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주주의’의 폐허 위에 서다
권위 있는 민주주의 평가 기관인 스웨덴 예테보리대학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2025년 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는데, 한국을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선거민주주의’ 체제로 분류했다.
여기서 선거민주주의란 공정 선거와 기초적인 언론·표현·집회·결사의 자유가 있는 체제를 뜻하며, 자유민주주의는 거기에 더하여 개인의 자유 보장, 행정부 권력 남용의 견제, 법치의 실현이 충족되는 체제를 말한다.
한국은 이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 것이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꾸준히 민주주의 수준을 높여서,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지위를 유지해왔고,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세계 17~18위의 상위권으로 프랑스, 캐나다, 일본, 대만보다도 높은 순위였다.
하지만 올해 보고서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은 수리남, 몰타,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민주주의 지수는 그동안 최근 한국 민주주의 상황을 비교적 후하게 평가했는데, 올해 보고서에서는 한국을 더 이상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선거와 기본적 자유만 갖춘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분류했다.
보고서는 한국이 파키스탄과 더불어 작년에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많이 후퇴한 10개국에 속하는 아시아 국가라고 서술했다. 서구 나라들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우자’고 한 게 불과 몇년 전인데, 실로 놀라운 추락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이런 후퇴가 어떤 세계적 환경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최근 한국 상황이 갖는 함의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금 민주주의는 한국에서만 후퇴하고 있지 않다. 2010년대 이후 10여년 동안 세계적으로 독재화 또는 민주주의 후퇴가 점점 일반화되고 가속화되었다. 그 변화의 양상과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적 추이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점점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 후퇴의 양상이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 내의’ 점진적, 부분적 부식이 아니라, 민주적 헌정 ‘체제 자체’에 대한 노골적 공격과 전복 시도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같은 세계 정치의 전반적 분위기는, 각 나라에서 독재화 시도를 더 용이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한국이 민주화된 198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민주화의 물결’이 크게 일어나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정치 체제가 전환된 나라가 많았고, 문화적으로도 자유, 포용, 다양성의 가치가 중시됐다.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부터 그 추세가 꺾이고 ‘독재화의 물결’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는데, 이후 2000년대까지 민주주의 후퇴의 양상은 선거, 다당제, 정치적 기본권 등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은밀한 방식으로 민주적 원리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세계 각지에서 민주주의가 과거보다 더 전면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민주적 제도의 구속을 벗어던진 독재화와 정치적 억압, 국가 폭력이 증가했다.
프리덤하우스의 평가에 의하면, 1988년부터 꾸준히 감소해온 ‘자유롭지 않은’ 나라의 비율이, 2010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해서 그 추이가 지속되고 있다.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4년에 세계 인구 중 독재 체제에 사는 사람의 비율이 49%였다면, 2024년에는 무려 72%다.
서구에서도 민주주의가 상당히 후퇴했고, 극우 성향 정당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헝가리, 폴란드 같은 동유럽에서는 2010년대부터 권위주의화가 진행됐고, 서유럽에서도 지난 2~3년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극우 정당이 선거에서 1, 2위 득표를 했다.
가장 큰 정치적 후퇴가 일어난 곳은 단연 미국이다.
트럼프 2기 정부는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정책들과, 인종주의적 혐오와 배제의 정치를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민주주의 후퇴의 구조적 원인에 관해, 많은 학문적 연구와 토론이 있어왔다.
첫째는 경제 상황의 악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불평등 심화라는 장기적 배경 위에서, 2009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유로화 위기, 좀 더 최근에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계속되는 사건들이 사람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둘째는 이주노동자, 난민 등 국경을 넘는 인구 이동으로 형성된 다민족 환경이 극단주의 정치를 위한 재료로 악용되고 있다.
셋째, 국제적 갈등과 잠재적 위협이 국내 정치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9·11 테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같은 국제 분쟁은, 이에 연루된 나라들에서 갈등을 첨예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자들의 주체적 요인이다.
기성 정당과 사회구성원들이 대중들의 경제적 어려움, 치안 불안, 문화적 위기감, 군사적 두려움을 경청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대신에, 이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조롱할 때, 극단주의자들이 대중의 힘을 얻어 커지고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진다.
그와 달리 사회구성원들과 엘리트 집단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온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퇴보할지언정 헌정 붕괴의 위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구조적 조건들과 증오, 폭력의 잠재력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무섭게 커왔음에도, 이에 대응하는 노력은 너무나 미약했던 나라가 아니었나 싶다.
그 결과, 지금 한국은 외양상 발전된 민주주의처럼 보이는 체제가, 속으로 문제들이 곪아갔을 때, 한순간에 후진적 민주주의로 추락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가장 억압적인 독재 체제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을 세계에 알려주고 있다.
‘케이(K)민주주의’는 환상이고 껍데기였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불평등과 차별, 사회적 고립, 혐오의 일상화, 정치 양극화, 극단주의의 확산, 무규범과 가치 상실, 비민주적이고 무책임한 파워엘리트 등, 여러 문제가 중첩되었을 때, 사회적 재앙이 도래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동안 방치된 채 누적되어온 이 모든 시커먼 침전물들이 다 끌어올려진 폐허의 거리처럼 보인다.
그 위에서 우리는 참담하고 슬픈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어쩔 줄 몰라 서성이고 있다.
그리고, 무너진 집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 묻기 시작한다.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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