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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한국의 책임

道雨 2022. 10. 19. 09:44

선진국 한국의 책임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020년대 초반 한국은 ‘선진국’으로 공인됐다. ‘선진국’이라는 말은 ‘부자 나라’의 의미도 포함하지만, 단순히 일정 수준 이상의 1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부유한 나라라고 해서 바로 ‘선진국’이 되지는 않는다. 카타르의 1인당 국민소득(약 5만7천달러)은 한국(약 3만4천달러)보다 훨씬 많지만, 세계인들은 군주국인 카타르를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등 복잡한 권력교체 과정이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의 명실상부한 ‘선진성’을 입증한 가장 결정적인 국면이었다.

 

한국과 함께 과거의 식민지로서 ‘부자 나라’ 대열에 오른 흔치 않은 경우 중 하나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거의 2배 가까이 많지만, 싱가포르의 ‘선진성’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도 카타르와 동일하다. 비록 겉으로는 의회민주주의가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한번도 권력교체가 이뤄진 적이 없는 나라를 ‘선진국’으로 보기는 힘들다.

 

한데 선진국이라고 하는 것은 훈장처럼 자랑할 것만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산업화 과정을 통과하고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면, 이제 국내인뿐만 아니라 외부자에도 일정한 책임을 지게 돼 있다.

예컨대 ‘부자 나라’인 싱가포르가 난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또 하나의 ‘부자 나라’인 카타르는 지난해 단 197명만 난민으로 수용했다.

 

하지만 이는 세계시민들에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대개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은 동시에 발전하는 법인데, 민주화되지 않은 사회에 난민 인권까지 책임지는 인권적 감수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한데 한국은 민주화된 선진사회인 만큼 한국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들 나라와 다르다. 더군다나 한국은 9년 전부터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기에, 최근 10여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한 세계적인 난민위기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을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다르다.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난민 수용을 위한 법적 제도도 정비돼 있고, 실업률(2.1%)도 유럽연합(EU)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난민 수용 실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2010~2020년 한국의 난민인정률은 1.3%에 불과하다. 폐쇄성으로 악명 높은 일본(0.3%)보다야 좀 높지만, 비민주국가인 러시아(2.7%)보다도 낮다.

참고로, 한국의 보수주의자 사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의 대명사로 통하는 미국의 같은 기간 난민인정률은 25.4%였고, 캐나다는 46.2%에 달했다.

자유주의 정권인 문재인 정권의 마지막 해인 2021년 2341건의 난민 신청 건수 가운데 심사를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32명뿐이었다. 즉,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한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난민 지위 부여에 매우 인색하다.

 

그 인색함의 배경에는 일부 유권자들의 반발에 대한 우려가 있다. 오죽했으면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친서방 정권의 붕괴에 따라 국내에 입국하게 된 사실상의 아프가니스탄 난민 391명에게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란 명칭을 붙였겠는가?

‘특별기여’에 대한 강조는, 일어날지도 모를 일각의 반발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국내 특정 종교의 근본주의적 신도들 일부의 이슬람 혐오가 매우 심한 수준이기에, 당시 정권에서는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그 이름에서부터 ‘특별기여’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국내에서 어차피 아직 한줌도 안 되는 난민인정자(1246명,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 월보’ 2022년 7월호)나 인도적 체류자(2465명)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균적 태도가 적대적인 것도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 난민 수용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북유럽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팀이 지난해 8월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에 대한 찬성은 48%지만 반대는 34%에 불과하다. 이에 더해 국내 거주 난민들의 국적 취득에 대한 지지는 75%, 난민 자녀들에게의 교육 기회 제공에 대한 지지는 77%나 된다.

 

사실, 문제는 일반인보다는 관료와 정치인일 것이다.

권위주의 시절에 뿌리를 두는 한국 관료사회의 외국인 관련 정책의 모델은 본래 구미권도 아닌 일본이었다. 예컨대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을 ‘연수’라는 미명 아래 들여오고, 그 노동자성도 인정하지 않은 채 착취했던 한국의 산업연수생 제도(1991년 도입)는, 1981년부터 일본에서 시행된 같은 이름의 제도를 이식한 것이었다.

구조적 인권유린과 다수 미등록 노동자의 발생 등 폐단이 드러난 뒤 고용허가제로 갈아탔지만, 그 고용허가제 모델 역시 구미권과 달리 외국인 노동자들의 정주를 막고 있는 싱가포르와 대만이었다.

 

이미 다문화 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한국 관료사회는 여전히 인권보다 사회적 통치의 편리, 행정의 편리를 더 중시해, ‘동화’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비동포 비전문직 외국인 남성이나 가족들의 수용에 상당히 소극적이다. 이 범주에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많은 난민 신청자도 포함된다.

 

강경 보수 정치인들은 관료들의 이런 태도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질 일이 없고, 민주화 투쟁을 경험한 자유주의 진영 정치인들은 상당수가 아직도 정신적으로 민주화 투쟁이 오로지 국내 독재 타도만을 의미했던 시절에 살고 있다.

그들은 외국 독재자들이 벌이는 전쟁의 결과 발생한 난민의 수용과 지원도 한국 반독재 운동 후계자들의 책임이라는 세계시민 의식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선진 민주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짊어질 때가 됐다. 예컨대 지금 러시아의 푸틴 독재정권이 벌인 우크라이나 침공 결과, 700만명 넘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주로 유럽으로 피난 가고 있다.

동시에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지 않기 위해 러시아인 약 80만명이 올해 러시아를 탈출했다.

 

한국 정부는 폴란드에서 생계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25억원어치 기부금을 내놓기도 하고, 국내에 이미 와 있는 약 3800명의 우크라이나인의 체류 기간을 연장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선진국과 달리 고려인 이외 우크라이나 난민은 국내에 수용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한국의 국제적 위신에 맞는, 훨씬 더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쳐, 우크라이나 난민과 푸틴의 침략을 거부하는 러시아인을 일부라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국내 다민족 사회의 발전, 옛 소련 지역과의 관계의 심화 등의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조치일 것이다.

선진국이 된 이상, 한국은 그 지위에 걸맞은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마땅하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