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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1.18~2008.7.11 금강산관광 10년, 먼저 온 미래

道雨 2022. 5. 3. 09:50

1998.11.18~2008.7.11 금강산관광 10년, 먼저 온 미래

 

[이제훈의 1991~2021] _27

 

* 2007년 7월26일 여름방학을 맞아 금강산에 온 경기도 안산시 송호초등학교 학생들이 장전항의 금강산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아버지~.”

1998년 11월19일 이른 아침, 현대금강호가 금강산 자락이 동해로 흐르는 장전항에 닿기 직전, 한 할머니가 분단 반세기 꿈에도 잊지 못한 북녘의 아버지를 목 놓아 불렀다. 그 아버지가 살아 계실 리 만무. 금강산 줄기를 타고 흘러 갑판을 때리는 이른 겨울바람이 서럽게 맵찼다.

첫 금강산관광객 826명을 포함한 1418명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전날 오후 5시43분 강원도 동해항을 떠나 14시간여 만인 19일 아침 8시께 장전항에 닻을 내렸다. 남북 분단사 최대 교류협력사업인 금강산관광의 시작이다.

금강산 땅을 밟자마자 엎드려 절을 하는 노인이 숱했다. 금강산 구룡연·만물상 가는 길의 연주담 등 절경 앞에 남녘에서 챙겨 온 제수를 펼치고 반세기 만의 제사를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첫 관광객의 압도적 다수는 늙은 실향민. 집을 나서기 전 자식들을 불러모아 유산 분배 따위 ‘유언’을 하고 배에 오른 이들이 많았다. ‘공산당이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도 이들의 금강산행을 가로막지 못했다.

 

애초 금강산관광사업은 “일생 소원이 내 고향 금강산을 국제관광단지로 만들어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라던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꿈’에서 시작됐다. 정주영은 금강산 자락 통천에서 나고 자랐는데, 가출하면서 훔친 “아버님의 소 판 돈 70원”을 밑천으로 자전거수리점부터 시작해 한국의 대표적 자본가가 된 입지전적 실향민이다.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정주영의 꿈’이 실현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평안북도 위원에서 나고 자란 실향민이다.

그들 실향민의 처절한 수구초심이 ‘불가능한 꿈’이던 금강산관광을 현실로 만든 힘이자 수호천사다. 그러나 그 수구초심만으로 남북교류협력사에 규모와 위상이 압도적인 금강산관광 10년의 전모를 설명할 순 없다.

1998년 11월18일부터 2008년 7월11일까지 금강산관광을 다녀온 이는 193만4662명(해로관광 55만2998명, 육로관광 138만1664명). 그 숫자만큼 다채로운 금강산행의 사연이 있을 터. 실향노인, 이산가족, 체험학습·수학여행 학생·교사, 가족여행, 오지여행, 호기심 여행….

10여년간 200만 가까운 이들의 금쪽같은 시간과 돈을 쓰게 만든 ‘힘’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단절과 적대의 세월을 끝낼 ‘먼저 온 미래’가 ‘금강산관광 10년’에 숱한 씨앗을 뿌려놓았기 때문이다. ‘금강산관광 10년’은 남과 북이 화해·협력·공존·평화의 마당으로 나아가려면 풀어야 할 난제가 무엇인지, ‘꿈’을 ‘현실’로 바꾸려면 어떤 우여곡절을 견뎌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 산 교육의 장이다. 유엔은 관광을 “평화로 가는 여권”(A passport to peace)이라 했는데, 금강산관광만큼 이런 비유에 맞춤한 게 없다.

출발은 거창했다. 역사적 의미만큼 상업적 기획도 어마어마했다. 정주영한테 ‘금강산관광’은 남북철도연결·서해안산업공단(개성공단)·통신현대화·발전시설사업 등 ‘7대 경협사업’ 현실화의 마중물이었지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정주영은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한테서 ‘7대 경협사업 30년 독점권’을 따냈다) 정주영이 현대 계열사의 정예인력을 끌어모아 남북경협사업 주체로 1999년 2월 ‘주식회사 현대아산’을 따로 만든 까닭이다.

 

현대금강호가 처음 닻을 내린 장전항은 북쪽 동해의 최전선 군사항, 유고급(70t) 잠수정 기지였다. 금강산관광 초기 장전항엔 관광선 바로 옆에 군함이 정박했다. 관광 지속과 함께 장전항을 쓰던 북의 동해함대는 북쪽으로 100㎞ 남짓 물러섰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른 군사분계선 동쪽에 너비 100㎞에 이르는 평화회랑이 만들어진 셈이다.

정주영은 사업 초기 “한해 관광객 50만명 이상”을 자신했다. 관광객 폭주에 따른 혼란을 걱정해 금강호·봉래호의 침실 배정을 자동추첨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을 정도다.

그러나 100만원을 훌쩍 넘는 비싼 관광요금, 편도 14시간에 이르는 지루한 뱃길, 4박5일이라는 긴 여정은, 주머니가 가벼운 시민의 금강산행을 가로막았다.(첫 금강산관광객 1인당 요금은 평균 130만원 선인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 7박8일 관광상품과 같은 수준으로 매우 비쌌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할 금강산의 매력, 실향민의 수구초심 등을 동력으로, 1998년 한달 보름간 1만554명을 시작으로 1999년 14만8074명, 2000년 21만3009명으로 상승세를 타던 금강산관광객은, 2001년 5만7879명으로 급작스레 하락 반전했다. 2002년 1월엔 한달 관광객이 1000여명일 정도로 날개 없이 추락했다. 현대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필요는 변화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양대 사업 주체인 현대와 북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는 무자비한 현실에 적응하려 발버둥쳤다. 애초 관광객 수와 무관하게 한달 1200만달러이던 관광 대가를 2001년 6월부터 한사람당 100달러로 바꿨다. 아태평화위가 현대의 어려움을 고려해 당장의 수입 급감을 감수하기로 했는데, 근본적으론 ‘더 많은 수입’을 위해 현대와 함께 ‘시장의 논리’를 존중하며 관광객을 늘려나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남북 경협사에 분수령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관광 대가 조정은 현대와 아태평화위의 분배 몫 조정일 뿐 관광객 유인책은 될 수 없었다. 2002년 8만4727명, 2003년 7만4334명, 한달 관광객이 1만명도 안 됐다.

그사이 정주영이 숨을 멈췄고(2003년 3월21일), 다섯달도 지나지 않아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003년 8월4일).

 

난파 위기의 금강산관광사업을 살릴 특단의 대책이 시급했다. 현대와 아태평화위는 2003년 9월1일부터 버스로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는 육로관광 상품을 내놨다. ‘중무장한 군사분계선을 버스를 타고 통과해 금강산에 간다’는 육로관광의 개념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해로관광’이라는 악평으로 시들해진 시민의 관심을 일거에 되살렸다.

관광요금도 30만원대로 크게 낮췄다. 2004년엔 ‘당일 관광’과 ‘1박2일 관광’이 새 상품으로 출시됐다. 특히 1인 12만원(학생은 9만원)짜리 당일관광은 금강산관광의 문턱을 크게 낮췄다. 시민들의 주머니 사정과 시간 여유에 맞춘 다양한 상품의 출시는 관광객 폭증으로 이어졌다.

수년째 10만명 아래에서 맴돌던 금강산관광객은, 2004년 26만8420명→2005년 29만8247명→2006년 23만4446명→2007년 34만5006명으로 상승곡선을 그렸다. 2007년 10월엔 6만3천명이 금강산을 다녀가 ‘월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2008년 3월17일부터는 자기 차로 금강산에 다녀올 수 있는 ‘승용차관광 상품’도 출시됐다.

관광상품만 다양해진 게 아니었다. 관광 초기 관광로 양편에서 집총 자세로 눈을 부라리던 인민군이 사라지고, 온정각~금강산호텔 사이 솔숲길을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게 ‘자유’가 늘었다. 10달러만 더 내면 ‘조선의 4대 온천’으로 유명한 금강산온천에 몸을 담글 수 있게 됐다.

여름엔 항아리 모양의 장전항 바다에서 해수욕하고 모래사장에서 야영할 수 있게 됐다. 2006년부터는 금강원·목란관·단풍관 등 북쪽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평양냉면과 꿩고기 등 북쪽의 고급 요리를 사먹을 수 있게 됐고, 야간엔 숙소 주변의 ‘온정리포장마차’에서 금강산의 밤하늘과 별무리를 보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게 됐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현대아산의 금강산관광사업은 2005년 흑자로 돌아섰다.

 

‘민족사업’이란 대의를 앞세워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비싸고 불편한 관광’에 대한 사람들의 외면으로 한때 파산의 벼랑에 몰렸다. 그러나 남과 북은 군사분계선을 열어 육로관광·당일관광·승용차관광을 성사시키며, 남북경협의 유전자(DNA)에 ‘사용자 편의성’과 ‘경제성’을 새겨넣었다.

 

‘금강산관광 10년’은 지속가능한 남북교류협력사업의 산증인이자 나침반이다.

2008년 7월11일 이른 새벽,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장전항 해변을 산책하던 관광객이 인민군 초병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관광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