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열녀의 한

道雨 2008. 1. 26. 12:04

 

 

 

열녀의 한

율곡 선생의 부인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처 곡산 노씨(谷山盧氏)입니다.

  곡산은 본관(本貫)이며, 저의 아버님은 성주(星州) 목사를 지낸 분입니다.

  저는 대학자로 추앙받는 남편이 스물 두 살 때에 시집을 왔어요.

  그런데요, 기구한 저의 사연을 들어주시지 않겠어요?

   10만명의 병사를 양성해 국방을 든든히 하자던 남편은 임진왜란을 8년이나 앞두고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난리가 나자, 저는 여종을 데리고 파주에 있는 남편의 무덤(현재 자운서운 내)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양을 함락한 왜구가 평양으로 진격해 가면서 저희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색에 굶주린 왜놈들은 이리처럼 달겨들어 성폭행을 하려고 들었어요. 저는 은장도를 꺼내어 힘껏 움켜 잡았습니다.

  전체가 1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에 날이 5센티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칼이지요. 칼자루와 칼집은 원통형의 먹감나무로 만들었고, 표면에는 호도 기름이 칠해져 윤이 반질반질 났습니다. 전체적으로 ‘새 을(乙)’ 자를 본따 만든 소위 을자맞배기 칼로, 칼집과 자루에는 은장석이 붙어있고 섬광이 번뜩이는 칼날의 중앙에는 ‘一片丹心(일편단심)’이라는 글자가 정교하면서도 깊이 새겨진 칼입니다.

  옆에 있던 여종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비명을 질러 댔어요. 그래서 저는 그의 손을 꼭 움켜잡고 힘주어 말했어요.

  “몸을 더럽히고 부끄럽게 살기 보다는 우리의 길을 당당히 가는 거야. 죽음이란 사람의 마음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잠깐만 참으면 돼. 그러면 마침내 아무것도 모르게 될 거야. 두려워하지 마.”

  저는 한 바탕 왜놈을 꾸짖고는 너무도 당당하게 여종과 함께 자결했습니다.

  곧 끝날 것같던 전쟁은 칠 년이나 끌며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누구 하나 저의 외로운 백골을 거두어 주지 못했습니다. 난리 통에 누가 불쌍한 우리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 줄 수 있겠어요? 살과 피는 물이 되고, 싸늘한 백골은 비바람에 날리어 씻기었습니다. 달 밝은 밤이면 마치 도깨비 불처럼 번쩍 번쩍 빛을 냈지요. 그리고 구천을 떠도는 혼은 너무도 슬퍼 밤만되면 피를 토하고 울었어요.

  세월은 무심하게도 그렇게 흘러갔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훗날 후손들이 찾아와 백골을 수습할 때에는 저와 여종의 것을 분간하기 어려웠어요. 지금처럼 시신을 유전자로 감식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였으니까요.

  2002년 8월 말에 태풍 "루시"가 온 국토를 송두리채 유린했다는 소식이 저승 TV에도 여러 번 나왔어요. 230여 명의 인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5조원이 넘는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고요. 얼마나 마음 아프고 속이 상해요, 하루빨리 복구가 완료되어 예전의 평화를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강릉의 어느 공원묘지도 폭우에 휩싸이면서 700여기의 무덤이 훼손되고, 그곳에 묻혀있던 주검들도 땅 속에 파묻히거나 또는 실종되어 행방이 모연하다면서요, 어떡해요. 유족들에게는 정말 안됐지만,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일이니..... 위령탑이라도 세워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그런데 본래 남편의 가문은 쌍분이 아닌 합장을 하는 집안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저를 합장해야 하는데 저와 여종의 뼈가 섞여있어서 곤란했대요. 쌍분은 안되고, 합장을 하자니 여종의 뼈가 함께 묻히고…. 그래서 후손들은 저와 여종의 뼈를 한곳에 모아 남편의 묘와 반만 연이어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남편의 무덤 뒤쪽으로 반만 걸치게 말이여요.

   남편의 학덕을 추모하러 오는 분들은 고개를 마냥 갸우뚱거립니다. 무덤의 형태가 이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이승에 내려와 아픈 사연을 밝히는 중입니다.

  무덤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무덤은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았음을 후세에게 상기시켜주는 최소한의 유품이며 또 그를 알았던 사람들에게 추념의 여지를 남겨주는 기념물이어요.

  당대를 풍미했던 정치가와 천하를 호령했던 장군에서부터 뭇 사내의 애간장을 태웠던 기생, 그리고 이름모를 백성에 이르기까지, 현재 우리와 똑같이 힘들게 삶을 살다가 이제는 저런 모습으로 남았음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왜놈에게 목숨을 빼앗겨 한 줌의 흙이 되었어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숙명으로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죽어야할 명분이 있었고 또 그것을 당당히 거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조선의 여인들은 속박과 억압 속에서도 당당하게 절개와 지조를 지키며 자기가 할 도리를 묵묵히 처리하며 살아왔어요. 한은 가슴으로만 삭힐 뿐 소리내어 서러움을 말하지도 않았어요.

  임진왜란 중 비굴해지지 않고 지조를 지킨 선비보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이 더 많았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그녀들이 얼마나 자기에게 당당했는지를 알 수 있을 거여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제 곁에는 평생을 존경하며 사모했던 남편이 언제나 있어 그래도 저는 행복한 여자여요. 아니, 벌써 해가 떠오르는지 별빛이 빛을 잃어요. 여기는 저승이라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요.

  참 저와 남편을 만나러 오시려면 파주에 있는 자운서원으로 오세요. 자운 서원에는 저희 부부뿐만 아니라 현모양처의 귀감이신 시어머니 신사임당과 시아버지인 이원수 선생이 묻힌 묘도 있고, 또 남편 율곡 선생 일가의 유품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념관도 있고요, 공간이 넓어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도 제격이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사진: 율곡 이이와 곡산 노씨의 묘 전경. 부인의 묘가 뒤에 연이어 있되, 합장도 쌍분도 아닌 특이한 형태로 모셔져있다.>