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영국의 윤석열, 한국의 트러스

道雨 2022. 10. 18. 09:03

영국의 윤석열, 한국의 트러스

 

 

 

“당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 아닙니까, 총리님?”

8분 만에 기자회견을 서둘러 마치던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의 뒤통수에 한 기자가 소리쳤다.

 

트러스는 지난 14일 재원 없는 감세안으로 영국 금융시장에 대혼란을 몰고 온 책임을 물어, 쿼지 콰텡 재무장관 해임을 발표하는 회견에서 “나는 솔직하기를 원한다. 어렵지만, 우리는 이 폭풍을 헤쳐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는 지난 9월6일 취임한 지 한달도 안 돼서, 집권 보수당 지지율을 19%까지 자유낙하시키는 등, 서방 국가의 정치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적’을 구현하고 있다.

영국의 황색신문 <데일리 스타>는 트러스와 상추 한다발을 나란히 놓고는 누가 더 오래갈지를 보여주는 실시간 웹캠 사이트를 개설했다.

 

트러스의 감세안은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삭감이 경제성장을 촉진해, 그 과실이 하류층으로 흘러내릴 것이다’라는 낙수효과에 기댄, 1980년대 초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에 기반했다.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노믹스가 경기침체에 빠진 경제를 폭력적으로 구조조정하는 효과로 경기 활성화에 일조했을지는 모르나, 결국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국가 부채를 증대했다는 지적은 일단 제쳐두자.

 

트러스의 감세안에 시장은 즉각 영국이 먹고사는 런던 금융시장 붕괴를 우려했다. 재원 없는 감세는 정부 부채를 증가시켜 파운드화와 국채를 폭락시킬 것으로 우려했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됐다. 물가 오름세 상황에서 금리 인상 등 통화 긴축을 펼치려는 중앙은행의 정책에 반하고, 결국은 영국 국채 이자율 등 금리 인상만 재촉할 것으로 우려됐다.

부자감세와 정부 지출 삭감은 물가 오름세에 가장 고통받는 서민들의 부담만 가중할 것이 분명했다.

 

감세안은 당대표 경선 때부터 당 내부와 시장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나 트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금융시장이 폭락하는데도 트러스는 “성장, 성장, 성장”이라며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감세안을 실무적으로 작성한 쿼지 콰텡과 ‘가미카제 특공대’의 이름을 빗대 ‘카미쿼지 예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국을 폭격하는 자살 폭탄이 됐다.

 

트러스의 조기 몰락은, 주술에 기대는 부두교에 빗대서 ‘부두 경제학’으로까지 폄하되는, 40년 전의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에 대한 종교적인 집착, 이를 고집하는 불통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집착과 불통이 어디서 기인했느냐는 것이다.

 

트러스는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파티게이트 등의 스캔들로 낙마한 뒤 치러진 당대표 경선에서 승리해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그의 당대표 경선 승리의 결정적 동인이 바로 문제의 감세안이었다.

 

그는 6700만명의 영국 국민이나 시장보다는 16만명의 보수당 대의원 등 투표권을 가진 당원들을 겨냥해 감세안을 던졌다. 총리 경쟁자가 존슨 내각에서 법인세 인상을 입안한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어서, 증세에 부정적이던 보수당의 기득권층 당원에게 감세안은 더 위력을 발휘했다. 트러스를 지지한 이들은 상속세 폐지까지 주장하며, 지금도 감세안 추진을 압박한다.

 

트러스는 보수당의 기존 기득권층만 바라보는 착각을 했다. 2019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의회 과반 의석을 80석이나 초과하는, 1987년 이후 최대 승리를 거뒀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찬성한 기존 노동당의 지지층인 ‘레드 월’이 보수당에 가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연합 탈퇴로 자국의 노동대중이 우선 대우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반면, 보수당의 기득권층은 유럽연합 탈퇴로 자유로운 규제 완화와 세금 삭감을 기대했다. 트러스가 감세안으로 기득권층만 편들자 역풍이 몰아친 것이다.

 

트러스의 처지는 윤석열 대통령과 겹쳐진다. 성장을 내세운 트러스는 영국의 마이너스 성장을 재촉했다. 공정을 내세운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등 주변의 문제에는 눈감고 당 안팎의 비판자들을 검찰권으로 잡도리한다. 트러스는 감세안으로 경제를 망쳐놓고도 사과를 않고, 윤 대통령은 각종 막말로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고도 사과를 않는다. 트러스는 격변하는 경제 상황에서 감세만 타령하고, 윤 대통령은 격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일본과의 안보협력 타령만 한다.

트러스는 대처를 흉내 내고, 윤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흉내 낸다. 이 대통령이 ‘쿨했다’며 그의 사람들을 기용하며 정책도 따라 한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집권 이후 지지층에서 덫에 걸렸다. 트러스는 보수당 대승을 부른 확장된 지지층 중에서 고루한 기득권층에만 기대고 있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대선 승리에 보탬이 된 2030세대 등을 내치고는, 전통적인 극우보수층과 영남권에만 구애한다. ‘막말러’들인 김문수와 이은재의 중용을 봐라.

 

두 사람은 서로에 빙의해서 영국의 윤석열, 한국의 트러스가 되고 있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