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조기대선에 담고픈 시대정신
‘독재망령’들 영원히 떠나보내는 ‘천도재(薦度齋)’ 돼야
식민지·독재체제 거치며 ‘주류’ 굳힌 ‘빽 있는 사람들’
여러 번 정권 교체 성과에도 여전히 위축된 ‘비주류’
천박한 물질주의 몰아내고 ‘주류 교체’ 위한 큰 승리를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을 선포하는 윤석열에게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계엄령 선포의 목적에서나, ‘모든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계엄포고령의 내용에서나, 수많은 사람을 불법으로 ‘수거’하여 악랄하게 ‘제거’하려는 계획을 기록한 노상원 수첩에서나, 그와 그 일당의 정신은 독재자들의 망령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에도 한동안은 군사쿠데타가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대중적 불안감이 남아 있었지만, 김영삼 정권이 군부 내 하나회를 척결하고 이어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로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폭력으로 무너지리라고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인들은 ‘민주국가 국민’이라는 집단정체성을 확보한 듯했고, 스스로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민주 헌정질서’ 파괴범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내란공범들
그러나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그 집단정체성과 자부심이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명료히 드러냈다.
국민의힘은 국회의 계엄해제 의결을 사실상 방해함으로써 ‘국헌문란 목적의 내란’ 실행을 도왔을 뿐 아니라, 계엄 해제 이후에도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등 ‘민주 헌정질서’ 파괴범죄를 옹호하는 데에 몰두했다. 그들은 ‘내란공범’이나 ‘내란종범’으로 지목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윤석열이 구속된 뒤에도 지귀연 판사는 사상 유례없는 ‘구속기간 시간 계산법’을 창안하여 구속 취소 결정을 내렸으며, 심우정 검찰총장 역시 사상 유례없는 ‘즉시항고 포기’로 화답하여 그를 탈옥시켰다.
최근 대법원 판사 12명 중 10명은 고등법원이 무죄선고한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을 ‘파기환송’함으로써, 6.3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아예 없애고 국민의 선거권을 제한 또는 박탈하려고 했다. 이들은 ‘헌정질서 문란 범죄’를 처벌하려는 의지를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국민의힘 지지자 대다수는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라는, 세계인의 조롱거리가 될 만한 주장에 동조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가당착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윤석열 일당은 왜 내란을 획책했으며, 한동안 ‘민주적이었던’ 한국 사회에는 왜 내란을 지지하는 세력이 이토록 거대한가?
내란 진압은 왜 이토록 더딘가?
우리가 역사의 무덤에 파묻은 줄 알았던 박정희 전두환 일당의 망령이 실제로는 여전히 살아서 활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선거가 ‘독재망령’들을 영원히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천도재(薦度齋)’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이번 선거에 두 가지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90년 3당합당이 만들어낸 ‘보수’ 참칭 내란독재세력의 망령
첫째, 1987년 민주화운동이 다 풀지 못한 숙제를 완수하는 것이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승리’라는 말은 사실 ‘기억 조작’이다. 당시 내란독재 세력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 세력과 타협했을 뿐이다.
1987년에 제정된 현행 헌법은 양자 간 타협의 산물이자 일종의 ‘휴전협정문’이었다.
뒤이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정치세력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하지 못한 결과, 12.12와 5.17 내란의 공동수괴였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후보별 득표율은 노태우가 37%, 김종필이 8%, 김영삼 김대중 합계가 55%였다. 민주정치세력의 득표수가 더 많았지만, 정권은 내란독재세력이 차지했다.
1988년 총선에서는 내란정당인 민정당이 34%, 유신본당인 신민주공화당이 16%,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합해서 4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정당이 제1당이 되기는 했으나, 내란독재세력과 민주정치세력이 각각 2개의 정당으로 나뉘어 병립하는 4당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 체제를 ‘인위적으로’ 파괴하고 내란독재세력 절대 우위의 양당체제를 만든 것이 1990년의 ‘3당합당’이었다.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차지한 초거대 정당이 되었다.
민자당의 주력은 내란독재세력이었으나, 이들은 주류 언론들의 도움을 얻어 ‘보수대연합’을 자처하면서, 민주정치세력을 진보좌파로 몰아부쳤다.
반민주 내란독재세력이 보수를 참칭하고, 자칭 ‘개혁적 보수 정치세력’에게 진보 딱지를 붙이는, 국제 기준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한국의 양당체제는 이 때부터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내란독재세력 대 민주정치세력의 대립을 ‘보수 대 진보’의 대립으로 분식(粉飾)한 한국의 양당체제는 국민 일반의 정치의식을 포획했다.
사람의 합리적 고민은 선택 가능한 영역 안에 머물기 마련이다. 김영삼 정권 시절 일시적으로 민주정당의 외피(外皮)를 썼던 민자당의 후계 정당들은, 이명박 정권 때부터 공공연히 내란을 합리화하고 역대 독재자들을 미화하면서, 내란독재세력의 진면목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보수 대 진보’의 ‘인위적’ 정당 체제를 ‘의식적’으로 바꿀 계기
독재정권 시절 특권을 얻고 그를 ‘기득권화’한 사회세력도, 내란독재세력의 정치담론에 동조하는 성향을 내면화했다. 이들의 영향 때문에 반인간적 군사쿠데타와 반민주적 독재체제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최근 한 여론조사업체는 한국인 중 14%가 ‘상황에 따라서는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그 비율이 24%라고 발표했다. 독재의 망령이 아직 저 세상으로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물론 우리가 이룬 ‘민주적 성취’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를 공고히 하려는 사람들의 노력도 계속되었다. 1990년 220석에 육박했던 민자당의 의석 수는 경향적으로 줄어들어, 최근 세 차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이 모두 제1당의 지위를 잃었으며, 특히 2020년과 2024년 총선에서는 100석을 조금 넘기는 정도로 위축되었다.
윤석열 일당이 내란을 획책한 배경에는, 내란독재세력의 지지 기반이 계속 축소되는 추세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1990년에 내란독재세력이 ‘인위적으로’ 만든 정당 체제를 시민들 스스로 ‘의식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기형적 정당체제가 87년 김영삼 김대중 단일화 실패와 90년 3당합당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성찰해야 한다.
내란독재세력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지들이 다시 뭉쳐야 한다. 이번 선거가 독재세력 대 반독재세력, 반민주세력 대 민주세력, 헌정파괴세력 대 헌정수호세력의 재대결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내란독재, 헌정파괴세력의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또다른 내란의 위협을 소멸시키고 민주공화국을 반석 위에 올려 세울 수 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큰소리치는 ‘사회적 권위’ 해체해야
둘째, 내란독재세력 지지가 갖는 오래된 ‘사회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농촌공동체의 해체와 함께 진행되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래의 농촌공동체가 해체됨으로써 발생한 지역사회 내 ‘권위의 공백’을 한국인들이 자율적으로 메꿀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한 식민지 권력은, 자기들이 부리기 쉬운 한국인들을 지역사회 내 유력자로 만들려 했다.
세계대공황으로 식민지 농민들의 삶이 파탄지경에 이른 1930년대부터, ‘뜻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던 ‘유지(有志)’라는 말이 ‘관청과 연결된 사람’, 시쳇말로 ‘빽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지역사회에서 유지로 불린 자들은 한편으로 식민지 권력의 끄나풀 노릇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청을 상대로 한 지역민들의 로비스트 구실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식민지 지배체제와 별 차이 없는 독재체제가 구축되었기 때문에, 이른바 ‘지역 유지’들의 존재 방식과 행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빽’이라는 말 자체가 ‘권력자와 연결고리가 있음’이라는 의미였다.
집권여당은 자유당에서 공화당으로, 다시 민정당으로 바뀌었지만, 지역사회 내 ‘유지(有志)’들은 늘 여당 당원이 됨으로써 자기들의 영향력을 ‘유지(維持)’하려 했다. 그들은 선거철이면 ‘부정 선거자금’을 지역주민들에게 배분하는 구실을 했고, 일상적으로는 시군구 단위에 만들어진 형식상의 ‘민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곤 했다. 하다 못해 자동차 앞유리에 ‘○○구 청소년선도위원’이라는 스티커를 붙이면 ‘불법주차 단속’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웃과 시비가 붙거나 경찰의 단속을 당했을 때,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큰소리칠 수 있었다. 알량하지만 그래도 ‘기득권’이었다.
반면 독재정권 시절에 야당에 입당하는 것은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경찰과 정보기관의 사찰 대상이 될 줄 뻔히 알면서 ‘자진해서’ 야당 당원이 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친척이든 친한 친구든 빚쟁이든,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의 강권을 받고서야 “절대 비밀로 해 달라”는 말과 함께 입당원서에 서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야당 당원은 자기 당적을 숨겨야 했고, 그런만큼 ‘비주류’였다.

내란독재세력과 그 지지자들을 ‘소수’로 만드는 압도적 승리
1997년 수평적 정권교체는 ‘만년야당’을 일거에 ‘여당’으로 바꿔 놓았다. 과거 ‘준(準) 국사범’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비로소 자기 정치성향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을 거치면서도 그들은 한국 사회의 ‘주류’나 지역사회의 ‘유지’로 인정받지 못했다. 기업체 대표와 임원, 판검사와 의사, 교회의 장로와 권사 등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정당 지지 성향은 유권자 평균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왔다.
서울 ‘강남 3구’의 투표 결과는 늘 한국사회의 ‘주류의식’과 ‘정치적 선택’의 상관관계를 입증했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는 ‘기득권세력’이 아님에도 ‘한국사회에서 주류에 편입되려면 조선일보를 보고 보수정치세력(=내란독재세력)을 지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은 정치권력의 반민주성에 대한 비판을 ‘반국가적 행위’나 ‘성공한 자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해석한다. 이런 현상도 ‘독재의 망령’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이번 선거는 한국 사회에서 100년간 이어져 온 반민주적, 독재친화적 ‘주류의식’을 청산, 교체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든 직장에서든 ‘끄나풀형 유지’들의 특권적이며 부패한 권위 대신에, 주변 사람들의 신망(信望)을 토대로 한 ‘민주적 권위’가 새롭게 자리 잡아야 한다.
내란독재세력에 빌붙는 ‘천박한 물질주의’를 ‘비주류’의 지위로 몰아내고, 건강한 인본주의와 민주주의로 구성된 정치의식과 그를 체화한 사회세력이 ‘주류’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주류와 비주류의 관계가 수치로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내란과 독재를 추구하고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스스로 ‘소수이자 비주류’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독재의 망령이 다시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위협할 수 없을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mindlenews01@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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