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01호부터 제110호까지
1 | 국보 제101호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
서울 종로구 | 국립중앙박물관 | ||||||
2 | 국보 제102호 |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 (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 |
서울 용산구 | 국립중앙박물관 | ||||||
3 | 국보 제103호 | 중흥산성쌍사자석등 (中興山城雙獅子石燈) |
광주 북구 | 국립광주박물관 | ||||||
4 | 국보 제104호 | 전흥법사염거화상탑 (傳興法寺廉居和尙塔) |
서울 용산구 | 국립중앙박물관 | ||||||
5 | 국보 제105호 | 산청범학리삼층석탑 (山淸泛鶴里三層石塔) |
서울 용산구 | 국립중앙박물관 | ||||||
6 | 국보 제106호 |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 (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
충북 청주시 | 국립청주박물관 | ||||||
7 | 국보 제107호 | 백자철화포도문호 (白磁鐵畵葡萄文壺) |
서울 서대문구 | 이화여자대학교 | ||||||
8 | 국보 제108호 | 계유명삼존천불비상 (癸酉銘三尊千佛碑像) |
충남 공주시 | 국립공주박물관 | ||||||
9 | 국보 제109호 | 군위삼존석굴 (軍威三尊石窟) |
경북 군위군 | 군위군 | ||||||
10 | 국보 제110호 | 익재영정 (益齋影幀) |
서울 용산구 | 국립중앙박물관 |
종 목 | 국보 제101호 |
명 칭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구)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국립중앙박물관 |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부도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일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부도가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도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1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은 일찍이 도둑맞아 지금은 한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종 목 | 국보 제102호 |
명 칭 |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국립중앙박물관 |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부도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유명한 승려로서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다.
기단(基壇)은 네모난 바닥돌을 깐 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높직한 괴임을 두어 가운데받침돌을 올린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탑신(塔身)의 몸돌로,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다. 몸돌에는 공을 가로·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여덟 곳의 모서리마다 꽃조각을 둔 것이 눈에 띄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인 지붕돌 밑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부도형식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홍법국사가 입적한 고려 현종 8년(1017) 이후로 보고 있다. 공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려지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부도로, 섬세한 조각과 단조로운 무늬가 잘 조화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종 목 | 국보 제103호 |
명 칭 | 중흥산성쌍사자석등(中興山城雙獅子石燈)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광주 북구 매곡동 산83-3 국립광주박물관 |
시 대 | 통일신라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국립광주박물관 |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이 석등은 큼직한 연꽃이 둘러진 아래받침돌 위로 가운데기둥 대신 쌍사자를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두 마리의 사자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8각의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이 뚫려 있고,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장식이 번잡하지 않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수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조각기법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라 하겠다. 원래는 중흥산성내에 있었으나, 일본인이 무단으로 반출하려 하여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다가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고 있다.
종 목 | 국보 제104호 |
명 칭 |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통일신라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국립중앙박물관 |
통일신라 말의 승려 염거화상의 사리탑이다.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선(禪)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체징에게 그 맥을 전하여 터전을 마련한 뒤 문성왕 6년(844)에 입적하였다. 이 탑은 원래 강원도 흥법사터에 서 있었다 하나,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탑이름 앞에 ‘전(傳:∼라 전하다)’자를 붙이게 되었고, 원래 위치에서 서울로 옮겨진 후에도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 옮겨졌다가 경복궁에 세워졌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탑은 아래위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마다 소박한 조각이 멋스럽게 펼쳐져 있다. 밑돌에는 사자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가운데돌에는 움푹 새긴 안상(眼象)안에 향로를 새겨 두었다. 2단으로 마련된 윗돌은 아래단에는 연꽃을 두 줄로 돌려 우아함을 살리고 윗단에는 둥그스름한 안상(眼象) 안에 여러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사리를 모셔둔 탑신(塔身)의 몸돌은 면마다 문짝모양, 4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가며 배치하였는데, 입체감을 잘 살려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당시의 목조건축양식을 특히 잘 따르고 있어서 경사면에 깊게 패인 기왓골, 기와의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모양, 밑면의 서까래표현 등은 거의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탑을 옮기기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
원래 강원도 흥법사터< 興法寺址 >라고 전해지는 곳에 있었던 신라말< 新羅末 >의 고승< 高僧 > 염거화상< 廉巨和尙 >의 부도< 浮屠 >로 탑골공원에 옮겨왔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型 >의 이 탑은 신라부도< 新羅浮屠 >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짜임새가 있고 아담한 솜씨로 신라< 新羅 > 말기< 末期 >인 문성왕< 文聖王 > 6년(844)에 세워졌다. 이 부도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우아한 기품과 소박한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으며 세부의 조각도 아담하다. 원 위치에서 옮겨 올 때 탑속에서 금동탑지< 金銅塔誌 > 가 발견되어 조성년대< 造成年代 >를 알 수 있게 되었다. |
종 목 | 국보 제105호 |
명 칭 | 산청범학리삼층석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통일신라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국립중앙박물관 |
범허사라고 전하는 경상남도 산청의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41년경 대구의 일본인 골동상이 구입하여 공장에 세워 놓았으나, 1947년 경복궁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바닥돌과 기단의 아래부분은 옮겨 세울 당시 시멘트로 보강한 탓에 원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의 가운데기둥은 2개씩, 위층은 1개씩을 두었다. 특히 위층 기단에는 가운데기둥으로 나누어진 각 면에 8부중상(八部衆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탑신부는 1층 몸돌에 보살상의 모습을 1구씩 조각해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며 각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은 모습이다. 또한 추녀 끝의 치켜올려진 정도가 날카로워 경쾌한 인상을 보여준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의 1층 몸돌에 8부신중 및 보살상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장식탑’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장식적인 조각표현으로 인해 장중하고 소박한 맛을 잃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종 목 | 국보 제106호 |
명 칭 |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
시 대 | 통일신라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국립청주박물관 |
1960년 9월, 충남(忠南)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 다방리(多方里) 비암사(碑巖寺)에서 발견되었다.
장방형 4면석(面石) 각면에 불상과 명문(銘文)을 조각한 비상(碑像) 형식이다. 정면 양쪽에 둥근 기둥을 세워 감형(龕形)을 이룬 가운데에 테를 두어 명문을 각자(刻字)하고, 그 안에 아미타(阿彌陀) 삼존상(三尊像)이 양각되어 있다.
본존(本尊)은 얼굴이 다 부서졌으나 단판(單瓣) 복련(複蓮)의 수미좌(須彌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상으로 옷끝은 밑으로 내려 대좌의 반을 덮었고, 옷주름은 좌우대칭으로 표현되었으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비롯하여 습의(褶의) 사이에 연주가 곁들여져 있다.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에 삼도(三道)는 없는 듯하고, 머리에는 연화(蓮華)와 연주(聯珠)로 장식된 둥근 두광(頭光)이 있다.
본존 대좌 밑 좌우에는 안을 향하여 사자(獅子)를 배치하였는데, 바로 그 등 위치에 복련(複蓮) 위에 시립(侍立)한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다. 보살상(菩薩像) 역시 얼굴은 모두 부서져 알아볼 수 없으나, 단판(單瓣) 연화(蓮華)가 있는 원광(圓光)이 있고, 목에는 가슴까지 늘어진 짧은 목걸이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영락(瓔珞)이 걸쳐져 있다. 자세는 정면으로 꼿꼿이 서 있고, 천의(天衣)는 측면에서 길게 늘어져 연대(蓮臺)에 이르러 앞면에서 X자로 교차되었다.
본존과 협시(脇侍)의 어깨 사이에는 원광(圓光)이 있는 나한상(羅漢像)이 얼굴만 내밀고 있는데, 손상이 심하다. 협시상(脇侍像) 좌우에는 인왕상(仁王像)이 연대(蓮臺) 위에 시립(侍立)해 있는데, 반라(半裸)의 상반신에 짧은 목걸이와 아랫배에서 원반(圓盤)을 거쳐 교차되는 긴 목걸이가 걸쳐져 있다. 이 여러 상들 밑에는 단판(單瓣)의 큰 연판(蓮瓣) 9엽(葉)이 각출(刻出)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조(高彫)되어 있다.
윗부분은 1단 낮게 보주형(寶珠形) 거신광(擧身光)이 2중으로 있어 안의 것은 삼존불(三尊佛)을 싸고 있다. 연주(聯珠)로 주상(周像)을 돌린 가운데에 화염(火焰) 속에 5구(軀)의 화불(化佛)이 있고, 밖에는 9구(軀)의 비천(飛天)이 있다. 상단(上端) 좌우 간지(間地)에는 한층 더 낮추어 인동문(忍冬文)과 탑(塔)을 받든 비천(飛天)을 4구(軀)씩 배치하였다.
두 측면에는 아래위 2단에 각각 2구(軀)씩 연경(蓮莖)으로 이어진 복련(複蓮) 위에 악기를 연주하는 낙천좌상(樂天坐像)이 있고, 하단(下端)에는 앞쪽을 향한 용두(龍頭)가 조각되었으며, 간지(間地)에 명문(銘文)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뒷면은 4단을 이루고, 단마다 5구(軀)씩의 작은 좌불(座佛)이 안치되었으며, 간지(間地)에는 인명(人名)이 새겨져 있다. 바닥에 장방형의 촉이 있는 것을 보면, 따로 대석(臺石)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상의 조각은 정교(精巧) 세치(細緻)하며 장엄(莊嚴)을 다하였고, 세부양식에 있어서도 고식(古式)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다. 이러한 양식과 명문(銘文)에 의하여, 조성연대(造成年代)는 신라(新羅) 통일 직후 문무왕(文武王) 13년(673)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 목 | 국보 제107호 |
명 칭 |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
분 류 | 유물 / 생활공예/ 토도자공예/ 백자 |
수량/면적 | 1개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이화여자대학교 |
관 리 자 | 이화여자대학교 |
조선시대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포도무늬를 그린 백자항아리로, 높이 53.3㎝, 아가리지름 19.4cm, 밑지름 18.6cm이다. 조선시대에는 도화서의 화가인 화원들에게 도자기를 굽는 곳에 가서 도자기들에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이러한 그림 중에는 청색 안료인 청화(靑華)로 된 것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검은색 안료인 철사나 붉은색 안료인 진사(辰砂)로 된 것은 비교적 수가 적었다. 항아리 중에서 포도무늬의 그림은 또 다른 격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항아리의 크기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조선 중기 항아리의 전형으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항아리의 아가리는 알맞게 올라왔으며, 아가리에서 어깨까지 둥글게 팽창되는 모습이 당당함과 대담함을 느끼게 한다. 몸체에는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포도 덩굴무늬를 그려넣었는데, 그 사실성 및 농담과 강약의 적절한 구사에서 18세기 백자의 높은 회화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 2004년 8월 31일 국보 제107호 이조백자철사포도문호에서 백자철화포도문호로 명칭변경됨.(명칭에 일제잔재가 남아 있고 용어상 부적절한 면이 있어 적정한 명칭으로 변경) |
조선(朝鮮)시대 백자(白磁)항아리에 활달하고 원숙한 솜씨로 그림을 그려 넣은 작품들은 거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들의 그림이었다. 사옹원(司甕院)은 해마다 감조관(監造官)을 임명하여, 화원들을 거느리고 분원(分院)에 나가 화사기(畵沙器)의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이러한 그림 중 청화(靑華)로 된 것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철사(鐵砂)나 진사(辰砂)로 된 작품은 수가 적다. 더구나, 철사 그림으로 된 항아리 중에서도 이 포도 항아리의 그림은 별격(別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항아리의 크기로 보나 정제(整齊)된 전형적인 조선(朝鮮) 중기 항아리의 형식으로 보나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유약(釉藥)은 맑은 청백유(靑白釉)이며, 여러 층으로 가려서 쓴 철사 색의 짙고 옅음도 뜻대로 발색(發色)되어, 이 항아리가 지닌 전체적인 요기(窯技)의 세련도가 보통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이 항아리는 원래 일인(日人)이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8·15 후 다른 손을 거쳐 1960년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에서 사들였다. ※ 2004년 8월 31일 국보 제107호 이조백자철사포도문호에서 백자철화포도문호로 명칭변경됨.(명칭에 일제잔재가 남아 있고 용어상 부적절한 면이 있어 적정한 명칭으로 변경) |
종 목 | 국보 제108호 |
명 칭 |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
시 대 | 통일신라 |
소 유 자 | 국립중앙박물관 |
관 리 자 | 국립공주박물관 |
이 비상은 충남 연기지방(燕岐地方)에서 발견된 비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작품이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직사각형의 비신(碑身)이 세워져 있고, 비신 위에는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전형적인 비상 형태이다. 비신부는 4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 하단부 중앙에 큼직한 삼존좌불상(三尊坐佛像)을 새겼으며, 협시보살(脇侍菩薩) 좌우로 비상을 조성한 조성기(造成記)를 새겼고, 머리 위로는 작은 불좌상(佛坐像)들을 9단에 나누어 촘촘히 나타내었다.
이 작은 불상들은 좌우측면과 뒷면 그리고 지붕돌에까지 표현되었는데 깨어진 지붕돌의 수까지 계산한다면 900여 구가 넘는 불상이어서 천불(千佛)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앞면의 삼존불좌상은 비상의 주존불(主尊佛)인데 본존불은 상현좌(裳縣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으며, 좌우보살상은 입상(立像)으로 삼각형구도를 보여 준다. 모두 연꽃대좌(臺座)와 보주형광배(寶珠形光背)를 나타내었으며, 본존불의 다소 딱딱해진 정면성(正面性)과 협시상들의 고졸성(古拙性) 등은 삼국시대(三國時代) 백제불양식(百濟佛樣式)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명문(銘文)에 보이듯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백제유민(百濟流民)들이 그들의 선조를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비상의 역사적 의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
종 목 | 국보 제109호 |
명 칭 |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산15 |
시 대 | 통일신라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군위군 |
천연 절벽의 자연동굴속에 만들어진 이 석굴사원은 인공적 석굴사원인 석굴암의 석굴보다 조성한 연대가 앞선 것으로, 한국 석굴사원 사상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이 석굴사원< 石窟寺院 >에는 서기 700년경에 조성된 삼존석불< 三尊石佛 >이 안치< 安置 >되어 있다. 본존불< 本尊佛 >인 중앙의 여래상의 높이는 2.88m, 양옆 협시불< 脇侍佛 > 가운데 왼쪽 보살상은 1.92m, 오른쪽 보살상은 1.8m에 이르는 큰 석불들이다. 본존여래상은 통일신라< 統一新羅 > 불상의 특징인 장중한 위엄을 갖추고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을 하였으며, 통견< 通肩 >의 얇은 법의< 法衣 >를 입고 있다. 좌우의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목, 허리, 다리에서 살짝 굽은 삼곡< 三曲 > 자세를 하고 있다. 세련된 옷주름과 왼쪽 보살상의 정연한 보주형< 寶珠形 > 두광< 頭光 >은 통일신라 조각예술의 사실적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존여래상< 本尊如來像 >의 상현대좌< 裳懸臺座 >와 보살상의 복련대좌< 覆蓮臺座 >와 부드러운 선각< 線刻 > 등에서 삼국시대 조각예술의 상징적 솜씨도 남아 있다. 이 석불들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이룩된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종 목 | 국보 제110호 |
명 칭 | 익재영정(益齋影幀) |
분 류 |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
수량/면적 | 1폭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국립중앙박물관 |
관 리 자 | 국립중앙박물관 |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초상화이다. 이제현은 원나라의 만권당에서 조맹부 등과 교류하며 고려에 신학문과 사상을 소개하고, 성리학을 전파,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호는 익재·역옹으로, 『국사』, 『역옹패설』 등을 남겼다.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그림 위쪽에는 원나라 문장가인 탕병룡이 쓴 찬(贊)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 그림을 33년 만에 다시 보고 감회를 적은 익재의 글이 있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 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된 듯하나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충숙왕 6년(1319) 이제현이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갔을 때 당시 최고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그림으로, 전해오는 고려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다시 그려진 이모본인데 비해 직접 그린 원본으로, 안향의 반신상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원본 2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전신을 그린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얼굴과 의복을 선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다른 초상화들과 비슷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고 배경이 되는 바탕에 아무런 그림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비해 빈틈없는 구성과 왼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고려 초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동일한 양식의 익재의 초상화 4점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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