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모두의 책임’이라 말하지 말라

道雨 2022. 11. 29. 09:39

‘모두의 책임’이라 말하지 말라

 

 

 

무망한 바람이었다.

과신에 찬 야심가들 실패를 거울삼아 나라 꼴은 그럭저럭 건사하겠거니 했다. 모르는 건 남의 머리 빌려 해결하겠다는 무치함을 겸손으로 오인했던 탓이다.

 

이태원 참사 한달. 이제는 더 ‘윤석열의 정치’를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치를 잘할 거란 기대가 애초부터 크지 않았거니와, 이제부터 따지려는 건 ‘정치 이전’ 국가의 근본 기능에 속한 문제라서 그렇다.

2022년 10월29일 밤, 그곳에 국가는 있었는가. 이 나라에 통치는 작동했는가.

 

재난을 미리 막고 사후에 잘 수습하는 건, 국민의 안전과 행복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근대국가의 기본이다.

통치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나라나 지역을 도맡아 다스림”이라 나와 있다.

학자들 논변에 빈번히 소환되는 미셸 푸코(1926~1984)의 정의는 “어떤 지도자가 개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나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그 지도자의 권위 아래 개인들을 두는, 결과적으로 개인들의 일생 전반에 걸쳐 그들을 인도하려는 활동”이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대통령을 위시한 이 정부의 책임 있는 주체들이 이태원 참사 뒤 보여준 말과 행동은 통치의 근본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 지난 한달 그들이 쏟았던 에너지 대부분은,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를 겨냥한 법적·행정적 책임 추궁이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정치적 책임 논란으로 번지는 걸 막는 데 집중됐다.

앞장서 지침을 제시한 건 대통령 자신이다.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11월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

 

 

정치권력의 위기는 크게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가 ‘정치적 정당성’을 의심받는 경우다. 선거부정을 저지르거나 정권 운영에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할 때 찾아온다.

그런데 위기는 대부분 ‘통치의 정당성’이 흔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인은 부패나 무능이다. 정권의 무능은 정책 실패를 통해 가시화되는데, 유권자는 선거로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정책 실패가 주기적 선거를 통해 정치적 책임을 추궁받는 것과 달리, 안전과 직결된 국가 기능의 오작동으로 발생한 사회재난은 즉각적인 통치 위기로 비화할 공산이 크다. 정책을 잘못해 국민을 ‘(잘) 살게 하는’ 데 실패한 정권은 선거를 기다려 책임을 따지지만, 피할 수 있었던 재난을 방치해 누군가를 ‘죽게 만든’ 권력에 대해선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국민이 많지 않은 탓이다.

 

그 치명성을 아는 정치권력은 사회재난으로 인한 희생에는 한사코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행정 하부단위로 책임을 떠넘겨 꼬리 자르기를 꾀하는 건 물론, 지지층과 제 편인 미디어와 손잡고 ‘프레임 바꾸기’를 도모한다. 불행의 일차 원인이 피해 당사자의 잘못된 선택에 있는 것처럼 ‘개인화’하거나,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돌려 문제 자체를 ‘윤리화’하는 것이다.

 

이런 바꿔치기 메커니즘은 대형 재난이나 참사에선 어김없이 작동한다. 세월호 때 그랬고 이태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희생자를 조롱·비난하는 언설이 사적 대화와 익명의 온라인 세계를 횡행하는 동안 “이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공범이다”(11월3일, <중앙일보> ‘진중권 칼럼’)라는 진술은 보수적 레거시 미디어의 공론장에서 환영받는다.

 

재난은 당하는 개인에겐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충격이지만,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선 예측 가능했던 위험이 현실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할뿐더러 부도덕하다.

재난에는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국가나 권한을 가진 공적 주체에 대한 책임 추궁의 부당함을 지지하는 논거로 채택되는 순간, 무책임을 방조하고 국가의 실패를 변론하는 국가주의의 언어로 타락한다.

 

국가는 잠재적 위험에 대비할 정책 생산을 위임받았고, 그것을 실행할 권력과 자원을 독점적으로 소유한다. 따라서 재난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의 오류와 실패를 하나하나 되짚고,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공동의 행동을 조직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게 된다.

 

 

 

이세영 | 전국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