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원가 120원과 사법의 정치화
윤석열, 권영세, 권성동. 지난해 12월 이후 한국에서 가장 문제적 남자 셋이다. 정부와 여당을 이끌던 둘은 무대에서 퇴장했고, 하나는 아직 남았다. 셋은 윤석열 정부 공동 창업자다. 또한 대통령으로서, 당 비대위원장이나 원내대표로서 정치와 정당 민주주의 퇴행의 주역이기도 하다.
다 검사 출신이다.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자나 깨나 법치를 외쳐도 부족했을 판에, 하나는 내란 우두머리가 되어 불법계엄을 선포했다. 다른 둘은 그에 동조 및 방관하거나 당내 절차를 밟아 선출된 대선 후보를 몇 시간 만에 끌어내리려 했다.
체제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반민주주의 선봉에 선 기막힌 모순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문제적 3인을 포함한 몇몇의 개인적 이탈인지, 아니면 과도한 권력기관으로 군림하는 검찰에서 길든 어떤 습성의 문제일까?
2주 전쯤 한 모임에서 일이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경제단체 등에서 나온 전문가 1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한명이, 법치를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훼손하게 됐는지 의아하다면서 말을 보탰다.
“시사 프로그램에는 다 변호사들뿐이고, 우리 사회학자들은 출연 기회도 없다”.
‘법의 정치화’를 비판하면서 뱉은 말이지만, 한국 사회에 만연한 ‘법조의 과잉’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정치나 시사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공공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온갖 위원회 등에 법조인이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로 법조 전성시대다.
심지어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을 표방하는 나라에서, 입법부도 사법화가 진행된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법조 과잉이 심하다. 법을 적용하는 쪽 전문가 집단이 법을 만드는 쪽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법조인은 60여명이다. 전체 유권자의 약 0.09%(약 4만명)에 불과한 법조인이 의원의 20%에 이른다. 그 가운데서 판검사 출신이 절반이다.
미국과 독일 등도 법조인 비중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판검사를 하다 국회 배지를 단 비중이 우리나라처럼 높은 나라는 찾기 힘들다. 또 대부분은 정치 경력을 거의 쌓지 않은 채 스카우트된다.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 다섯달 만에 대선 후보가 된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법조인 출신 정치인 가운데 뛰어난 사람도 적지 않지만, 정치에 법의 요소와 법조 인력의 과잉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법조 과잉이 정치적 양극화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박상훈 전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입법의 홍수와 더불어 상대 진영을 고소·고발하는 데 법리에 밝은 법조인의 수요가 크게 늘었다.
엊그제 국민의힘은 상대 당 후보를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커피 원가가 120원이라고 한 걸 문제 삼았다. 자영업자가 처한 현실을 갖고서 논쟁을 벌일 수 있지만, 고발이란 방식으로 문제화하는 게 맞는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선거철마다 각 당은 법률 지식으로 무장한 조직을 키우고 상대 당 후보의 발언과 행위 등을 공격하는 강도를 높여왔다.
이런 환경에서는 정치적 이견과 갈등이 대화나 타협이 아니라, 법령과 온갖 규칙을 누가 더 유리하게 풀어내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된다. 당내 민주적 절차를 거쳐 대선 후보로 뽑힌 김문수 후보가, 단일화 압박에 못 이겨 후보 지위를 확인해달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 기각된 것은 그 결정판이다.
이러한 정치의 사법화 풍토가 사법의 정치화 현상마저 낳고 있다.
총장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검찰의 정치화는 정점을 찍었다.
법원도 과거 권력의 심부름을 하거나 양승태 대법원장 때처럼 뒷거래를 하기도 했지만, 이제 주연으로 나선 모양새다. 조희대 대법원에서 이재명 후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행태는, 법원이 정치적 행위자로 전면에 나설 수 있음을 말해준다.
사법의 정치화는 어느 날 우연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정치의 사법화가 축적된 토양에서 자라났다.
정치적 문제 해결의 결정권을 사법에 넘겨주면서, 어느 순간 사법이 정치적 행위자로서 자신의 힘을 적극 행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법의 과잉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지금 목도하는 것보다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할 때가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류이근|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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