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호텔 영빈관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 만찬은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다. 국빈 만찬·행사가 열리는 청와대 영빈관 외에 고급 예식 장소로도 유명한 신라호텔 본관 아래쪽 1000평가량 한옥 건물도 ‘영빈관’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
신라호텔 영빈관은 근현대사의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1900년 고종 황제는 이곳에 을미사변(1895) 때 명성황후를 지키려다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과 제단을 짓고 장충단비를 세웠다.
일제는 조선 병탄 이후 사당을 헐고 비석을 뽑은 뒤, 1932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절을 지어, 매년 이토의 추도식을 열었다. 1939년 상하이에 머물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1907~1951)을 불러와, 이토의 차남 분키치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드립니다”라고 직접 말하게 한 곳도 이곳 박문사였다.
해방 직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국군 장병들을 기리는 ‘충혼전’으로 바뀌었다. 1956년 동작동 국립묘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이곳은 국립묘지 기능을 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에 국빈이 묵을 영빈관을 신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4·19혁명, 5·16쿠데타 등으로 공사는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다 1967년에야 완공됐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국빈 숙소로 활용하다, 재정부담으로 1973년 영빈관과 인근 2만8천여평을 삼성에 28억원에 팔았다. 삼성은 영빈관 위쪽에 신라호텔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박정희 정부는 1978년 청와대 입구 쪽에 별도의 영빈관을 지었고, 그해 말 9대 대통령 취임식 때부터 취임 만찬 장소로 사용돼왔다. 청와대 영빈관 자리는 일제 관사가 있던 곳으로, 해방 이후 정부 공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60년 4월 이기붕 부통령 일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도 이곳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부인 김건희씨가 <서울의소리> 기자와 나누던 대화에서 기자가 “내가 아는 도사가 청와대 들어가자마자 영빈관을 옮겨야 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하자, 김씨가 “응 옮길 거야”라고 말한 게 녹취록으로 공개된 바 있다.
대통령 취임 만찬이 민간 호텔에서 열리게 된 건, 취임 ‘당일’ 청와대를 시민에게 개방하겠다는 윤 당선자 뜻에 따라, 이날부터 청와대 영빈관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권태호 논설위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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