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친일경찰의 침탈로 막 내린 ‘친일청산의 꿈’

道雨 2020. 8. 19. 11:57

친일경찰의 침탈로 막 내린 ‘친일청산의 꿈’

 

[해설] ‘반민특위 습격사건’의 배경과 그 파장

(정운현/언론인, 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반민특위 청사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옛 미도파백화점 맞은편에 있었다. 2층 양옥 건물로 이전에는 상공부 특허국이 쓰고 있었다. 특위 출범 초기에는 중앙청 2층에 사무실을 하나 얻어서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특위 직제가 정비되고 인원이 충원되면서 이범석 국무총리의 주선으로 이곳으로 입주하게 됐다. 1층이 약 100평 정도 됐고, 2층도 그 정도였다. 1층에는 사무국장 격인 총무과장실과 제1, 2, 3 조사부의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등이 사용하였으며,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하였다. 특경대는 1층 구석에 칸막이를 하여 사용하였다. 특경대란 특위 요인 경호와 조사관과 함께 피의자 검거 임무를 맡던 특별경호대를 말한다. 특경대원은 총경급에서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총 47명이었다. 특경대 대장은 김상돈 부위원장이 추천한 오세륜 씨, 부대장은 이병창 씨였다.

1949년 6월 6일 오전 7시. 한 무리의 경찰관들이 반민특위 청사 뒷길에서 모종의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긴급소집된 경찰관들이었다. 2대의 트럭에 나눠 탄 50여 명의 경찰관들은 반민특위 청사를 에워쌌다. (반민특위 총무과장을 지낸 이원용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기마경찰도 출동했다고 함) 8시가 되자 특위 직원들과 특경대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윤기병의 지시에 따라 출근하는 특위 관계자들을 붙잡아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강제로 감금시켰다. 이날 중부서에 연행된 사람들은 특경대원 24명, 특위 직원 및 위원 경호원 9명, 민간인 2명 등 총 35명이었다. 민간인 2명은 특위 직원 면회를 왔다가 직원으로 오인돼 엉뚱하게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연행된 특위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경찰에 폭행을 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관들은 이날 국가기관인 반민특위에서 무법천지를 연출하였다. 이들은 특위 관계자 불법연행에 이어 특위 사무실에 무단으로 난입해 반민 피의자 조사서류를 무단으로 압류해갔으며, 사무실 집기를 파괴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자행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특위 위원들이 항의하자, 이들은 ‘상부 지시’ 운운하면서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특별검찰부장이자 현직 검찰총장이던 권승렬 총장의 권총을 불법적으로 빼앗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특위는 난장판이 돼버렸고, 조사기능은 한순간에 마비되고 말았다. 특위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기 불과 20일 전의 일이었다. 역사는 이를 두고 ‘반민특위 습격사건’, 또는 6월 6일 발생했대서 ‘6.6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친일경찰들의 반민특위 습격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해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검거를 시작으로 특위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본격 돌입했다. 거물급 친일파들이 속속 특위로 끌려오기 시작했고, 친일경찰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마침내 사건 발생 이틀 전인 6월 4일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이 특위에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친일경찰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여기에는 전조가 있었다. 6월 2일 친일세력들의 사주를 받은 관제시위가 열렸는데, 이들은 특위를 비방하고 체포된 반민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튿날 최운하 등의 주도로 친일경찰들이 특위 습격을 꾀하였는데, 특경대 요원들이 공포탄을 쏘며 해산시켰다. 4일 최운하 등이 구속되자, 서울시내 각 경찰서의 사찰경찰 150여 명은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사표를 제출하였다. 이로써 특위와 친일경찰 세력 간에 일전불사가 불가피해졌다. 이들의 ‘뒷배’는 이승만 정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출범 초기부터 못마땅하게 여겼다. 국회에서 반민법이 제정돼 정부로 이송되자 국무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표면적인 거부 이유는 삼권분립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국회가 거듭해서 반민법 공포를 압박하자 뭉개고 뭉개다가 공포시한인 9월 22일에야 할 수 없이 공포하였다. 이승만이 반민법을 거부한 속내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미국에서 돌아와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던 그는 친일 부호, 경찰 등 기득권 친일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수족과도 같았던 이들을 반민 법정에 세우는 것은 자신의 기둥과 뿌리를 뽑아내는 것과도 같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내내 방해공작을 이어갔다.



친일경찰들의 특위 침탈로 절름발이가 된 특위는 가라앉는 배 신세가 되었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승만 계열의 국회의원들은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때마침 어수선한 정국 하에서 7월 6일 개정안이 통과돼 특위의 활동기한이 그해 8월 31일로 단축되었다. 그러자 이튿날 김상덕 위원장 등이 일괄사퇴하면서 특위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인 위원장 체제의 2기 특위는 1기 특위의 잔무처리에 그쳤다. 당초 특위는 조사대상자를 7천 명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지로는 이 숫자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682건을 취급하였을 뿐이다. 이 가운데 영장 발부 408건, 체포 305건, 검찰송치 559건, 기소 221건, 재판종결 건수는 38건에 불과했다.

민족의 염원을 담아 출범한 반민특위가 중도에 좌절되면서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다시 민족사의 숙제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