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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하면 한국 멸망시키는 것은 한국 자신”

道雨 2025. 3. 19. 10:18

“지금처럼 하면 한국 멸망시키는 것은 한국 자신”

 

*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것은 1905년 5월27~28일 쓰시마해전을 통해서였다. 출진을 앞둔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 사령관이 기함 미카사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러일전쟁의 승부를 사실상 결정지은 것은,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한, 1905년 5월27~28일 쓰시마 해전이었다.

승기를 잡은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1895)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열강들과 치밀한 외교 조율에 나섰다.

일본은 미국과는 7월29일 가쓰라-태프트 비망록, 영국과는 8월12일 2차 영일동맹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러-일 강화회의는 8월9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시작됐다.

러시아는 9월5일 조인된 포츠머스 조약 2조에서 “일본이 한국에 대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보호·감리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약속했다.

망해가는 대한제국의 근대적 지식인이던 윤치호는 10월16일 신문에서 이 조약의 전문을 확인한 뒤 “러시아는 이를 통해 교훈을, 일본은 영예를, 조선은 최악의 것을 얻었다”라고 비명을 질렀다.

 

사전 조처를 마친 일본은 10월27일 ‘한국 보호권 확립 실행에 관한 각의 결정’을 통해 “한국의 외교 관계를 우리 수중에 넣을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의 8조에는 “도저히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것으로 보일 땐 최후의 수단으로서 일방적으로 보호권을 확립한다는 뜻을 통고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응하지 않는다면 힘으로 강제하겠다는 뜻이었다. 대한제국에 더 이상의 ‘갈림길’은 없었다.

일본은 11월17일 대한제국을 압박해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강제했다. 이로써 나라가 사실상 망했다.

 

 

*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1905년 11월17일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이토는 이날 저녁 8시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주차군 사령관을 데리고 들어와 대한제국 대신들에게 심리적인 위압을 가하며 조약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물었다. 이토는 이후 초대 조선통감으로 취임한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제공

 

 

 

조선이 서구식 근대 조약 체계 속으로 편입되던 19세기 말은 지금과 엇비슷한 ‘대격변’의 시대였다.

250여년간 이어지던 청의 패권이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힘이 동아시아로 밀려들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란 거대 ‘국가 개조 프로젝트’에 성공한 일본이 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시작한 러시아는 극동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한반도는 이 거대한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지정학적 단층선’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 충격을 견뎌내고 살아남아야 했다.

 

120년 전 우린 이 도전을 이겨내지 못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정치 체제의 ‘경직성’에 있었다. 조선은 앞뒤가 꽉 막힌 나라였다. 500여년 동안 이어져 온 전제군주제의 관성이 너무 단단하고, ‘부패한’ 민씨 척족의 세도가 워낙 막강해 우리 내부 역량으로 뒤엎을 수 없었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박영효(1861~1939)의 말대로 “여론이 없고, 정당이 없는” 시대였다. ‘합법적’ 권력 교체 수단이 없으니, 개혁을 실행하려면, ‘역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고종 44년 재위 기간 무려 ‘31번 이상’의 역모가 있었다. 그럴수록 더 고종은 자신의 전제군주권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 을사조약의 핵심 내용은 “일본국 정부가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에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와 사무를 감독·지휘”(1조)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며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잃게 된다. 을사조약의 원본은 한국어본·일본어본으로 각각 만들어졌다. 모두 제목에 해당하는 제일 첫 칸이 비워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을사조약’ 또는 ‘2차 한일협약’으로 부르는 이 협정은 공식적으로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규장학 한국학연구원 제공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내정 개혁에 관심을 기울이던 유일한 세력이 있었다. ‘외세’인 일본이었다.

일본에 조선은 “강력(强力·군사력)을 사용”해 지켜야 할 ‘이익선’(야마가타 아리토모, 1890)이자 “제국을 향해 튀어나온 칼날”(고무라 주타로, 1903)이었다. 일본인들은 임오군란(1882) 때부터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조선 정세 안정이 일본 안보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1894년 6월 청일전쟁을 각오하며 “조선국에 대한 제국의 이해는 심히 긴요 중대해 그 나라의 참정비황(慘情悲況)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변화를 원했던 개혁 세력은, 외세인 일본의 힘을 빌려, 갑오개혁이라는 대대적인 국가 개조 프로젝트에 나서게 된다.

 

개혁의 양대 목표는 내각·의회 등 근대 국가에 걸맞은 합리적 의사 결정 시스템과 효율적인 조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종의 군주권을 제약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구성원들 간 폭넓은 ‘신뢰’와 극단적 대립을 막을 수 있는 유연함과 신중함이 필요했다.

“개화파와 고종이 협력하여 제도 개혁을 수반한 부국강병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자주적 근대화의 성공을 도모하는 유일한 길”(이헌창 고려대 명예교수, ‘1910년 조선 식민지화의 내적원인’, 2010)이었다.

 

 

이 과정이 쉬울 리 없었다.

일본이란 외세와 결탁했던 갑오개혁 주도 세력은, 개혁을 거부하는 고종은 물론 민중(동학)과도 충돌했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 세력이 커지려 하자, 패닉에 빠진 일본의 폭주로 명성왕후가 살해됐다. ‘주범’은 일본이었고, ‘공범’은 조선의 개혁 세력이었다.

이 처참한 비극으로 인해 개혁 세력과 조선 민중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분노한 고종은 아관파천(1896)이란 ‘친위 쿠데타’를 통해 개혁 세력을 도륙 냈다. 화가 난 민중은 조선이 길러낸 최고의 인재인 김홍집(1842~1896)의 주검을 훼손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일본은 ‘조선은 도무지 독립할 수 없는 국가’라고 결론 내렸고, 러시아도 동의했다.

조선의 운명이 갈린 것은 사실상 여기에서였다.

 

개혁이 실패한 폐허 위에서, 고종은 자신의 권력 강화에 나섰다. 그렇게 대한제국(1897)과 대한국국제가 등장했다.

고종은 1899년 8월 공포된 ‘대한국국제 2조’에서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라고 못 박았다.

고종이 “무한한 군권”을 갖게 되면서, 나라가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상징후가 가장 먼저 드러난 곳은 ‘인사’였다. 갑오개혁을 이끌었던 유능한 이들이 제거된 뒤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이들은, ‘고종이 곧 국가’라고 생각했던 충성파들이었다.

가토 마스오 일본 공사는 이들을 두고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평했고, 고종에게 쓴소리를 마다치 않던 원로 김병시(1832~1898) 역시 “잡스럽게 등용된 무리를 멀리 배척”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으로 재정이 혼탁해졌다. 고종은 제 쌈짓돈인 ‘황실 재정’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대한제국의 ‘정부 재정’은 갑오개혁이 무산된 1896년 480만9410원에서,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1904년 1421만4573원으로 2.9배 늘었다. 이 기간 서울 물가가 2.7배 늘었으니, 국가 운명이 사실상 결정되는 9년 동안 실질 규모에 변화가 없었다.

이에 견줘 황실 재정에 속한 내장원의 수입은, 1896년 6만5501원에서 1903년엔 589만9865원으로 90배 늘었다. 물가 상승을 고려해도 단기간에 폭증했음을 알 수 있다.

 

황실 재정의 가장 큰 특징은 돈의 흐름을 읽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국가가 사업을 계획하려면 세입·세출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내장원 지출 항목 가운데 ‘내입’(內入)은 고종이 용도를 밝히지 않고 자유롭게 쓴 돈이다. 1901년 내입의 비율은 무려 80.9%(72만2846원)였다.

고종은 ‘악화’인 백동화를 남발해 서민 생활에 큰 고통을 안기기도 했다.

대한제국엔 고종이 있을 뿐 정부가 없었다.

대한제국의 조세부담률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18세기(5%대)보다도 낮은 국내총생산(GDP)의 1~2%에 머물렀다.

 

나라가 거덜 났는데 아무리 기발한 외교적 지혜를 짜낸다 해도 통할 리 없었다. 고종은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자, 대한제국을 ‘중립화’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에 대한 일본의 답은 “조선인은 스스로 지배(통치)할 능력이 없다. 먼저 내정 개혁을 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의 망국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외교의 실패’가 아닌 ‘내치의 실패’였다. 조선은 분열하고 자멸해서 일본에 먹혔다.

 

*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결정을 앞둔 15일 낮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찬반집회가 열렸다. 바로 지금 여기가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앞날을 가를 ‘대한민국의 갈림길’이다. 연합뉴스

 

 

 

오늘의 대한민국은 얼마나 다른가.

2022년 2월 말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120년 전과 비슷한 국제질서의 대격변이 시작됐다.

지난 1월 임기를 시작한 2기 도널드 트럼프 정권은, 전후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던 두 기둥인 ‘한-미 동맹’과 ‘자유무역 질서’를 동시에 허물고 있다.

온 나라가 혼연일체가 돼 위기에 대응해야 하지만, 대통령 윤석열이 일으킨 12·3 내란으로 국론이 뿔뿔이 흩어져, 수습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 극단적 갈등을 수습해 꼭 필요한 정치·사회·경제 개혁에 나서지 못하면, 나라는 다시 한번 가망이 없을 것이다.

 

조선이 망국으로 향해 가는 거친 역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장면은, 갑오개혁이 시작된 뒤인 1894년 10월 유길준(1856~1914)이 보빙사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해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과 마주 앉았을 때에 대한 기록이다.

유길준이 말했다.

“조선인에겐 세가지 부끄러움이 있소. 스스로 개혁하지 못해 귀국의 권박(勸迫)을 받으니 본국 인민에게 부끄러운 것이 하나이고, 세계 만국에 부끄러운 것이 둘이고, 천하후세에 부끄러운 것이 셋이오.”

 

안타깝게도 조선은 실패했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5월 “지금처럼 하면 한국을 멸망시키는 것은 한국 자신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3년 뒤 나라가 지도에서 지워졌다.

 

우리는 다시 부끄러울 것인가, 자랑스러울 것인가.

헌법재판소 결정을 앞둔 바로 지금 여기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갈림길이다.

 

 

길윤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