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어느 재판관이 ‘살인면허’에 도장을 찍겠나

道雨 2025. 3. 19. 10:29

어느 재판관이 ‘살인면허’에 도장을 찍겠나

 

 

 

12·3 비상계엄의 밤, 시민들의 심장을 파고든 감정은 수만가지 빛깔과 농도일 것이나, ‘분노’라는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로 수렴될 것이다.

그 분노가 모인 ‘빛의 혁명’으로 내란수괴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소추를 이뤄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숙고가 길어지면서, 분노의 도저한 강물에 ‘불안’이라는 흙탕물이 스멀스멀 번지고 있다. 헌재의 평의 과정에 대한 온갖 ‘설’들이 난무하며 불안을 부추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느끼는 그 불안이야말로, 헌재가 탄핵을 인용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불안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이라는 단어 뒤에 쳐진 괄호 안에는 끔찍한 전망들이 웅크리고 있다.

국가 혼란, 독재 회귀, 경제 파탄, 안보 위기도 무섭지만 이 말들로는 다 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윤석열은 헌재에서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것을 쫓아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헬기 탄 무장 군인들이 국회에 들이닥치는 장면과, ‘국회 활동을 금한다’고 적힌 포고령을 온 국민이 똑똑히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져야 ‘아무 일’인가.

윤석열의 저 말은 미처 현실화하지 않았던 ‘아무 일’이 그 머릿속에 있다는 뜻이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벌어졌을 그 ‘아무 일’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과 조지호 경찰청장, 방첩사 간부들이 일치되게 증언한 정치인 등 체포 계획이 그 일단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최근 펴낸 책에서, 계엄의 밤 ‘명망 있는 여권 인사’로부터 “체포되면 정말 죽을 수 있다. 가족들도 피신시켜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 군 간부는 검찰 조사에서 “만약 문상호 정보사령관이 ‘한동훈 사살’을 명령했다면, 에이치아이디(HID) 부대원들은 그 지시를 따랐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물며 야권 인사들은 어땠겠나.

 

‘노상원 수첩’에 기록된 주요 인사 ‘수거·처리 계획’,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된 계엄군이 준비한 포승줄, 케이블타이, 송곳, 가위, 야구방망이, 망치 등도 ‘아무 일’의 일단이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합동참모본부 ‘결심지원실’에 머물던 계엄의 최후 순간까지 통화했던 당사자다. 그 옆에는 윤석열이 있었다.

 

윤석열·김용현 등이 이후 보인 행동에서, 저 지옥도가 현실화했을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

윤석열은 체포영장 집행에 저항하며, 총칼을 써서라도 자신을 보호하라고 경호처에 지시했다는 내부 제보가 잇따랐다. 이에 반대했던 경호처 간부를 해임하는 보복 징계가 진행 중이다.

 

윤석열은 헌재 최종진술에서 ‘야당과 내란 공작 세력들이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고 했다. 내란의 핑계로 삼았던 ‘반국가 세력’에 ‘공작 세력’이라는 허상의 적이 추가됐다.

“의원 끌어내라”는 대통령 지시를 증언했던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의 부인에게까지, ‘민주당이 협박한 것으로 하자’는 회유의 마수가 뻗치고 있다.

김용현은 옥중에서 일부 헌법재판관을 “처단하라”는 편지를 써, 극우집회에서 낭독하게 했다.

윤석열은 구치소에서 풀려나자 개선장군처럼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이 모두가 가리키는 건 한가지, 이들은 다시 또 무슨 일이든 저지를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헌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의 이유로 지적한 ‘헌법 수호 의지 없음’을 넘어, 헌법 따위는 손톱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태도다.

제2의 계엄은 물론, 그 이상의 끔찍한 세상을 몰고 올 것이라는 징표다.

 

불안은 이런 사실들에 근거한다. 헌법재판관들도 모를 리 없다.

윤석열을 대통령직에 복귀시키는 헌재 결정은 곧 또다른 비상계엄에 대한 허가증이 된다. 계엄세력이 획책했던 ‘아무 일’을 실행하도록 길을 터주는 통행증이 된다. 수많은 시민들이 다치고 피 흘리고 목숨을 잃게 될 사태에 대한 사전 면죄부가 된다. 이것은 ‘살인면허’라 불러도 무방하다.

 

‘종국결정을 할 때에는 심판에 관여한 재판관 전원이 결정서에 서명날인하여야 한다’(헌법재판소법 제36조).

헌법재판관은 법기술자가 아니라 헌법의 근본 가치를 사유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존엄성과 평온한 민주주의와 소중한 일상을 품은 헌법의 영토를 지키는 직분이다. 그 영토를 헌법 유린 세력에게 열어주어 유혈을 부르는 예고장에 과연 어느 재판관이 자신의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을 수 있겠는가.

숙고의 시간이 더 길어질 이유도 없다.

 

 

 

박용현 | 논설위원 : pi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