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북한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것

道雨 2022. 10. 19. 09:15

북한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것

 

 

 

 

2017년 독일에서 나는 북한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 자신의 전쟁 불감증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멀리서 보니 비로소 보였다.

 

그해 가을 김정은과 트럼프의 막말 공방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세계 언론이 한목소리로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우려하던 시기에, 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실로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독일 언론은 연일 ‘한반도 전쟁 위기’라는 제목 아래 한반도 상황을 주요 뉴스로 상세히 전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한국인들이 보인 태도는 참으로 이상했다. 전세계가 한반도 전쟁을 경고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인들에게서는 어떤 위기의식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공영방송(ARD, ZDF)과 최고의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긴박하게 ‘전쟁 임박’을 톱뉴스로 타전하던 날, 걱정 끝에 한국의 상황을 살피려고 네이버에 들어간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류현진 등판 일정”이 검색어 1위, 어떤 연예인의 “셋째 임신”이 검색어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서도 전쟁의 낌새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곧 전쟁이 터진다는데 이리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초연’할 수 있단 말인가. 독일 언론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보다 한국인들의 ‘전쟁 불감증’에 더 놀라워했다.

 

독일(혹은 세계) 언론이 호들갑을 떤 것인지, 아니면 한국인들이 지극히 부적절한 행동을 보인 것인지, 이제 우리는 안다. 당시 한반도가 실제로 전쟁 직전의 위기 상황까지 갔었음을 미국 고위 군 관계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빈센트 브룩스는 “전쟁에 가까워진” 상태였으며 미국은 군사적으로 “모든 선택지를 검토했다”고 회고했고, 미군 합참의장 출신 마이클 멀린은 2017년 말 한 방송에 나와, 미국과 북한 사이에 “핵전쟁이 가까워졌다”고 경고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제임스 매티스의 증언이다. 그는 2017년 위기 때 ‘워싱턴 국립대성당을 찾아가 수백만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 전쟁 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얘기들이다. 돌아보면 이제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2017년 말 북핵 위기 때 독일을 비롯한 서방 언론은 다양한 정보를 토대로 트럼프의 군사적 공격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고, 전 미군 합참의장까지도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책임자인 국방장관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할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종교적 위안을 구하고 있었고, 한반도 현지 군사책임자는 모든 군사적 선택지에 대한 검토를 완료한 상태였다. 실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던 것이다.

 

2017년 북핵 위기가, 또다시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2022년 한반도에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가장 위험한 것은 북한의 핵무기가 아니라, 전쟁 위기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가해한 무감각과 무관심,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병리현상의 근원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무력감과 패배주의라는 사실이다.

식민과 분단, 냉전과 내전,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에서 자라난 뿌리 깊은 무력감과 습성화된 패배의식이, 전쟁의 위기 앞에서도 이처럼 비이성적인 숙명론적 태도를 잉태한 것이다.

 

북한의 핵 위협보다 더 끔찍한 것은 수백만 한국인의 목숨이 타국 국방부 장관의 ‘기도’에 달려 있었다는 그로테스크한 상황이다. 정신의학자들에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진단을 받은 다른 나라 대통령의 결정에 우리 민족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는, 이 부조리한 상황 자체가 끔찍한 것이다.

 

북한 핵의 위협을 둘러싸고 정치인과 학자들이 모여 연일 공방을 벌이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 근대국가의 기본이념인 민족자결과 국민주권이 결여된 대한민국의 비현실적 현실 자체가 북핵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지금 세계는 신냉전의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면서 3차 세계대전의 암운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한반도와 동북아는 전쟁의 뇌관이 폭발할 수 있는 가장 예민한 위험지대다. ‘한반도에서 절대로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언명령이다. 2017년의 전쟁 위기가 반복돼서도 안 되지만, 그때처럼 전쟁 불감증이 재발해서도 안 된다.

 

지금 위험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 지도자들의 전쟁 불감증이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인식 없이 내지르는 이들의 대결주의와 모험주의의 언어가 한반도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 큰일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