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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위기의 수렁에서 피어난 평화의 꽃, 평창올림픽

道雨 2022. 11. 15. 10:44

전쟁위기의 수렁에서 피어난 평화의 꽃, 평창올림픽

 

 

 

* 2018년 2월 평창겨울철올림픽에 출전한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선수들. 이들이 입은 경기복 가슴팍의 ‘한반도기’와 ‘KOREA’라는 국호는 남과 북이 1991년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 지향 특수관계”라는 상호관계 규정의 밝은 면을 드러내는 강력한 상징물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정은 동지는 새형의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5’형의 성공적 발사를 지켜보시면서, 오늘 비로소 국가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케트강국 위업이 실현되었다고 긍지높이 선포하시었다.”

 

2017년 11월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의 한 대목이다.

 

그날 새벽 2시48분 평양 교외에서 발사된 ‘화성-15’형은 “정점고도 4475km, 사거리 950km를 53분간 비행”했다. 고각 발사가 아닌 정상 각도 발사라면 추정 사거리 9000~1만3000km로 미국 전역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유엔은 원유(연 400만배럴)와 정유제품(연 50만배럴)의 대북 공급상한 강화 등의 추가 제재를 담은 안보리 결의 2397호(2017년 12월22일)로 대응했다. 한반도 위기지수가 치솟았다.

 

’화성-15’형 시험 발사가 나쁜 소식만 몰고 온 건 아니다. 전쟁위기의 깊은 어둠에 빛을 품은전환의 씨앗’이 던져졌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국가핵무력 완성” 공개 선언이 그것이다.

 

핵은 지속적인 유지·보수·개발 대상이라 ‘완성’은 논리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공인 핵국가인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는 ‘핵무력 완성’ 선언 따위는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은 “완성”을 입에 담았다. 2013년 3월 ‘경제·핵 병진노선’ 채택 이후 ‘핵실험-제재 강화’ 악순환을 끝내고 싶다‘정치적 신호’ 발신이다. 논리상 ‘완성’은 추가 핵실험과 대륙간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의 필요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행간을 읽어내기 까다로운 북 특유의 어법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행간을 읽었다. 그리고 승부수를 던졌다.

문 대통령은 2017년 12월19일 제23회 겨울철올림픽 개최지인 강원도 평창으로 가는 대통령 전용열차 안에서 미국 <엔비시>(NBC) 방송과 인터뷰를 통해 “한·미 연합훈련의 연기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미국에 이를 제안했고, 미국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미 연합훈련을 ‘북침전쟁 책동’이라 두려워하며 “대북적대시 정책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이라 비난해온 북의 올림픽 참가를 끌어내려는, ‘평창’을 평화를 불러올 다각적 정상외교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포석이었다.

 

사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과 사전 합의 없이 ‘지른’ 것이었다. 위험천만한 모험은 모든 것을 바꿔놓은 ‘신의 한수’가 되어 ‘평창 임시 평화체제’의 문을 활짝 열었다.

흘러가는 정세에 운명을 맡기지 않고, 우리가 주도적으로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의지와 노력이 상황을 반전시켰다”는 문 대통령의 자평(2018년 4월19일 언론사 사장단 초청 청와대 오찬)은 허언이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8년 1월1일 신년사에서 “남조선에서 머지않아 열리는 겨울철올림픽경기대회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로 될 것이며, 우리는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평창올림픽 참가는 물론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까지 제안한 것이다.

 

2018년 1월 한반도에 때이른 평화의 봄바람이 불었다. 남과 북은 1월9일 판문점에서 고위급회담을 열어 북의 평창올림픽 참가에 공식 합의했다.

문 대통령은 1월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떤 군사적 행동도 없을 것”이라는 확언을 끌어냈다.

1월20일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북의 평창 참가와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엔트리 12명 증원) 구성을 승인했다. 남북의 평화 노력에 대한 국제올림픽위원회 차원의 지지 선언인 셈이다.

 

평창올림픽 개막일인 2018년 2월9일 북의 고위급 특사 대표단이 인천공항으로 들어왔다. 명목상 단장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보다 김정은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한테 눈길이 쏠렸다.

김여정 부부장은 2월10일 청와대를 방문해 문 대통령한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하며, ‘편하신 시간에 북을 방문해주시기를 요청한다’는 김 위원장의 초청 의사를 구두로 함께 전했다.

 

따지고 보면 김 위원장의 평창 참가와 제3차 남북정상회담 제안은 모두 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답변의 성격을 띤 것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취임 두달이 되지 않은 2017년 7월6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며 ‘대한민국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을 종합 정리해 발표했다.

그땐 문 대통령의 ‘신베를린선언’에 주목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김 위원장은 미사일을 계속 쏘아올렸고, 이런 김 위원장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가 보지 못했던 화염과 분노에 북한이 직면할 것”이라 엄포를 놨다.

북은 “괌도 주변 포위사격 검토” 운운하더니, 2017년 9월3일 6차 핵실험을 했다.

 

그 와중에도 문 대통령은 평화를 호소하며 평창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문 대통령은 2017년 9월21일(현지시각)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평화의 위기 앞에서 평창이 평화의 빛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며 “유엔이 촛불이 돼 주시기를, 평화와 동행하기 위해 마음을 모아 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2017년 11월13일 유엔총회는 ‘평창올림픽 휴전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평창올림픽 개막 1주일 전인 2018년 2월2일부터 패럴림픽 폐막 1주일 뒤인 3월25일까지 52일간 ‘적대행위’를 멈춰야 하는 ‘정치적 의무’를 모든 유엔 회원국에 부과한 것이다.

한반도 정세 대전환의 마중물이자 평화올림픽인 평창겨울철올림픽은 그렇게 치러졌다.

 

평창올림픽을 무사히 치르고 열흘쯤 지난 2018년 3월5일, ‘대북특별사절단’이 서해직항로를 거쳐 방북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 5명의 특사단은 평양 노동당 중앙위 본부청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평창 개막식에 참석한 김여정 부부장, 평창 폐막식에 참석한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배석했다.

“최고 영도자 (김정은) 동지께서는 남측 특사로부터 수뇌 상봉과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뜻을 전해 들으시고 의견을 교환하셨으며, 만족한 합의를 보셨다”고 다음날 <노동신문>은 보도했다.

정의용 실장은 3월6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남과 북은 4월 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날 정 실장은 김 위원장의 주목할만한 발언을 여럿 언론에 공개했다.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북은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 도발을 재개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는 전언이 대표적이다. 김 위원장이 2022년 3월24일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포-17’형 시험발사”를 현지지도할 때까지 4년간 유지된 ‘핵실험·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일시유예’(모라토리엄)의 시발이다.

 

아울러 정 실장은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며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다”거나 “북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김 위원장 발언도 언론에 공개했다. 당연히 북과 사전조율된 발표다.

 

그러곤 정 실장은 “미북 대화를 시작할 충분한 여건이 조성돼 있다 판단한다”며 “저는 서훈 국정원장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정 실장은 2018년 3월9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뒤 백악관 출입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발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가능한 조기에 만나고 싶다는 뜻을 표명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항구적인 비핵화 달성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과 5월 말까지 만나겠다고 말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나 대변인이 아닌 정 실장이 직접 발표한 것도 파격이지만, 무엇보다 세계를 놀라게 한 발표는 5월 말 이전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1948년 한반도의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분단정부’가 세워진 이래, 70년간 줄곧 적대해온 북-미가 정상회담을 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봤다는 발표와 다름없어서다.

 

2018년 3월, 평창겨울철 올림픽을 계기로 불어온 평화의 봄바람을 타고, 세번째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느닷없이 8천만 남북 시민·인민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