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노벨상에 한국언론이 부끄러운 이유
문학이 이뤄낸 성취와 대비되는 언론의 후진성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된 뒤 지난 20일간은, 한강 작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환호와 열광이 이어진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또한 한강의 소설이 한국사회에 무엇을 던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깊어진 날들이기도 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그의 소설에 대한 관심을 넘어, 문학이라는 것의 존재이유, 문학은 왜 필요한가를 일깨워줬다. 그것은 한국 문학의 우뚝한 존재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이 보여준 하나의 역설이 있다. 한강 문학, 한국 문학의 존재는 그 존재만큼이나 부존재하는 다른 것들을 반사경처럼 보여줬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문학의 성취에 비례하는 만큼의 것들을 얼마나 가졌는가, 라는 질문을 우리는 갖게 되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달성과 '선진'은, 그 반대편의 부재와 '후진'을 대비시켜 주고 있다.
무엇보다 한강의 문학에서의 승리가 드러내는, 한국 사회에 부재하고 결핍돼 있는 것들, 그중 첫 번째의 것은 언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강 문학의 성취는 한국 언론의 부재와 결핍을 확인하고 추궁한다.
한국이 이뤄내고 있는 것의 정점에 문학이 있다면, 그 맞은편의 저점, 아마도 극저점에는 언론이 있다.
문학에서의 성취가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언론의 부재와 결핍을 드러내는 것은, 문학과 언론의 근원적 동반자 관계에서 비롯된다.
문학과 언론은 기록이며 증언이라는 점에서 친연(親緣)의 관계다. 뛰어난 작가들의 상당수가 언론 경력에서 시작됐다는 점이 드러내기도 하지만, 문학과 언론이 하는 일을 단순화한다면, 언론이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라면, 문학은 그 일로 인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것이다.
소설의 본질에 대해, 작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은 '실제'에 대한 탐색이 아니라 '실존'에 대한 탐색이라고 했지만, 이 말은 문학과 언론 간의 상반이라기보다는, 동일한 기원의 분업과도 같은 관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난 일로서의 실제가 언론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라면, 문학이 다루는 실존은 그 실제로부터 출발하기에, 언론이 다루는 실제는 문학의 실존의 기원이며 몸체다.
'현실의 사실'에서 '현실의 진실'이 나오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문학에 대해 진실에로의 탐색에서 동반자이며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한강의 문학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현대사의 폭력과 고통을 파헤쳐가는 그의 소설을 ‘고발문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 '고발문학'이란 따로 없다. 뛰어난 문학은 그 자체가 본래 고발 행위인 것이다.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사회 부조리나 비행이든, 인간성의 어두운 그늘이든 간에 문학은 곧 고발인 것이다.
문학이 얘기하는 것이 아무리 밝고 화사한 것이라고 해도, 문학은 그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그 평화가 무엇으로부터, 또 무엇을 희생해 얻어지는 것인가를 얘기하고 경고하지 않으면, 그러한 문학을 그 본래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이라고 부르긴 힘들다.
고발로서의 문학의 언어와 고발로서의 언론의 언어는 이렇게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한쪽의 결손과 부재는 그만큼 다른 쪽에 그 짐이 맡겨진다. 그러기에 우리의 문학은 언론이 보지 않는 만큼 보는 일, 언론이 하지 않는 질문까지를 묻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떠안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문학은 언론에 대해 그 보는 것, 묻는 것에서의 나태와 거부를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한국 사회에서 봉인된 것, 감금된 것을 드러내고 풀어주는 것이며, 말할 수 없는 말들에 목소리를 내게 해 주는 것이다. 그 봉인과 감금은 권력에 의해, 그리고 언론에 의해 행해져 온 것이었다.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일이나 그의 책이 금지 도서가 된 일은, 이른바 보수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딱지 붙은 ‘블랙리스트’는 이제 더 이상 없는 일인가.
그러나 한강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일부 언론이 보인 모습은, 그의 이름을 여전히 그 블랙리스트 안에 가둬놓고 싶은 심경이었던 듯하다. 블랙리스트는 한강의 이름을 연호하는 지금 순간에도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블랙리스트는 책이나 작가, 예술가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적잖은 것들이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 발설을 막아야 하는 것이 돼 있는 현실로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제(29일)는 이태원 참사 2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추모 미사에서 희생자의 유족들은 2년 전 그날 이후 삶이 지옥이 됐다고 했다. 이들에게 지난 2년간의 지옥은 당일의 사고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고 이후에 겪은 일들에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그날의 그 한 번의 죽음보다도, 지난 730일의 날들에 730번의 죽음이 된, 지나온 날들의 몇 배의 죽음을 치러내는 참사를 겪어내야 했던 것에 진짜 지옥이 있었다.
추모제에서 유족들이 흘린 눈물, 죽은 가족을 목놓아 부르는 것은 호곡과 오열이었지만, 우리 사회는 그 눈물과 오열을 자신에 대한 심문과 규탄으로 들었어야 마땅하다.
누구보다도 특히 어떤 이들, 이태원 골목에서의 압사 참사를 또한 '언론 참사'로 만든 언론 자신에 대한 매질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한강은 맨부커상을 받으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의 얘기를 하고자 했다"고 말했거니와, 인간이 되기 위해선 인간이 되기를 거부해야 하는 현실, 그런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을 외면하고 가려온 언론 자신에 대한 고발로 삼아야 한다.
추모 미사에서 사제들은 기도를 하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 아직도 그 이름들은 제대로 불려진 적이 없는 것이며, 그 죽음은 아직도 미완인 것이다.
참사 2주기 당일인 29일 아침, 단 한 줄의 기사도 없는, 혹은 사진 한 장만으로 그날을 잊지 말자며, 혹은 이 정도면 됐으니 그만하자는 유력한 신문들이 보여주는 것은, 같은 하나의 언어로써 이뤄낸 문학의 성취의 한편에서의, 바로 그 언어에 의한 모독이며, 그 언어에 대한 모독이었다.
한강의 노벨상에 대한 흥분과 찬사만큼이나, 우리의 언론이 먼저 봐야 할 것이 그러한 현실이다.
그것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한국언론의 자기갱생, 아직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갱생은 그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재 에디터promes65@daum.net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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