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빵플레이션’이 경고하는 미래

道雨 2022. 7. 26. 09:24

‘빵플레이션’이 경고하는 미래

 

 

이따금 장을 보는 대형마트에서 라면이 몇 종류나 되는지 세어본 일이 있다. ‘매운맛’을 자랑하는 챔피언부터 ‘식물성’을 강조하는 도전자까지 화려한 포장의 봉지라면만 수십 종. 컵라면을 포함하면 100가지를 훌쩍 넘었다. 개당 몇백원에서 1천원대에 따끈하고 맛있는 한 끼가 되어주는 라면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피자도 1만~2만원대면 여럿이 둘러앉아 한두 조각씩 즐길 수 있는 일상의 별미가 됐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밀가루 음식들이 언제까지나 ‘착한 가격’으로 우리 곁에 남을 수 있을까?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재난, 우크라이나 전쟁이 몰고 온 곡물파동을 보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진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밀 등 국제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세계 밀 수출의 30%가량을 맡아온 러시아·우크라이나는 전쟁 여파로 수출이 어려워졌고, 밀 생산량 세계 2위인 인도는 자국민을 위해 밀 수출을 금지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공급망에 차질이 생긴데다, 기후변화에 따른 작황 부진, 전쟁이 겹치니 식량위기와 물가상승 충격파가 세계 곳곳을 강타한다.

 

국내에서도 ‘빵플레이션’이 시작됐다. 밀가루 등 재료비가 오르니 빵값도 오른다. 짜장면과 샌드위치 등의 가격이 인상돼 점심 외식이 부담스럽다는 ‘런치플레이션’도 유행어가 됐다. 여러 곡물 중 특히 밀이 문제가 되는 것은, 쌀에 이어 국내 소비량 2위지만 자급률은 1%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020년 기준 45.8%, 축산 사료를 포함한 곡물자급률은 20.2%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다. 쌀은 90% 이상 자급이 되지만, 밀은 99% 이상 수입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그룹이 발표하는 식량안보지수에서도 한국은 오이시디 최하위권이다. 식량무기화 등 위기가 닥치면 산업화한 국가 중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할 곳이 한국이라는 뜻이다.

 

만일 웃돈을 주고도 밀을 수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쌀가루 등 대안을 찾는다고 해도, 제과, 제빵, 가공식품, 외식, 유통 등 관련 산업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식량안보는 갈수록 더 취약해질 조짐이다. 해마다 서울 면적 4분의 1에 해당하는 1만5천여헥타르 농지가 공단, 도로 등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농가 인구 220만명 중 60%가 60대 이상이라는 것도 미래를 어둡게 한다. 기후변화로 가뭄·홍수 등의 재난과 병충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정해진 미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라면과 빵, 짜장면과 피자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국가 차원의 농민수당을 도입하고, 농지를 보전하며, 농촌에 공공주택을 지어 젊은 세대의 정착을 돕자고 제안했다. 꼭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사람 등 농촌거주자 모두에게 수당을 주어, ‘사람이 머무는 농촌’을 만들자는 것이 농민기본소득 구상이다. 또 용도변경을 제한해 농사지을 땅을 지키고, 살 만한 집을 지어 귀농하는 사람들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국산밀산업협회 등 농민단체들은 이에 더해 ‘전략작물직불금’ 등 직접 지원을 늘려, 국내 수요가 많은 밀, 콩 등의 자급률을 높이자고 요구한다. 이들은 일본이 4%까지 떨어졌던 밀 자급률을 직불금을 통해 17%로 올린 것을 모범 사례로 들고 있다.

 

 

<식량위기 대한민국>을 쓴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등은 국제곡물수급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활용할 것, 스마트팜 등 과학영농 투자를 늘릴 것을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또 주요 곡물 수입을 4~5개 나라에 의존하는 우리와 달리 수입선을 170개국으로 다변화해 식량안보지수를 높인 싱가포르를 참고하라고 권한다.

 

사실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선진국 대부분은 식량자급률이 높은 농축산 수출국이다. 이들은 ‘식량안보가 국방만큼 중요하다’는 태세로 농업농촌을 지원한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수도권 1극 체제’가 아니라 농어촌을 포함한 지방이 비교적 고루 발전한 나라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 전국 농어촌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균형발전정책은 ‘지역소멸’을 막는 시대적 과제이면서, 장차 무시무시한 ‘빵플레이션’을 막을 식량안보의 해법이기도 하다.

 

 

 

제정임 ㅣ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