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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제2의 닉슨 독트린을 만들 수 있나?

道雨 2025. 3. 20. 09:24

트럼프는 제2의 닉슨 독트린을 만들 수 있나?

 

 

전후 미국의 대내외 정책을 전환시킨 대표적인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다.

그는 대외정책에서는 ‘닉슨 독트린’과 미-중 연대, 소련과의 데탕트, 경제에서는 ‘닉슨 쇼크’라 불린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과 변동환율 체제로 이행 등을 감행했다.

그 결과는 대외정책에서 주적이던 소련 붕괴의 단초를 만들었고, 경제정책에서는 지속 불가능해 보이던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고, 추락하던 달러 가치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줬다.

 

 

닉슨은 취임한 지 6개월 뒤인 1969년 7월25일 국외 순방 중에, 미국의 태평양 전진기지인 괌에 들러서 “핵무기를 가진 열강의 위협을 제외한 군사방위 문제인 한에는, 아시아 국가 자신들이 책임을 도맡아 대처”하라고 발표했다. 아시아 방위는 아시아가 책임지라닉슨 독트린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나온 닉슨 독트린은, 미국이 그 전쟁에서 발을 뺀다는 의미였다.

더 나아가 중국과의 화해를 겨냥했다.

1971년 7월9일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비밀 방중은, 중-소 사회주의 블록을 완전히 해체하고, 반소련 미-중 연대를 일구는 지정학적 대전환을 열었다.

 

 

경제적으로는 1971년 8월13일 35달러를 금 1온스로 바꿔준다는 기존의 달러-금 태환 제도를 정지시키는 선언을 했다. 이로써 고정환율 체제는 붕괴되고, 달러와 다른 통화 사이의 변동환율 체제가 자리잡아 나갔다.

베트남 전쟁 등으로 부푼 재정적자와 남발한 달러 문제가 감당하기 힘들자 내놓은 충격적 조처였다.

이 조처로 인플레이션이 본격화하는 등 큰 대가를 치렀으나, 미국은 금 태환 제도에서는 지속불가능했던 재정적자와 달러 가치 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닉슨의 이런 조처들은 당시 이를 받아들이던 동맹국이나 세계 각국에는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이 동맹국들을 버린다’는 반응과 충격이 나왔다. 미국이 방위 부담을 덜겠다는 아시아 동맹국들은 물론이고, 유럽 각국도 미국의 베트남 종전 추진과 금 태환 정지에,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의무를 저버리고 있고, 쇠락한다고 의심했다.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하는 조처와 이에 대한 반응은 닉슨 때와 유사하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종전 합의를 고리로 러시아와 밀착하며, 동맹들이 이제는 스스로 방위를 책임지라고 닦달하고 있다. 특히, 종전되면 우크라이나에도 개입하지 않을 테니, 유럽이 알아서 하라고 떠밀고 있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책임이라는 닉슨 독트린과 유사하고, 한발 더 나갔다.

닉슨은 적어도 동맹을 폄하하지는 않았고, 국제질서에 대한 미국의 역할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는 동맹을 폄하하고, 더 이상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나 확장에는 관심이 없다.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에서 중국의 존재와 일정 정도의 세력권을 인정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손을 털고 나옴으로써, 러시아 세력권을 깨끗이 인정하고 있다.

 

소련 붕괴를 겨냥한 미-중 연대 구축으로 이어졌던 닉슨 독트린처럼, 트럼프 독트린이 반중국 미-러 연대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트럼프의 미국은 이제 미·중·러 삼각 지정학적 게임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동맹국과의 연대보다는 미국 국익을 적나라하게 챙기려고, 러시아 및 중국과의 지정학적 거래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전방위적인 관세 전쟁을 벌이는 트럼프 주변에서는, 금 태환 정지나 달러 가치를 혁명적으로 낮춘 플라자 합의 같은 조처로 이어질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닉슨 때처럼, 미국이 이제 하루에 이자로 26억달러나 내는 재정적자 등 국가부채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러라고 협약’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트럼프 행정부가 경상수지 개선과 미국 제조업 부흥을 위해 약달러를 유도하는 한편, 외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100년 만기 등 장기채로 강제 전환하고, 단기 채권에는 오히려 사용료를 지불하게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닉슨 쇼크 이후 필요할 때마다 동맹국들의 팔을 비틀어서, 달러 가치를 강제로 낮춰온 전력이 있다.

트럼프가 달러 가치 약화를 선호하는 것은 확실하다.

트럼프는 관세 전쟁에 이어, 약달러 유도를 위해 외국이 보유한 미 국채를 강제로 구조조정하는 데에도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닉슨 이후 미국은 심각한 인플레와 전세계적인 퇴각을 겪었다. 하지만 닉슨이 닦아놓은 정교한 지정학적 전략은, 결국 미국의 패권을 강화시켰다.

트럼프는 전후 미국 대통령 중 닉슨에 이은 유일한 ‘리얼리스트’(현실주의자)이다.

문제는 그가 닉슨과는 달리, ‘네안데르탈 현실주의자’, 즉 야만적 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제2의 닉슨이 될 수 있을까?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