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윤석열이 다시 꺼낸 ‘자유민주주의’

道雨 2021. 5. 27. 09:09

윤석열이 다시 꺼낸 ‘자유민주주의’

 

 

“5·18은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정신이다. 자유민주주의 반대는 독재와 전체주의다. 그런데 현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 하지 않았느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내놓은 메시지는 그의 정치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윤 전 총장이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3월 검찰총장직을 사퇴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

얼마 전 <티브이(TV) 조선> 보도를 보면, 윤 전 총장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하는 게 외교의 우선 과제”라고 측근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왜 ‘민주주의’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 걸까. 41년 전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을 살상한 5공 신군부가 내걸었던 유혈진압의 명분이 ‘북한 침략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윤석열은 알고 있을까. 그가 구속시킨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집권기간에 ‘자유민주주의’란 단어를 집어넣기 위해서 그토록 집요하게 역사교과서를 바꾸려 했던 사실을 벌써 잊은 것일까. 한-미 동맹의 한 축인 미국의 정치권과 학계에선 ‘자유민주주의’란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민주주의 핵심 가치가 ‘자유’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서유럽과 미국에선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수렴 현상이 뚜렷해졌기에, 굳이 민주주의에 ‘자유’란 수식어를 붙이는 건 의미가 없다. 자유주의 정당이 정부의 시장개입과 사회복지 확대에 찬성하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생산적 복지나 신자유주의 가치 일부를 수용한 게 지금은 당연한 일처럼 됐다. 소련 공산주의 몰락을 코앞에 두고 열린 1988년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강령에서조차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군부독재나 보수정권이 굳이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건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며, 정치적 의도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윤석열 전 총장이 언급한 ‘현 정부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 시도한 사례’는, 더불어민주당이 헌법 전문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을 ‘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꾸려 검토했다는 언론 보도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헌법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이 처음 들어간 건, 1971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헌법 때라는 걸 윤 전 총장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이전 공화국 헌법엔 ‘민주주의’ 또는 ‘민주공화국’이란 단어는 있어도 ‘자유민주’라는 표현은 들어 있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굳이 ‘자유민주’란 표현을 삽입한 이유는 분명하다. 실제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면서도, 북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론 정경유착과 시장만능주의에 기반한 약육강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반공과 반북, 개발독재라는 이데올로기를 가리는 허울로 작동해왔다.

 

1987년 개정된 헌법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만 언급되어 있는 게 아니다. 경제민주화와 공공의 필요에 따른 개인재산권 제한, 사회적 기본권 등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도 포함돼 있다. 좌우 이념이 수렴되는 모습을 지금 헌법은 띠고 있다. 그래서 다시 ‘자유민주주의’를 들고나오는 윤석열 전 총장의 행동은 뜬금이 없다.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건, 전·현직 대통령을 독재와 전체주의로 규정하려는 뜻일 터이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나 ‘독재’라는 점에선 일맥상통하고, 그러니 두 대통령 모두를 상대로 맞서 싸운 윤석열 자신만이 자유민주주의 정통성과 정치적 명분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공정과 정의’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게 우리 현대사의 교훈이다. 현 정권과 갈등을 빚은 검찰 수사로 ‘공정과 정의’의 상징처럼 떠올랐지만, 그 한 꺼풀 뒤엔 지극히 퇴행적이고 이념 회귀적인 모습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제 곧 대선 정국 한복판에 ‘정치인 윤석열’이 등장할 것이다. 윤석열씨는 왜 늘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지, 그가 꿈꾸는 사회란 어떤 것인지 국민에게 솔직하게 말할 때가 됐다.

 

 

박찬수ㅣ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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