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반미감정과 무임승차

道雨 2022. 4. 21. 10:42

반미감정과 무임승차

 

이건 언젠가 써야겠다고 작심하고 있던 얘기다. 진영 내 ‘멍석말이’를 다소간 각오하고 솔직한 생각을 가감 없이 눌러 적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최근 글을 읽고 한동안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한국 언론이 영미 언론의 전황 보도를 ‘짜깁기’하고 있다는 핵심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거나, 전쟁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민중의 고통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글 전체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를 구성하는 이른바 ‘진보 86’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독특한 정서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서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는 뿌리 깊은 반미감정과 한반도에만 불똥이 튀지 않기 바라는 ‘프리라이딩’(무임승차) 기질이 아닐까 한다.

 

이 교수는 지난 4일 인터넷 매체 <피렌체의 식탁> 기고 글에서, 한국 언론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과 관련해 “미·영 언론의 조직적 오보와 오리엔탈리즘에 자발적으로 귀순”하고 있다며, 굳이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파란약·빨간약 비유를 끌어온다.

한국 언론의 국제보도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실은 문제가 많다) 그 얘기만 하면 될 것을, 미국이 만든 가상세계에 갇힌 ‘노예’라는 ‘어마어마’한 규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초기 러시아의 키이우 진공이 돈바스 공략을 위한 ‘성동격서’(모든 것은 푸틴의 빅 픽처?)라는 그의 전황 인식은 타당한가. 도저한 반미주의로 인한 피해의식이 아니라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정신세계다.

지난해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은 자신의 책에서 미국이 “압도적인 지배력으로 한국의 합리적 판단력과 현실감을 잃게 해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이를 ‘가스라이팅’이라 했는데, 이들의 인식론적 지평은 큰 틀에서 같다고 본다.

 

한국 진보진영 내 반미의식의 연원을 찾아가자면 사실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외세에 의한 반쪽 해방과 뒤이은 골육상잔의 비극, 이어진 냉전체제 속에서 한국의 국익은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서 크게 규정당했다. 또 광주의 비극. 미국은 저 ‘학살자’의 권력 찬탈을 끝내 용인했으며, 1990년대 이후 수많은 국면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사실상 북한의 핵개발을 허용했다. 약소국이었던 한국이 끊임없이 미국의 의도를 의심하고, 사실인지 음모인지 확인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에 빠지는 것은 인간 심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본다.

하지만 지난 70년간의 분투 끝에 대한민국은 D-10(주요 민주주의 10개국)의 멤버십을 손에 넣었다. 현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미국이 강요한 것이 아닌, 한반도, 지역, 나아가 세계의 발전과 번영을 보장하는 공공재로 파악하고 수호해야 하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인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다른 국가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하여 무력의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간다”(유엔헌장 2조)는 원칙을 세우고 지켜왔다. 러시아의 침공은 인류가 수많은 시행착오에도 지난 70여년간 지켜온 이 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지난달 30일 중국 안후이성 툰시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만나 “나는 이 결과(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에 따라 국제정세가 더 분명해질 것이라 확신한다”며 “우린 더 정의롭고 민주적인 ‘다극체제’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의도가 관철돼 미국의 패권이 무너지면 어찌될까. 힘으로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킨 러시아는 다시 무력을 써 동유럽에서 옛 소련이 행사했던 것 같은 영향력을 회복하려 할지 모른다. 중국 역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대만에 대한 무력통일을 시도할 수 있다. 한국은 중국에 굴복해 옛 중화질서 비슷한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핵무장을 통해 국가의 자존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아니더라도 한반도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성장한 한국이 일본 등과 함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수호하는 데 한몫해주길 바라고 있지만, ‘진보 86’은 여전히 반미와 무임승차 정서에 머물고 있다. 한반도에 불똥이 튈까만을 걱정하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애절한 도움 요청에 성의 없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길윤형 기자 :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