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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강경책·북한붕괴론…한반도를 어둠으로

道雨 2022. 10. 18. 09:17

이명박 정부의 강경책·북한붕괴론…한반도를 어둠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선언’(2007년 10월4일, ‘10·4 정상선언’)을, 2008년 2월25일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전적으로 무시·거부했다. 이명박 정부 임기 5년간 대화는 갈등과 충돌로 대체됐다. 10·4 정상선언이 품은 희망의 푸른빛은 절망의 어둠에 갇혔다.

 

“통일부를 폐지하겠다”는 선언이 앞날의 모든 혼란과 절망을 예고했다. 2008년 1월16일, 이명박 정부 출범을 준비하던 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외교통상부와 통일부를 합쳐 외교통일부로 개편하겠다는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말만 통폐합일 뿐 사실상 통일부를 없애겠다는 발표였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통일부 폐지가 대통령 당선자(이명박)의 지시라고 공식 확인했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 폐지 방침은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수관계”(통일 지향 특수관계)로 규정해, 서로를 ‘외국’으로 대하지 않기로 한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처사였다.

‘작은정부론’을 앞세워 외교부에 합병시키는 방식으로 통일부를 해체하려던 이명박 정부의 무리수는 “통일부를 없애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힐난이 아니더라도, 그야말로 초당파적 여론의 반발에 무릎을 꿇었다.

민주당 정부의 임동원·정세현·이종석은 물론 ‘전두환의 괴벨스’로 불린 허문도까지, 역대 통일부 장관의 예외 없는 통일부 폐지 반대는 이 문제가 진보만의 의제가 아님을 웅변한다.

 

‘통일부 해체 실패’는 이명박 정부에 교훈이 아닌 오기를 심어준 듯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3월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열린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 부정을 공식화했다. 통일부 업무보고와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은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10·4 정상선언의 핵심 사업인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건설, 조선 협력단지 건설, 개성~신의주 철도 개보수 등 대형 인프라 협력사업과 관련한 언급도 전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과거처럼은 안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상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전면적 단절 선언이었다. ‘10·4 정상선언’을 “북남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지침”이라며 승계·이행을 촉구해온 북쪽에 좋은 신호일 까닭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핵·개방·3000 구상’을 대표 대북정책으로 내세웠다. 북이 핵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개방에 나서면 10년 안에 1인당 소득을 3000달러로 만들어주겠다는 ‘비핵화 먼저’를 요구하는 시혜적 시선의 정책이었다. 북은 “이명박 역도” 운운하는 욕설로 응답했다.

“이명박 역도의 개방 넋두리는 결국 반북대결을 고취하기 위한 반민족 궤변이고 북남관계를 전면 부정하는 반통일적 망동”이자 “우리의 존엄과 체제에 대한 용납 못할 도발”이라는 것이다.(<노동신문> 2008년 4월1일치 논평)

 

남북 사이 긴장이 높아가던 와중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불행한 사태가 터졌다. 2008년 7월11일 이른 새벽 금강산 장전항 해수욕장을 산책하다 통제구역을 벗어난 관광객 박왕자씨가 조선인민군 초병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튿날 이명박 정부는 금강산관광 중단을 선언하고 관광객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박왕자씨 피격 사망과 관련해 유감을 표시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금강산관광 중단 조처를 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6자회담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2008년 북·미는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6자회담 합의 사항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시엔엔>(CNN)의 생중계 속에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했다(2008년 6월27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적성국교역법’ 적용 해제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지시했다. 국무부는 그해 10월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강경파와 손잡고 ‘북핵 검증’을 빌미로 6자회담의 좌초를 도모했다. 마침내 그들의 바람대로 2008년 12월8~11일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수석대표 회의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처 검증방법 합의에 실패했다. 6자회담은 그 뒤로 지금까지 다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운명의 2009·2010년, 남과 북은 ‘난타전’을 벌였다. 2010년 3월26일 금요일 늦은 밤 백령도 서남쪽 1.8㎞ 해역을 지나던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 소형 잠수함정으로부터 발사된 어뢰에 의한 외부 수중폭발로 침몰”(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 발표)했다. 천안함에 타고 있던 해군장병 46명이 수장됐다. 2009년 11월10일 서해 대청도 근처 북방한계선(NLL) 해상에서 남쪽 해군이 북쪽 경비정 ‘등산곶 383호’(150t)를 교전 끝에 반파시킨 지 137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을 뺀 모든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금지하는 ‘5·24 대북제재’로 응수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 투자마저 금지한 고강도 대응이었다.

남북 경제협력 통계를 시작한 1989년 이후 남북 사이 숱한 대화 중단과 군사적 충돌에도 단 한번도 중단한 적 없던 교역과 위탁가공을 이명박 정부는 전면 금지했다.

 

‘대북제재’라는 5·24 조처는 자해 조처였다. 5·24 조처로 북이 입은 피해(8억달러)는 남쪽 기업의 직접 피해(45억달러)의 19.3%라고,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남북경제협력 실태조사단은 2011년 9월 백서에서 추산했다. 5·24 조처 이후 개성공단의 고속성장 추세가 꺾였다.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4분부터 2시55분까지, 오후 3시10분부터 3시41분까지 북한이 해안포와 곡사포 100여발을 연평도로 발사했고, 이 가운데 수십발이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로 떨어졌다”.(합동참모본부 발표) 해병대 장병 2명, 그리고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를 하던 김치백·배복철씨가 숨졌다. 1970년대 이후 첫 포격전과 민간인 사망에 여론이 들끓었고, 남북관계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빨려들어갔다.

 

남북관계가 엉망으로 뒤엉킨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느닷없이 “통일은 반드시 온다”며 ‘통일세’ 신설을 제안했다. 그러곤 “통일이 가까운 것을 느낀다”(2010년 12월9일 말레이시아 동포간담회)거나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2011년 6월21일 민주평통 간부위원 임명장 수여식)이라며, ‘북한 붕괴론’을 쉼 없이 제기했다.

 

이 대통령 나름의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악화가 그것이다. 김 위원장은 2008년 9월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60돌 경축 열병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제기된 건강이상설은 그가 2009년 1월23일 평양을 찾은 왕자루이 중국공산당 중앙위 대외연락부장을 만난 뒤에야 가라앉았다.

사실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프랑스 의사와 중국 의료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했다. 당시 국가정보원과 미 중앙정보국(CIA)이 김 위원장의 뇌 시티(CT·컴퓨터단층촬영) 사진을 구해 정밀 분석한 뒤 “3~5년 안 사망”을 예상했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한·미 양국 소식통”의 말을 따서 뒷날(2016년 12월23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뇌졸중에서 회복한 뒤 2010년 9월28일 44년 만에 조선노동당 대표자회를 소집해, 20대인 아들 김정은으로의 ‘3세 승계’를 공식화했다. 2010~2011년 이태 동안 중국을 세차례(2010년 5월3~7일과 8월26~30일, 2011년 5월20~27일), 러시아를 한차례(2011년 8월20~27일) 오가며 뒷배를 다졌다.

예컨대 김 위원장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조중친선의 바통을 후대들에게 잘 넘겨주고 그것을 대를 이어 강화발전시켜나가도록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지닌 중대한 역사적 사명”이라고 거듭 호소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이런 분주한 행보를 ‘북한 붕괴’의 전조라 믿고 싶었던 듯하다. 무엇보다 ‘북한이 곧 망할 것’이라는 믿음의 확산은, 대북정책의 실패를 합리화하는 데 맞춤한 핑곗거리였다.

 

김정일 위원장이 2011년 12월17일 숨을 멈췄다.

그래서 개신교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의 ‘예언’대로 “통일이 한밤중에 도둑처럼” 왔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망했나?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