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용공(조작) 사건

50년 전 간첩으로 몰린 납북어부의 눈물[국가폭력 224건, 그 후]

道雨 2022. 9. 2. 10:26

50년 전 간첩으로 몰린 납북어부의 눈물[국가폭력 224건, 그 후]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추적, 그 후

 

* 신평옥씨 부부는 50년 전 일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 풀린 듯 한 표정을 지었다. | 전현진 기자

 

 

여수 화정면 적금리. 여수엑스포역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차로 1시간이면 도착하는 섬마을이다. 몇 해 전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생겼다. 지난 7월 28일, 한 노인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한적한 어촌 마을의 부둣가에 차를 세워 걸음을 옮겼다. 얕은 언덕 위 빨간 지붕의 시골집 입구에 살구나무가 그늘을 드리웠다. 마당엔 깨와 고추가 널렸다. 처마 밑에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세요? 신평옥 선생님 댁인가요?.”

인사를 건네자 흰머리를 한 노인이 굽은 허리를 하고 다가왔다. 신평옥씨(83)였다.

2005~2006년 대법원이 문제가 있다고 꼽은 과거사 사건 224건을 취재하는 중이었다. 신씨는 당사자 중 한 사람이다. 50년 전 조업 중 납북된 뒤 귀환해 간첩죄로 처벌받았다. 옛 신문 기사에서 그를 발견했다. 재심도 받지 않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 없어 그의 주소지를 무턱대고 찾아갔다. 간첩으로 몰린 이들은 고향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허탕을 감수했다.

“서울에서 온 기자입니다.”

“아이구.”

그는 아내와 이 집에서 평생을 살고 있었다. 명함을 건네고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하자 신씨는 살구나무 그늘에 놓인 의자로 안내했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니까 당당했다고. 그래서 상고를 하려고 했는데 상고장을 써줄 사람이 없어서 직접 썼거든….”

신평옥씨는 다 빠진 앞니를 가리키며 “발음이 안 좋아서”라고 웃었다. 기자가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 걱정하며 두서없이 쌓아둔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 마현자씨가 곁에서 거들었다.

부부는 이젠 뱃일은 하지 않고, 고구마 농사를 한다.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해 둘 다 햇볕에 온몸이 그을렸다. 손가락 마디가 두툼했다.

이야기하던 중 신평옥씨는 눈을 비볐다. 엄한 아버지였던 신평옥씨가 처음 만나는 30대 남자 기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형법 교과서에도 실린 73도1684

1971년 5월 15일, 전북 군산항을 떠난 유자망 어선 동림호의 선장 신평옥씨. 그가 이 배의 선장으로 일한 지 2년쯤 됐다. 어청도 인근이 목적지다. 며칠 동안 정신없이 조기 조업을 벌이다 20일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다.

다른 곳에서 붙들린 어부들도 있었다. 신평옥씨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 부모님이 걱정됐다. 1년 뒤인 1972년 5월10일, 드디어 돌아왔지만 집에 갈 수 없었다.

끌려가 조사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그가 고의로 어로한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탈출했고, 사상교육을 받고 북 체제를 찬양한 뒤 국가기밀을 누설하고 간첩 지령을 받아 귀국했다는 혐의다.

1~2심에서 징역 1년6개월,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북한으로 ‘탈출’한 혐의는 유죄로 인정됐다. 해경 경비정이 “납북 우려가 있으니 귀환하라”고 경고했음에도 무시하고 조업을 했다는 검찰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간첩 혐의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북한에 납치된 뒤 한 행동은 생명을 위협받는 강요된 상황이었다는 점, 간첩을 목적으로 북한에 간 것이 아니라 점이 무죄 이유로 꼽혔다.

신평옥씨는 억울했다. 일부러 북한 해역을 넘은 게 아니라고 했다. 해경으로부터 월북이 아니라 “어획선 선단에 가입되지 않았다”는 경고를 받았다고 했다. 이미 월북상태라면 해경에 끌려갔어야 하지 않냐고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신평옥씨가 고의로 북한 해역에 넘어간 것으로 판단한 뒤, 그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는지 증명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생명의 위협 등을 예측할 수 있고 이를 자초했다면 강요된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다.

대법원은 “자의로 들어간 이상 북괴집단의 구성원과 회합이 있을 것이라는 미필적 예측이라도 하였다고 인정함이 타당”하다고 했다. 납북을 자초했으니, 이후의 행위는 강요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간첩죄 등을 무죄로 판단한 하급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했다.

73도1684. 대법원판결의 사건번호다. 형법 교과서에서 ‘기대가능성과 강요된 행위’라는 법리를 설명할 때 나오는 주요 판례 중 하나다.

* 1973년 9월13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대법원 선고 기사. 신평옥씨의 간첩 혐의를 유죄 취지로 환송한다는 내용이다.

 

 

 

신평옥씨에겐 징역 1년6월이 확정됐다. 법원은 그가 호소한 억울함을 제대로 따지지 않았다. 신평옥씨는 1972년 5월 10일 귀환해 바로 어딘가에서 조사받았고, 1972년 6월 9일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귀환 후 구속까지, 불법 구금이 의심됐다. 하지만 법원은 따져 묻지 않았다.

신평옥씨는 당시 인근에 해군과 해경이 있었다고 했다. 안개가 끼자 함선이 떠나갔고 그물을 걷어올리던 중 납치됐다. 사건의 본질은 거꾸로 ‘해군과 해경이 우리 어민을 지켜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해경 경비선이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줬으면 끌려가지 않았을 텐데.” 마현자씨가 말했다.

 

■실체 파악도 쉽지 않았던 224건

 

옥살이를 마친 신평옥씨는 1974년 1월 15일 출소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신평옥씨는 이후엔 작은 낭장망 어선을 타고 멸치를 잡아 생계를 이었다. 신평옥씨가 그물을 털어 오면 아내가 멸치에 소금을 치고 삶아 자갈 위에 말렸다. 그렇게 자녀들을 키웠다.

“재심은 해보려고 안 했나요?”

신평옥씨는 고개를 저었다. 억울하지만 그저 참고 지냈다. 10여 년 전에 누군가 찾아온 적이 있다. “이북에 갔다 온 게 맞냐”고 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재심을 제안하러 온 이들인지도 모른다. 신평옥씨는 경계하며 ‘아무것도 모른다’고 쫓아냈었다.

‘대법원 서랍속 국가폭력 기록 224건’을 취재하면서 중점을 둔 건 재심을 하지 않은 당사자를 찾는 일이었다. 과거사 단체, 변호사 및 전문가들에게 문의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신평옥씨를 만난 것은 취재하던 중 그의 과거 주소지를 알게 됐고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던 덕분이었다.

224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 자체도 쉽지 않았다. 지난 4월 정보공개 청구로 입수한 224건 목록은 당사자명이나 사건 설명 없이 각급 법원이 판결한 사건번호 598건이 나열된 형태였다. 잘못 쓰였거나 빠진 것도 있어 하나하나 살펴야 했다.

당시 대법원 관계자들의 입장과 224건을 만든 경위를 취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유명 법조인이었고, 국회에서 논의된 회의록 역시 남아있었다.

우선 판결문 검색이 가능한 경기 일산의 법원도서관 특별열람실을 이용했다. 문제는 224건이 선고된 1970~1980년대 판결문은 대법원 상고심을 빼면 전산화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상고심만으로는 사건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법리적 판단을 하는 상고심 판결문엔 사건의 육하원칙이 담기지 않았다. 이런 내용이 담긴 하급심 판결은 전산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224건의 판결문을 모두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과거 판결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는데, 사건번호로는 찾을 수도 없다고 했다. 당사자 이름으로 찾을 수 있지만, 본인이 아니면 제공해주지 않는다. 수소문 끝에 재심이 완료된 40여 건의 과거사 사건 판결문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상고심 판결에 담긴 제한적인 정보가 유일한 단서였다. 특별열람실에서는 법원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메모지와 사인펜으로 법원명과 사건번호만 적을 수 있다. 휴대폰도 쓸 수 없다. 적을 수 없는 정보는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용 시간도 제한돼 있어 여러 날을 오가야 했다.

이 내용을 정리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와 경향신문의 데이터베이스 등 과거 언론 보도 등을 찾아 224건을 구체화해 나갔다. 작업은 7월 마무리됐다.

이후엔 당사자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이들도 많았다. 신평옥씨는 이런 작업을 모두 마무리한 뒤 추가 취재 중 만날 수 있었다.

 

* 여수 화정면 적금리는 작은 섬 마을이다. 신평옥씨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집 앞으로 보이는 작은 포구가 조용하다. | 전현진 기자

 

 

■자꾸만 ‘고맙다’한 이유

 

신평옥씨는 출소한 직후 여수경찰서 형사들이 따라다녔다. 그들은 “전향하라”고 했다. 그때마다 그는 “저는 원래 대한민국 사람입니다”라며 거절했다.

“간첩으로 엮어 넣을 구실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럼 한 계급씩 특진하니까.”

신평옥씨는 이후엔 간첩으로 몰리지 않았다. 귀환 몇 해 지나 간첩으로 몰려 다시 처벌받는 어부들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막내딸인 신형란씨는 “아버지가 예전 일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가 직접 말해주지 않아도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없을 리 없었다. 적금국민학교 시절 어린이들을 청와대에 초청하는 행사에 인솔자로 따라간 신평옥씨가 신원조회 대상이 됐다. 신형란씨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마을 주민 중 아직도 술에 취하면 신평옥씨에게 ‘빨갱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속상한 일이었지만 신평옥씨는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가족들을 보살폈다.

몇 해 전 전복 사업을 하던 신평옥씨가 고소를 당했다.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지만 신평옥씨는 경찰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가지 못했다. 딸 형란씨가 아버지를 대신해 경찰서에 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예전에 북한에 갔다 와서 사면되셨네요.”

담당 경찰관이 기록을 살펴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감정이 격해졌던 형란씨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줘야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피고소 사건은 무죄로 마무리됐지만 신평옥씨는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경찰서나 법원에 가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면서 힘들어했다. 충격을 크게 받아 정신과 진료도 받아야 했다.

신형란씨는 기자가 찾아간 날 부모님이 기뻐하셨다며 이메일을 보내왔다. 아버지가 더 연로해지기 전 명예를 회복해드려야겠다는 이야기를 형제들과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서를 냈고, 재심 청구를 위해 사건 기록들을 확인하고 있다. 변호사와도 상담할 예정이다.

신평옥씨는 북한에서 돌아온 날 고문을 당했다고 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가족들에게도 감춘 채 살았다. 그런 그가 처음 본 기자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고 하자, 신형란씨는 놀라워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신평옥씨 부부와 인사를 나눴다. 수십 년 자란 살구나무 그늘 아래서 부부는 자꾸만 ‘고맙다’고 했다. 가슴 속 응어리가 조금 풀린 듯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50년이 걸렸다.

 

 

                        * 살구나무 아래에서 작별 인사하는 신평옥씨 부부. | 전현진 기자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은 현재진행형이다. 1일 오후 열린 재심에서 또 무죄가 선고됐다. 1976년 10월 발표된 ‘거문도 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224건 중 83번째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재판장 정진아)는 이 사건의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이미 고인이 된 두 사람까지 모두 5명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남파된 뒤 자수한 공작원 김용규 진술로 시작된 이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들이 “김용규의 혼란스러운 진술에 맞춰 수사기관에서 반복되고 집요한 질문으로 재구성됐다”며 “국가폭력이 개입됐다는 강한 의심이 들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폭력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중 가장 극악한 것이 국가폭력입니다. 국가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이 소회를 밝혔다.

 

“과거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분들께 시민이자 사법부 구성원으로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 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이른바 ‘거문도 간첩단’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무죄가 선고된 뒤 법정을 찾은 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