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비의 마음 | |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 저 역시 며느리만 생각하면 할 말을 잃어버려요. 귀한 딸을 데려와 못난 자식 때문에 그만 비명횡사를 하게 했으니…. 사돈 되시는 노경린(盧慶麟) 목사에게도 그져 미안코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그 후 자식 놈은 과거를 보는 족족 아홉 번이나 내리 장원을 거듭해 가문의 이름을 빛냈고, 대학자와 정치가가 되어서는 큰 이름을 날렸어요.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물론 집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고 또 시를 잘 짓는 재능은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아내가 48살로 요절하자, 글쎄 삼 년 상을 마친 이이가 19살의 나이로 가출을 한 겁니다. 신세대라 그런지 도통 참을성도 없고 아비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저는 부지깽이를 들고 때리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나중에는 비행 청소년으로 전락해서는 스님이 된다며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얼어 죽을! 얼마나 속이 상했는 지 몰라요. 또 있어요. 제 가문에 자손이 귀한 것도 아마 집 사람의 몸이 약했던 탓이 아닌가 싶어요. 자식 놈만 더 오래 살았어도 끔찍한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착한 며느리도 그렇게 죽지는 않았지 않겠어요. 제가 역사에 죄를 지은 기분이어요. 자식 놈은 저를 가리켜 ‘진실하고 정성스러워 꾸밈이 없었으며 너그럽고 검소한 것이 옛 사람다운 기풍이 있었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자식과 집 사람의 이름에 가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요? 집 사람이 유명하게 된 뒤에는 모두 저의 넓은 가슴과 아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만약 제가 ‘이 여편네야, 여자가 무슨 글이고 그림이야? 살림이냐 똑바로 해.’라고 눈을 흘겻다면 가능했겠어요? 저는 남편의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 아내의 문학적, 예술적 재능을 키워주고 싶었던 멋진 남자였다고요. 아시겠어요. 2003년 5월 18일에는 사단법인 대동풍수지리학회의 박지사 1기 회원과 고급과정 수료한 분 50여명이 고제희 이사장을 모시고 찾아온다며 기별이 왔어요. 고 이사장은 참 좋은 분이어요, 저의 집을 자주 찾아올 뿐만 아니라 술까지 딸아주거든요. 지난 번에는 EBS촬영팀하고 함께 오기도 했어요. 마구 기다려지네요, 묘비를 보면 제 벼슬 명이 가득 쓰여지고, 끝에 ‘정경부인 평산신씨 합장’이라고 쓰여 있어요. 제 역시 파주에 있는 자운서원 내에 있어요.
대학자의 인품을 흠모하고 또 현모양처의 덕행을 본받고자 하는 선남선녀님들 어서들 오세요. 맛있는 차를 끓여놓고 기다릴께요. 에고 닭이 우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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