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촛불집회의 기원, 삼일운동

道雨 2024. 2. 28. 09:54

촛불집회의 기원, 삼일운동

 

 

 

          *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1919년 3월1일, 이화학당의 전교생은 소복을 하고 모였다. 대한문 앞에 가서 망곡을 한 뒤 만세 대열에 합세하는 것이 그날의 계획이었다.

3월3일이 임금(고종)의 인산일이라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올 것이고, 그때 조선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자는 것이 학생들이 모인 이유였다.

 

당일 아침에야 이 사실을 안 학교 쪽은 강하게 만류했다. 프라이 교장은 일꾼들에게 정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명했다. 서양인 교사들도 교문을 막아섰다. 다칠지도 모르고 경찰에 잡혀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 프라이 교장의 반대 이유였지만, 만반의 준비를 한 학생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신덕심·유점선·김마리아·노예달 등 일군의 학생들은 문을 밀치고 나가고, 유관순과 서명학·김분옥·김희자·국현숙 다섯명은 기숙사 뒷담을 넘어 행렬에 합류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이었다. 공원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재, 보성, 연희 등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은 물론 숙명, 정신, 경성여고보 등 검정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여학생들도 대거 몰려나와 있었다. 특히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전교생이 다 참여했다.

학생뿐 아니었다. 갓을 쓴 노인들, 쓰개치마를 쓰고 나온 여자들, 양복을 입은 하이칼라 남자들, 트레머리의 여자들, 댕기 머리를 촐랑이는 어린아이들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후 2시 무렵 한 청년이 연단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었다. 민족 대표 33인을 기다리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청년 대표가 올라가 독립을 선언하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중략)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공약 3장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1.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1.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낭독이 끝나자 누군가 조선독립만세, 를 외쳤다. 그러자 만세만세, 세상을 울리는 함성이 공원에 울려 퍼졌다. 때맞춰 하늘에서 작은 태극기와 선언서가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행진이 시작되었다. 행렬은 광화문을 지나 을지로를 지나 진고개로 향했다.

 

3월5일에는 학생들만 참여하는 시위가 다시 이어졌다. 학생들이 3월5일을 시위 날로 잡은 것은, 향리에서 올라와 3월3일 임금의 인산을 보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군중이 많을 것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3월1일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운집했다. 거기에 귀향하는 사람들까지 합세해 그야말로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는 사람의 물결이 굽이쳤다. 인력거를 타고 붉은 머리띠를 동여맨 학생 대표, 보성전문 강기덕과 연희전문 김원벽이 선두에 서 독립만세를 외치면 모두가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남대문 방면으로 행진했다. 일경도 강력하게 저지했다. 말발굽에 치이고 구타당하는 건 예사였고 체포당한 학생들은 줄줄이 묶여 연행되었다.

 

 

3월10일 휴교령이 떨어졌다. 총독부는 전국의 중등학교 이상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선포했다. 학생들의 열기를 잠재우려 선택한 이 방식은 그러나 총독부의 패착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학생들을 너무 만만히 보았다. 학교가 문을 닫자, 학생들은 짐을 싸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짐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함께 가지고.

 

사촌지간이었던 유예도와 유관순 또한 고향인 천안에서 다시 한번 만세운동을 벌인다. 고향의 어른들이 계획한 일에 관순과 예도의 경험을 보태 함께 준비했다.

4월1일 아우내 장날을 거사일로 잡은 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을 택한 것이었다. 삼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 주재소에서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하기 시작했고, 이때 관순의 부모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시신을 둘러메고 주재소로 몰려가 항의하며 시위를 계속하였고, 이때도 일경은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사람들을 죽였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은 중국을 이어 미국으로 타전되었다.

 

‘300만명의 인민과 3천여개 교회가 참여하는 독립협회는 서울과 평양 등 여러 도시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손병희·이상재·길선주를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것’,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라는 신문에 난 기사다.

 

‘일본의 한국 지배 종료 선언’,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에서 뽑은 헤드라인이다.

 

3월15일치 뉴욕타임스는, 조선인들이 아직도 일본에 저항해 싸우고 있으며, 4만명 이상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4월3일치 오그던 스탠더드는 지면에 독립선언서 전문을 실었다.

 

1919년 전 조선에서 일어났던 삼일운동은,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인도와 유럽으로 전송되었다.

비폭력 평화시위의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김현아│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