나기 위한 실천 방법이 있다. 바로 탈육식이다. 육식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기후위기를 늦추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 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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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110300055&code=990100#csidxdd631d9b9bf10d1a871ffcf979ef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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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의 정치학과 심리학

 

장마가 길어졌다. 피해도 크다. 까닭은 북극과 동시베리아 기온이 평균보다 높아져 장마와 더위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게 기상청의 설명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중국 남부와 일본 규슈에도 기록적 호우가 쏟아졌다. 이상기후 현상이다. 이번 폭우 하나만으로 기후위기를 주장하긴 어렵다. 그러나 갈수록 두드러지는 홍수, 폭염, 태풍, 한파, 산불 등 기상 이변과 재난을 지켜보면, 이 기이한 장마는 기후위기의 전조인 게 분명해 보인다.

 

기후위기가 갖는 심각성은 그간 숱하게 토론돼왔다. 당장 인류의 가장 큰 시련인 코로나19 팬데믹만 해도 기후위기를 원인의 하나로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제러미 리프킨이 대표적이다. 그에 따르면, 야생동물들이 기후 재난을 피하려 인간 가까이 다가왔고, 바이러스가 이와 함께 이동했다. 사스, 메르스, 에볼라, 지카, 그리고 코로나19가 그 직접적 사례들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미친 지구적 충격을 고려할 때, 기후위기에 대한 대처는 너무나 급박한 인류사적 과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기후위기를 금융위기, 테러리즘과 함께 지구화된 위험의 대표 현상으로 지목한 바 있다. 그런데 기후위기가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인데도, 어느 나라도 위기 대처를 제1의 국가 과제로 삼지 않는다. 왜일까. 정치적 요인과 심리적 요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요인의 경우, 미국 등 많은 정부들은 기후위기를 현재가 아닌 미래의 과제로 놓아둔다. 앤서니 기든스가 <기후변화의 정치학>에서 지적하듯, 사람들은 미래에서 얻을 수 있는 더 큰 보상보다는 작더라도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선호한다. 무임승차 유혹도 문제다. 다른 나라가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 참여할 경우, 우리나라가 소극적이라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이기적 계산 역시 영향을 미친다.

심리적 요인의 경우,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미온적 태도가 문제다. 조지 마셜이 <기후변화의 심리학>에서 강조하듯, 기후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온실가스와 기후위기의 관계에 있다기보다, 심리적 편향을 위시한 가치와 이념에 놓여 있다. “그런 거창한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죠”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기후위기를 애써 무시하려는 심리적 태도가 그 대응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최근 지구적 차원에서 기후위기의 계몽에 앞장서온 이들은,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미국의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다.

툰베리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등교거부 운동을 주도해 기후위기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작년에는 ‘글로벌 기후파업’에 동참해 힘을 더했고,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해 각국 정상들 앞에서 “당신 지도자들이 우리 모두를 실패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기후위기의 지구적 계몽에 크게 기여했다.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작년 기후위기에 맞서는 정치·경제·사회·환경을 포괄하는 ‘그린 뉴딜 결의안’을 내놓았다. 결의안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온실가스 배출 제로 달성, 적정 임금의 좋은 일자리 대규모 창출, 21세기에 걸맞은 인프라와 산업에의 투자, 지속 가능한 환경의 확보, 사회 전반에 대한 정의와 공정성의 증진을 5대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들로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청정하고 재생 가능하며 탄소 배출 없는 에너지의 100% 공급 등을 제시했다.

그린 뉴딜은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판 뉴딜’의 한 축을 이룬다. 한데 일각에선 그린 뉴딜에서 ‘그린’이 사실상 빠졌다고 주장한다. 기후위기를 인정하고 실현 가능한 대안을 실천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린 뉴딜의 목표는, 앞서 말했듯, 공정하고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환경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다.

분명한 것은 기후위기가 이제 부정하기 어려운 과학적 사실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지구는 외적 충격으로 인한 불안정한 상태를 스스로 복원할 수 있는 복잡 시스템이다. 문제는 이 지구의 자동조절 시스템이, 대기과학자 조천호가 강조하듯, 교란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기후위기가 급격히 진행되고, 최근 그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실이 우리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고 있다.

 

기후위기의 가장 심각한 피해자들은 나와 같은 기성세대라기보다 우리의 아이들인 다음 세대일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지구를 이런 상태로 물려줄 건가. 우리에게 그런 권리가 과연 있는 건가. 언제까지 내일의 문제로만 남겨둘 것인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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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110300025&code=990100#csidx0d76d5f7d28c8769b6a4f14f6fc33f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