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왕의 발톱을 보았다

道雨 2024. 2. 28. 10:04

왕의 발톱을 보았다

 

 

 

       * 지난 16일 대전 카이스트 학위수여식 도중 한 석사 졸업생이 “알앤디 예산 복원하십시오”라고 소리치는 순간 경호원이 입을 막으며 제지하고 있다. 대전충남사진공동취재단

 

 

 

얼마 전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졸업식장에서 발생한 ‘입틀막’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연구개발 예산을 수조원이나 삭감한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 중에 한 학생이 “알앤디 예산을 복원하십시오!”라고 외치자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들어 끌고 나간 사건이다.

경호원이 팔을 뻗어 구부린 다섯 손가락으로 학생의 얼굴을 움켜쥐는 장면은, 흡사 독수리가 갈퀴로 먹이를 포획하는 모습과 같아 충격을 자아낸다. 내게는 그것이 포악한 왕의 발톱으로 보였다.

 

 

연설을 방해한 게 잘못이라거나 경호가 지나쳤다는 정도로 볼 수도 있지만, 청중석의 한마디 외침 때문에 수많은 졸업생, 부모님, 교수님 앞에서 국가가 학생에게 폭력을 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의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이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의 권세를 절대시하는 지배의 논리가 진리와 대화를 추구하는 대학을 식민화했다는 데 있다.

 

 

이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최근 전라북도 행사에선 국회의원이 대통령과 악수하며 “국정 기조를 바꾸십시오”라고 말하자 경호원들이 입을 막고 행사장 밖으로 내동댕이쳤고, ‘의료개혁 민생토론회’에선 대통령에게 건의하고자 입장을 원한 의사가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와 체포됐다.

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뉴스에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이 아니라 ‘김건희 특검법’이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이유로 행정지도를 의결했다.

이것은 전제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왕은 “만세불변하오실 전제정치”를 위해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하니, “신민이 군권을 침손하는 행위가 있으면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간주한다.” 

이는 1899년 고종이 반포한 ‘대한국국제’의 내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시대적인 텍스트로 들리지 않는가?

 

나라를 이런 망국의 과거로 끌고 가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자유’와 ‘동료 시민’을 노래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정치는 선거 정치와 공존할 수 있다.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반복된 패턴을 보였는데,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오르는 국면에서 이런 권력 남용이 노골화됐다는 것이다. 최근 윤 대통령의 ‘독단의 정치’와 한동훈 위원장의 ‘조롱의 정치’는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오르고 총선 승리가 점쳐지면서 생긴 자신감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지배와 선출, 강압과 경쟁,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상반된 논리가 함께 있는 정치 현실의 역학을 이해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마치 왕인 듯 군림하지만, 그는 지난 대선에서 다수의 지지로 선출되었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처럼 민주적으로 집권했다는 사실이 그의 비민주적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그는 국민 위에 군림하기 위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하고, 선거 승리는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결정적 수단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은 딜레마에 처한다. 정권의 비민주성만 규탄하면 정책 대안 마련과 중도 확장 정책은 실패하게 되고, 정책 토론만 하다가는 민주주의 퇴보에 저항하는 핵심 지지층을 잃는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현명한 이중전략인데, 지금 한국 야당은 대중투쟁을 결집하지도, 정책 의제를 주도하지도 못한 채 자중지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반면 여권은 대통령의 절대권력에 순응하면서도, 다양한 정책과 담론으로 표밭을 넓히는 선거 정치를 펼치고 있다. 아마도 총선 때까지 국민들은 일하는 정부, 변하는 여당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총선에서 여당이 이긴 뒤 윤석열 정권이 폭주한다면, 그것을 막아낼 제도적 수단은 없다.

그런 미래의 한 장면을 우리는 어느 청년의 얼굴을 움켜쥔 왕의 발톱에서 얼핏 보았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 권력의 생리에 관한 위대한 통찰을 남겼다.

“권력은 한계점에 부딪칠 때까지 전진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의 남용을 막으려면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선 권력은 그 한계점을 모르고 치닫고 있건만, 많은 국민은 이를 저지할 ‘더 나은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현실은 견딜 수 없는데도 그와 다른 미래는 올 것 같지 않은 답답한 상황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집단적 우울감과 무기력의 한 원천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무력감은, 1937년에 에리히 프롬이 쓴 것처럼, 전체주의의 결과이자 전체주의를 지탱하는 사회심리적 조건이다.

 

총선까지 한달 남짓 남았다. 위중한 시간이다. 불행한 시대의 도래를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낙관하지 못하지만, 절망이라는 무책임을 범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소망하며 글을 쓴다.

 

 

 

신진욱|중앙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